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사랑하는 자녀가 학교에서 큰 문제를 일으켜 퇴학을 맞게 될 위기에 처했다면 부모는 학교에 찾아가 무릎을 꿇고 “제발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사정할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당신 아들은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니 당장 데리고 나가세요!” 하며 모욕을 준다면 어떨까요? 이때 겸허한 마음으로 끝까지 선처를 구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를 이렇게까지 무시해?’ 하며 자존심 상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머무셨을 때입니다(마 15:21). 한 여인이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하며 자신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간청했지요. 시대적 상황을 봤을 때 가나안 족속의 후손 수로보니게 사람이 유대인인 예수님 앞에 나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멸시하며 상종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더구나 남자인 예수님 앞에 여인이 나와 무엇을 구한다는 것은 절박한 심정이 아니고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런데 가나안 여인이 귀신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는데도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도 하시지 않고 가만히 계셨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여자가 뒤에서 소리 지르니 보내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지요.
그제야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고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즉 이방인이 아닌 이스라엘 사람만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이지요. 여인이 예수님께 절을 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또다시 간청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며 이방 여인을 개에 비유하셨습니다. 이는 여인의 믿음을 테스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자신을 개 취급하는 말에 자존심이 상해 돌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며 자신을 철저히 낮추지요. 여인은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했기에 그 말씀에 일말의 서운함이 들거나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마음 중심이 선하고 겸비했기에 긍정의 말을 할 수 있었지요.
예수님께서는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여인의 딸이 그 시로 치료를 받았습니다. 우리 마음이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다면 상대가 어떤 말을 해도 감정이 나지 않고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황을 역전시켜 감동을 줄 수 있지요.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잘못한 일을 지적해도 금방 서운해하는가 하면, 지적한 사항에 대해 변명하기도 합니다. 핑계대고 변명하는 사람들은 발전이 없고 제자리걸음하기 마련이지요. 개중에는 지적을 감사하게 받으며 부족한 모습을 고치기 위해 힘쓰는데 이런 사람은 신속히 변화됩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더 변화되라고 말씀하시는구나.’ 하고 받으니 신속히 믿음의 성장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이 어떤 상황에서도 감동적인 선의 말을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을 이루어 축복의 길로 나가야겠습니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태복음 15장 25절~28절)
글: 만민중앙교회 당회장 이재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