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중앙교회'검색결과 - 전체기사 중 371건의 기사가 검색되었습니다.
상세검색가정, 학교, 직장, 사업터 등 자신이 속한 분야마다 아름답게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지혜가 있으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마음을 쉽게 하나로 모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마음의 화평을 이루고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 있는 지혜를 받을 수 있을까요? 화평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이 기쁘고 편안함, 서로 사이가 화목하고 평화스러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기 원하시므로 화평의 영적 의미는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넉넉하고 아름다운 마음’이지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유형의 사람과는 쉽게 화평을 이루지만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과는 화평을 이루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어느 누구와도 불편함 없이 넉넉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품고 화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선이 없으면 화평을 이루기 어렵습니다. 내게 원치 않는 일이 생기면 마음이 불편하고 요동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마음에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과 화평해야 합니다. 자신과 화평하려면 마음 속에 있는 미움, 시기, 교만, 자존심, 불편한 감정 등 비진리의 죄성들을 온전히 벗어 버려야 합
사람들은 저마다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를, 어떤 사람은 권세를, 어떤 사람은 지식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귀히 여기며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잠 3:14). 지혜는 얼마큼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측량할 수 없이 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경험과 학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일반적인 지혜와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시는 하늘의 지혜가 있지요. 사람이 아무리 지혜롭다 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25절에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말씀합니다. 지혜란 쌓은 지식이 활용되는 방법론과 같습니다. 명철이 있어 앞길이 환히 보인다 해도 지혜가 없다면 명철의 가치가 발휘될 수 없습니다. 명철은 배움을 통해서도 깨우칠 수 있지만 지혜는 마음의 그릇을 갖춰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가 있는 사람은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알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자발적인 협조를 이끌어내며 물 흐르듯 일을 진행합니다. 반면에 지혜 없는 사람은 좋은 일을
저는 젊은 시절 7년간 질병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갖 질병으로 죽음의 골짜기 같은 인생에 구원의 빛을 주시고 건강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여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 나가니 물질, 자녀의 축복, 권능 등 필요한 모든 것을 넘치게 부어 주셨습니다. 사람들과의 사랑은 때로 변하고 식어버리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 편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져 떠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십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면 다시 그 품에 안아 주시고 새 힘과 위로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삶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중 첫째는 사랑의 눈길로 바라봐주시는 은혜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옆집 아이보다 며칠만 빨리 말을 시작해도 “우리 아이가 유달리 똑똑한가 보다.” 하거나,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노래를 흥얼거리면 “음악성이 뛰어난 것 같다.”며 좋아합니다. 이처럼 부모는 자녀가 조금만 잘해도 크게 기대하고, 부족한 것은 이해해 주고 덮어 주려고 합니다. 장차 자녀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 행복한 삶을 살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수고를 아끼지 않지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도 이와 비슷합
통계에 따르면 결혼한 부부의 약 10~15% 정도가 불임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고 합니다. 또한 최근 심각한 환경오염, 정신적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불임 환자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임신이 되어도 되풀이되는 유산으로 힘들어하는 부부도 많이 있지요. 우리 교회 성도들 중에도 이 같은 문제를 갖고 있는 분들이 있었지만 하나님 말씀을 좇아 바른 신앙생활을 해나갈 때 건강한 자녀를 얻어 행복한 가정으로 바뀌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중 한 분의 경우를 소개합니다. 집사님은 대구 만민교회에 출석했지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2010년, 결혼 후에도 주일 대예배만 간신히 드리며 십일조도 온전히 하지 않았지요. 그해 12월, 결혼한 지 9개월 됐을 때 부부에게 큰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아내 집사님이 자궁근종 수술을 받았는데 담당 의사로부터 임신이 어려울 것이라는 진단결과를 들었습니다. 2011년, 우여곡절 끝에 임신이 됐지만 2개월 만에 유산이 됐지요. 그때 마침 대구만민교회에서 이희선 목사님(만민 전(全) 지교회 총지도교사)이 인도하는 성령충만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기도해 준 권능의 손수건(행 19:11~12)을 얹고 이희선 목사님
이스라엘 통일왕국은 솔로몬 왕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남(유다)과 북(이스라엘)으로 분열됩니다. 두 나라 모두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심히 노엽게 하였지요. 그 결과 북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의 침략을 받아 멸망당하고, 남유다도 세 차례나 바벨론 제국의 침공을 받았습니다. 이때 다니엘과 세 친구 곧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포로로 잡혀갔는데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면 다니엘의 세 친구의 선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첫째,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철저히 싫어하는 마음을 소유하였습니다. 바벨론 왕은 융화정책의 일환으로, 포로로 잡아 온 이스라엘 왕족과 귀족 중에 모든 재주를 통달하고 지식 있는 소년들을 데려다가 그 나라 학문과 방언을 배우게 했습니다. 그때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도 발탁돼 3년간 왕궁에서 왕이 내려 주는 음식을 먹어야 했지요. 이들은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며 감독관에게 왕의 진미를 먹지 않고 대신 채식만 먹을 수 있도록 조건부 허락을 받았습니다. 혹여 왕의 진미 중에 우상의 제물이나 가증한 식물(食物)이 있을까 염려되었기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는 많은 사람이 따랐습니다.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는 등 놀라운 일들이 끊임없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한 사람이 예수님께 부모님의 유산을 공평히 나누도록 형에게 권면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어떤 해결책을 주셨을까요? 누가복음 12장 15절을 보면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셨습니다.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그가 탐심을 버리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계속 형제간에 감정 상할 일이 생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탐심을 버려야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실 수 있지요.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축복받을 수 있는 영적인 해답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크고 작은 인생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예수님처럼 근본을 파악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양순한 마음을 이루어야 합니다. ‘양순’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의 향이 말과 행함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양순의 특징으로는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상대의 마음을 평안케 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진리로 분별합니다. 또한 사심이 없기 때문에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에
누군가를 사랑하면 상대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열심을 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일을 찾아 열심히 행합니다.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의 생각과 유익에 맞지 않으면 그 열심이 식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질이나 명예 때문에 점차 신앙생활에 소홀해지기도 합니다. 또 원하는 대로 응답이 되지 않으면 열심 내던 모습이 사라지기도 하지요. 이런 일들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한 열정이 평생 변함없었습니다. 앉은뱅이를 걷고 뛰게 하는 등 큰 권능을 행했어도 사도 바울이 얻은 것은 눈에 보이는 영광이나 당장 손에 잡히는 열매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한다고 돌에 맞아 사람들이 죽은 줄 알고 버릴 정도로 고난을 받았지요. 어떤 지역에서는 귀신을 쫓아내 주었는데도 오히려 그로 인해 많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힌 적도 있었습니다. 동족인 유대인들은 복음 전파를 못하도록 바울이 가는 지역마다 따라다니며 죽이려 했고 핍박했지요. 또한 애써 개척해 놓은 교회 안에 음행과 갖가지 죄악이 번지거나 성도 간에 분쟁의 소식이 들려서 깊이 근심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배신해 떠나는 일꾼
사람들은 저마다 이 땅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 부와 명예 등 자신의 만족을 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2천여 년 전 하늘 영광을 다 버리고 이 땅에 오셨고, 그것은 잠시잠깐인 이 세상의 소망이 아닌 영원한 소망 곧 헛되지 않은 영적인 소망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참된 소망은 무엇일까요?첫째는, 구원의 소망입니다. 죄로 인해 죽어가는 인생들에게 가장 큰 축복은 영원한 사망 가운데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8절에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말씀하신 대로 한 사람 곧 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은 죄인이 되었고,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므로 영원한 사망인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인생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각종 질병과 사고, 미움과 다툼, 슬픔과 외로움 등 수많은 고통 속에서 소망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이러한 인생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한줄기 빛으로 오셨습니다.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죄와 슬픔, 고통으로 가득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마구간 짐승의 구유에 누이셨고 영혼들을 위해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사셨
태풍이나 홍수 지진 같은 천재지변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면 누구나 그곳으로 피하고자 할 것입니다. 노아가 살던 당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악하여 죄악으로 가득한 것을 보고 한탄하시며 모든 것을 땅에서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이요 완전한 자’였던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짓게 하고 홍수의 심판을 외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가족 외에는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방주가 완성되고 노아의 가족들이 탄 뒤 7일을 더 기다리셨지만 돌이키는 사람이 없었고 결국 대홍수로 인해 다 죽고 말았습니다.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지 못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처럼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도에서 벗어났을 때는 영원히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방주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도와 죄사함의 기준을 성경에 정확히 제시해 놓으셨습니다. 따라서 구원의 방주와 같은 역할을 하는 하나님 말씀을 잘 정립하여 자신이 구원의 방주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방주의 재료를 ‘잣나무’로 지정하셨는데(창 6:14), 이는 대홍수 속에서 험한 파도를 견뎌내야 하는 방주의 재
다윗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뒤를 이어 왕으로 세움 받은 사람입니다. 이새의 여덟 명의 아들 중 말째로서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었던 다윗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다윗의 마음과 중심이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다윗은 어떠한 마음의 선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요?첫째, 다윗은 담대히 믿음으로 나갔습니다. 사무엘상 17장에는 이스라엘 군대가 이방 족속 블레셋과 엘라 골짜기에 대치한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블레셋 진영에 골리앗이란 장수가 있었는데, 그는 키가 3미터에 가까운 대단한 용사였지요. 그가 40일 동안 밤낮으로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는데도 아무도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한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기에 골리앗이라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물맷돌 다섯 개를 들고 담대히 그 앞에 나갔습니다(요일 4:18). 다윗이 던진 물맷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았고 거인 골리앗은 힘없이 쓰러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당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분연히 일어났던 다윗의 믿음의 행함을 하나님께서는 선으로 보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부와 명예, 건강, 자녀 등 모든 복을 받아 누린 인물이 나오는데,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가 이러한 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하다 인정하시고 깊이 사랑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아브라함은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녔습니다. ‘관용’이란 진리가 마음에 풍성하게 임하면서 동시에 진리의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양순’이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 이도 가하고 저도 가한 마음이되 그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마음이지요. 이러한 관용과 양순의 마음이 있으면 선하고 아름다운 말과 행함이 나옵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로 아브라함이 하나님 뜻에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올 때부터 함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실 때 롯도 더불어 축복을 받았지요. 그런데 둘 다 소유가 불어나자 더 이상 동거할 수 없었습니다. 많은 가축이 함께 있기에는 물과 목초지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는 일들이 일어났지요. 이때
기독교에서 추수감사절은 추수의 계절을 맞아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청교도들이 종교박해를 피해 신대륙 미국에 정착하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처음 수확한 소산들을 하나님께 정성껏 드리며 예배한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험난한 항해 끝에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지요. 그런데 인디언의 습격과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까지 돌아서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다행히 호의적인 인디언들도 있어서 그들의 도움으로 밀과 조, 옥수수 등을 경작하는 법을 배워 이듬해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인디언들을 초대해 햇곡식과 칠면조 고기를 요리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의 첫 수확의 기쁨을 나눴지요.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되어 그 후 미국에서 법으로까지 제정하여 지금까지 지키고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의 영적인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은 추수감사제를 기쁨과 감사로 드립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심에 감사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시편 56:12-13) 정성껏 예물을
진정 사랑이 있는 부모라면 아무리 많은 잘못을 한 자녀라 해도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마음 아파하며 늘 기다릴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집을 나간 아들이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재산을 탕진하고 집으로 돌아 왔을 때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며 기뻐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허랑방탕하며 죄악 가운데 살았다 해도 이에서 돌이켜 바른 삶을 살고자 하면 품에 안으시고 기뻐하시며 축복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 사랑을 체험하며 살고 있는 한 형제의 은혜로운 간증이 있어 소개합니다.형제는 모태신앙이었지만 신앙인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부터 음란물을 접하기 시작했는데 대학생이 되자 술, 여자, 게임 등 점점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군 입대하던 2005년부터 온몸으로 번진 아토피성 피부염은 무려 7년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또 우측 무릎 연골판이 주저앉는 부상을 입은 뒤로 자고 일어나면 무릎의 축이 돌아가 있기도 하고, 비가 오려고 하면 저리고 시큰거려 고통을 받았습니다. 특히, 2012년 7월에는 부정맥 증상이 심해져 마치 전력 질주를 하는 사람처럼 심장의 박동이 빨라졌습니다. ‘이러다 죽을
만일 사랑하는 자녀가 학교에서 큰 문제를 일으켜 퇴학을 맞게 될 위기에 처했다면 부모는 학교에 찾아가 무릎을 꿇고 “제발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사정할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당신 아들은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니 당장 데리고 나가세요!” 하며 모욕을 준다면 어떨까요? 이때 겸허한 마음으로 끝까지 선처를 구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를 이렇게까지 무시해?’ 하며 자존심 상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머무셨을 때입니다(마 15:21). 한 여인이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하며 자신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간청했지요. 시대적 상황을 봤을 때 가나안 족속의 후손 수로보니게 사람이 유대인인 예수님 앞에 나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멸시하며 상종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더구나 남자인 예수님 앞에 여인이 나와 무엇을 구한다는 것은 절박한 심정이 아니고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런데 가나안 여인이 귀신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는데도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도 하시지 않고 가만히 계셨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예수님께
모세는 400년 동안 애굽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킨 출애굽의 영도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주리라 하신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하나님 명령에 절대 순종해 백성을 인도할 한 사람을 택하셨는데, 그가 곧 모세이지요. 이처럼 모세가 택함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순종할 수 있는 중심과 지극한 선(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모세의 선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요?요셉 때에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이주해 온 이스라엘은 정착한 지 400여 년 만에 번성하고 강대해져 그 수가 수백만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애굽 왕은 이들에게 위협을 느껴 강제 노동시키며 학대하다가 새로 태어나는 남자 아이는 모두 죽이라 명했습니다. 이처럼 암울한 시대에 모세가 태어났고 부모는 석 달간 아이를 숨겨 키우다가 갈대 상자에 넣어 강물에 띄워 보냈지요. 애굽 군대에 발각돼 칼에 죽기보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기대한 것입니다. 마침 그때에 애굽 공주가 강에 목욕하러 나왔다가 상자에 담긴 모세를 발견하고 건져냅니다. 이를 강변에서 지켜보던 모세의 누나 미리암은 어머니 요게벳을 추천해 친어머니가 모세의 유모가 되지요.
사랑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배움이 많지 않은 어부, 죄인 취급받던 세리 등이 예수님의 생명 다한 사랑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구체적으로 어떤 사랑을 베푸셨을까요?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친히 사람의 형상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짐승과 다름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여시기 위해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또한 참된 양식이 되기 위해(요 6:51) 짐승의 먹이 그릇인 구유에 누이셨지요. 예수님께서는 구세주로서의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많은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으로 보지 못하던 사람이 보고 듣지 못하던 사람이 들었습니다. 문둥병자가 고침받고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걷고 뛰었으며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이 어둠의 세력에서 놓임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죽은 지 나흘이 돼 썩어가던 사람이 무덤에서 걸어 나왔지요(요 11장).성경에는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단지 행위로 율법을 지키는 데
[시사뉴스 이상미 기자] 사람들은 누구나 사건 사고를 만나지 않고 평안한 삶을 살아가기 원하지만, 다양한 문제에 부딪히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므로 축복 속에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29절을 보면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는 예수님의 고백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니 하나님의 크신 뜻을 다 이룰 수 있도록 동행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을까요?첫째, 자신을 낮추시고 온전히 순복하셨습니다.요한복음 1장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서는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심에도,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종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자기를 낮추시고 복종하셨지요.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신을 낮추시고 순복하시는 예수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아무리 곱고 아름다워도 세월이 흐르면 변질되고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성경 잠언 31장 30절에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면 이 땅에서 칭찬과 축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세세토록 존귀와 영광을 누립니다. 잠언 8장 13절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했고, 또 잠언 14장 16절에는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난다’고 말씀했습니다. 즉 악을 미워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악에서 떠나 선에 속해야 하며 이것이 곧 지혜입니다. 지혜롭게 행한 성경상의 인물로는 하나님께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인정받았던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과연 어떠한 지혜를 소유했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첫째, 믿음의 지혜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2대 왕이었던 다윗은 소년 시절,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블레셋의 이름난 장수 골리앗과 맞서 싸워 이겼습니다.그때 다윗은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엘리야는 B.C. 9세기경 우상 숭배가 만연한 북이스라엘 아합 왕 때에 담대히 하나님 뜻을 선포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850인의 이방 선지자들과 대결해 믿음으로 하늘에서 불을 끌어내렸고, 간절한 기도로 3년 반 동안 가물었던 이스라엘 땅에 큰 비를 내리게 했습니다. 사르밧 과부로부터 떡 한 조각을 공궤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떨어지지 않는 축복을 주었으며, 죽은 아이를 살리기도 했지요. 또한 요단강을 가르고 앞일에 대해 밝히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죽지 않고 산 채로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했지요. 과연 엘리야 선지자는 어떠한 마음을 가졌기에 하나님께서 이처럼 놀라운 권능으로 함께하시며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할 수 있는 축복을 주셨을까요? 엘리야는 원래 매우 유약한 성품이었습니다. 자신은 부족하고 내세울 것이 없다고 생각해 자신감이 없는 모습이었지요. 매우 겸비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고 화평을 깨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 모습이 육으로는 우유부단해 보일 수 있으나 영으로 변화된다면 큰 선지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됐지요. 하나님께서는 그 유약함을 변화시키기 위해 연단을 허락하십니다. 엘리야가 활동했던 그 당시 시대적
인생을 살다 보면 실패와 좌절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슬럼프에 빠진 운동선수, 실직한 가장, 사업에 실패한 사업가, 시험에 낙방한 수험생 등 다양한 연령층에서 이러한 사례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역경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사업에 실패하였지만 재기하여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분이 있어 그 비결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교회의 지교회에 다니는 한 장로님은 1996년 당시 서울에서 사업 실패 후 홀로 충북 진천에 내려가 동생의 사업을 도왔습니다. 이듬해 1월에는 가족도 내려와 함께 살게 됐지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가장의 사업 실패로 근심 속에 살던 아내의 모습이 사뭇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웃의 전도로 ‘이재록 목사 2주 연속 특별 부흥성회’에 참석해 은혜를 받고 마음의 평안을 찾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청주만민교회에 출석하며 은혜를 받은 아내는 본교회(서울 만민중앙교회)의 생명의 말씀과 권능의 역사에 대해 그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는 특히 ‘십자가의 도’ 설교테이프를 들은 뒤 큰 은혜를 받아 곧바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동시 화상(畵像) 예배를 통해 설교를 들으며 하나님의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