[시사뉴스 정춘옥 기자] ‘서양적 세계관’ 하면 대개 ‘신 중심의 비합리적 중세를 타파하고 인간과 이성을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게 된 합리적 관점’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과학적, 합리적, 휴머니즘적 사고 조차 2천여 년 동안 도도히 흘러온 기독교의 저변 위에서 생겨나고 발전한 것이라면? 톰 홀랜드는 서구 사회 세계관에 대해 명쾌한 통찰을 제공해준다.
신과 인간의 2500년 연대기
세계적인 역사 저술가 톰 홀랜드는 기독교가 어떤 과정을 거쳐 서구 사회와 서양인의 정신을 지배하게 됐는지 다룬다. 이 책은 가장 널리 퍼져 있고 오늘날까지도 지속되는 기독교적 영향의 여러 흐름을 압축적으로 추적한다. 이를 위해 고대 로마부터 비틀스와 메르켈 총리까지 2500년을 21개 장으로 나누면서, 각 장을 ‘혁명’, ‘육체’, ‘우주’와 같은 핵심 키워드로 묶는다.
장마다 개별 인물이나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세 단락은 해당 장의 키워드로 일관된 흐름을 형성하고, 그러한 맥락이 점차 장을 거듭할수록 쌓여, 독자는 지금의 세상에까지 기독교가 미쳐온 영향력을 통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톰 홀랜드가 이 책을 집필한 동기는 그가 10대 때부터 가져온 기독교의 비합리성에 대한 의구심과, 그럼에도 서유럽인으로서 자신이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사고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이러한 ‘모순’과 ‘역설’이 곧 이 책의 서술방식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이는 책의 첫머리에서부터 뚜렷하게 드러난다. 십자가형은 고대 로마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경멸받은 ‘최고의 형벌’이었다. 그런 만큼 반항적인 노예에게 부과하기에 가장 적합한 징벌이었다. 그래서 예수의 처형 이후, 십자가형을 당한 사람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로마인들 대다수에게 매우 혐오스럽고 기괴한 일이었다.
그러나 수백 년 뒤 십자가형은 죄악과 죽음에 대한 승리의 상징이 됐으며, 천 년이 넘자 전 인류사상 가장 유명하고 위대한 헌신과 연민의 아이콘이 되었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마태오 복음서〉 20장 16절)라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그 자체로 역설이었고, 이후 모든 상하주종 관계에서 이 역설은 힘을 발휘했다.
‘박해하는 사회’를 감독
그런데 모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500여 년 뒤, 부주의한 당국에 의해 처형된 하느님을 숭배하는 기독교 교회가, 이제 반대로 이른바 ‘박해하는 사회’를 감독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모순과 역설은 한편으로 중세 이후 지배적 세력이 된 기독교 교회, 그리고 대항해 시대 이후 전 세계를 점령 지배하게 된 서유럽의 지위 변화에 크게 기인한다.
과거 고대 사회에서는 박해받는 소수 세력으로서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그들이 주류 지배 세력이 된 뒤에는 바로 그러한 기독교의 가르침에 스스로의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 된 것이다.
종교와 세속의 분리, 일부일처제, 가문이 아닌 당사자 간의 의지에 따른 결혼, 법률과 과학은 물론이고, 계몽주의, 인권, 민주주의, 마르크스주의 같은 근대의 진보적 개념, 심지어 무신론에조차 기독교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지배 이데올로기인 기독교를 벗어나고자 한 근대의 운동조차, 과거 기독교의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움직임을 본딴 형국이 되고 마는 역설이 반복되어온 것이다.
이 책은 결국 서구 사회와 서양적 세계관의 근간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나아가 20세기까지의 몇백 년 동안 세계를 서유럽이 지배하다시피 했고 또 그 과정에서 기독교 전도가 매우 중요한 요소였음을 감안하면, 곧 현재의 세계를 깊이 이해하는 통찰을 제공한다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