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조아라 기자] 불합리한 근로문화가 논란이 되고 있다. 일부 업계에서 장시간·고강도 근로가 당연시되면서 이로 인한 사고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근로시간이 가장 길지만 노동생산성은 하위권인 것으로 나타나 근로문화 개선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한 업체의 비상식적인 근무 관행이 도마 위에 올랐다. 지난달 25일 장현국 위메이드 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자회사 위메이드아이오의 ‘크런치 모드’ 도입 논란에 대해 사과했다. 크런치 모드는 게임 출시를 앞두고 개발팀이 야근과 특근 등 강도 높은 근무체제에 돌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 근무의 강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점이다. 앞서 위메이드아이오가 발표했던 약 8개월간의 크런치 모드 계획에는 △강제 야근 △휴일 없는 근무 △게임 출시 지연 시 수당 반납 △저녁 식사시간 30분 등의 내용이 담겼다.
장 대표는 논란이 확산되자 위메이드아이오의 ‘이카루스 모바일’ 개발팀에 이메일을 보내 “크런치 모드는 전면 백지화됐다. 누군가 강제할 경우 내게 말해주면 필요한 모든 조치를 강구해 정정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강제로 크런치 모드를 하는 일, 휴일 근무수당을 반납하는 일, 정해진 저녁 시간을 제한하는 일은 앞으로 없을 것”이라며 “동기부여를 위해 도입됐던 휴일 근무수당, 인센티브는 약속한 그대로 지킬 것이다. 프로젝트를 성공시켜서 여러분들이 성과에 따른 보상을 받아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장시간·고강도 근무 당연시
비상식적인 근무체제는 위메이드아이오만의 문제가 아니다. 게임업계의 장시간 노동은 이미 소문이 자자하다. 게임 업체들이 몰려있는 지역에는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등대’, ‘오징어잡이 배’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 따르면 게임업계 개발자들의 월 평균 근로시간은 205시간으로,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일반 근로자의 근로시간(187시간)을 훌쩍 뛰어넘는다. 한 게임업계 관계자는 게임업계의 근무 관행에 대해 “일주일에 2번 출근한다. 아침에 회사에 가서 1박2일, 2박3일을 일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장시간·고강도 근무와 함께 경직된 조직문화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례도 있었다. tvN 드라마 ‘혼술남녀’ 제작에 참여했던 이한빛 PD는 지난해 10월 드라마 종영 이틀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달 18일 ‘이한빛 PD 사망사건 대책위원회’는 기자회견을 열고 “사건은 장시간·고강도 노동과 군대식 조직문화가 신입사원의 꿈과 열정, 미래에 대한 희망을 파괴하고 생의 지속 의지를 박탈한 살인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이 PD의 동생은 전날 SNS를 통해 “(tvN을 운영하고 있는) CJ E&M은 자체 진상조사에서 형의 근태불량에 사고 원인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형이 생전에 남긴 녹음파일과 모바일 메신저 대화 내용에는 (이 PD에 대한 제작진의) 욕과 비난이 가득했다”고 밝혔다. 같은 달 24일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이 PD의 어머니는 “아들이 (혼술남녀) 촬영에 들어간 후 새벽에 들어와 2시간 뒤에 다시 나가는 걸 보면서 ‘이게 아니다’ 싶었다”며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 PD가 된 아들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근무 강도가 높지 않더라도 지나친 장시간 근무가 근로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지난달 23일 법원은 격일 24시간 근무를 하고 휴무일에 업무 관련 교육을 받은 후 급성 심근경색증으로 사망한 60대 경비원 A씨에 대해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 사망 무렵 A씨는 근무일 다음 날 휴무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했으며, 9일 동안 한 차례 휴무일을 보장받았을 뿐, 나머지 휴무일에는 퇴근 후 7시간의 경비원 신임 교육을 받아야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A씨의 연령 및 건강 상태 등을 비춰볼 때 야간 순찰 등 업무가 없고 경비실 내 침대가 비치돼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A씨에게는 격일제 근무 자체가 다른 사람에 비해 과중한 업무였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 “격일제 근무자에게 휴무일을 이용해 교육을 받도록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하며 A씨의 업무와 사망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봤다.
근로시간 OECD 2위… 생산성은 하위권
우리나라의 연 평균 근로시간은 2016년 기준 OECD 34개국 가운데 2위로 최고 수준이다. OECD 평균인 1766시간보다 347시간 많은 2113시간을 기록했다. 3월26일 한국노동연구원(이하 노동연)이 발표한 결과에서는 우리나라 근로자의 총 근로시간이 월 평균 192시간으로 조사됐다. 이는 연간 2303시간에 이르는 것으로, OECD 분석과는 190시간 차이가 난다.
법정근로시간을 넘겨 일을 시키는 사업체도 10곳 중 6곳에 달한다. 노동연이 2016년 상시근로자 5인 이상 비농림어업사업체 1570개소를 대상으로 근로시간 운용실태를 조사한 결과, 주당 40시간 이하가 차지하는 비중은 42%에 불과해 상당수 업체에서 초과근로를 실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근로기준법상 최장 근로시간인 주당 52시간을 초과하는 업체의 비중도 10%에 가까웠다. 또, 소진하지 못한 연차휴가에 대해 수당을 지급하는 업체는 58%뿐이었다.
근로시간은 길지만 노동생산성은 OECD 회원국 중 25위로 하위권이다. OECD는 지난 3월17일 ‘구조개혁 평가보고서’에서 “한국은 짧은 기간에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끌어올렸지만 근로시간은 회원국 중 가장 길고 생산성은 선진국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11월 정부가 발표한 기업과 근로자가 체감하는 근로관행에 관한 실태조사(기업 500개 및 노동자 1000명 대상) 결과에 따르면 기업(52.8%)과 근로자(53.5%) 모두 근무혁신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으로 ‘불필요한 야근 줄이기(정시퇴근)’를 꼽았다. 그럼에도 가장 잘 실천되는 항목(56.3%)과 실천되지 않는 항목(40.5%) 모두 ‘정시퇴근’으로 조사돼, 중요성은 인식하면서도 정작 현실에서는 제대로 실천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근로시간이 끝나고 30분 이후 2시간 이내에 퇴근하면 야근으로 인식되지 않는다고 응답한 근로자도 50.2%에 달해 장시간 근무가 관습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시사했다. 근로자들은 업무 집중도가 낮은 이유를 △피로누적 29.9% △잦은 회의·보고 23.7% △야근관행 21.6% 등으로 지적했다. 자신의 업무 집중도가 높다고 평가한 응답은 야근을 하는 근로자(48.0%)보다 야근을 하지 않는 근로자(54.2%)가 더 높았다.
이 밖에 초과근로 단축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요인으로 근로자는 △직장 내 문화개선(23.4%)을, 기업 인사담당자는 △CEO의 관심(33.3%) △업무량의 조정(27.9%)이라고 답했다. 또한, 상급자의 일·가정 양립에 대한 인식(30.4%)과 노력(29.0%)이 저조하며, 일·가정 양립 제도 활용으로 사내눈치(41.11%) 및 직장 내 괴롭힘이 발생(20.0%)한다고 답해 근로문화 개선이 시급한 것으로 조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