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이종근 기자]정부가 '빅딜 불가론'을 외치고 있다. 지난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위기 당시 적극적으로 기업 구조조정에 관여했던 모습과는 딴판이다. 정부가 나서 빅딜을 추진했을 경우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보다는 추후 발생할 부작용이 더 크다는 판단에서다. 시장 환경도 IMF 시절과는 차이가 크다. 글로벌 경기 침체, 공급과잉 등의 요인으로 인해 국내 기간산업이 총체적 위기를 맞았다.
개별 업체가 아닌 업계 생태계를 재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현 체제로는 현상 유지 조차 어려운 조선과 해운산업이 구조조정의 핵심이다. 시장에서는 대형사간 여러가지 합병 시나리오가 거론되고 있다.
조선업에서는 대우조선해양과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등 '빅3' 대형 조선사간 빅딜, 해운업에서는 두 국적선사인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의 합병 시나리오가 흘러 나오고 있다. 정부의 입장은 확고하다. 정부가 주도하는 빅딜은 없다는 것이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지난달 29일 언론사 경제부장단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소유주가 있는 대형사를 상대로 기업간 자율이 아닌 정부 주도로 합병을 강제하거나 사업부문간 통폐합 등 소위 빅딜을 추진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한 방법도 아니다”고 말했다.
정부의 빅딜 불가론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개별 기업간 빅딜에 정부가 개입할 경우 자칫 통상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정부는 IMF 시절 현대전자와 대우전자간 빅딜을 이끌어지만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하에서 상계관세를 무는 바람에 반도체 업체 전체를 어려움에 빠뜨린 적이 있다.
상계관세란 수출국이 특정 산업에 장려금이나 보조금을 지급해 상품의 가격경쟁력을 높일 경우, 수입국은 그 수입상품에 대해 보조금액에 해당하는 만큼의 관세를 부과하는 것을 말한다.
임 위원장은 “일본과 유럽연합(EU)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한국 정부의 대우조선해양 지원과 관련해 문제제기를 했다”며 “정부가 주도해 기업 구조조정을 한다면 자칫 심각한 통상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감을 나타냈다. 정부 주도 빅딜이 시장에서 반드시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보장도 없다.
임 위원장은 “1998년에 추진했던 빅딜은 일부 성공한 부분도 있으나 중요 업종인 반도체, 자동차, 전자 등에서는 실패했다”며 “반도체는 현대전자로 통합됐으나 이후 경영이 악화되면서 워크아웃에 들어갔고, 삼성차와 대우전자간의 사업교환도 협상 실패로 삼성차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무산됐다”고 설명했다.
과거완 달리 채권단 구성도 복잡해졌다. IMF 때는 정부가 은행을 통해 전체 채권단 통제가 가능했지만 이제는 해외채권, 제2금융권 채권 등의 비중이 높아 불가능하다.
임 위원장은 “현재 기업에 대한 여신구조는 과거와 달리 은행 중심이 아니라 제2금융권과 해외 금융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며 “정부의 인위적 기업 빅딜은 곤란하다”고 밝혔다.
정부는 ‘시장 자율적 구조조정’을 원칙으로 내세우고 있다. 특히 미국 GM과 크라이슬러의 정상화 과정을 자율적 구조조정의 좋은 예로 꼽고 있다.
2008년 말 구제금융을 요청했던 GM과 크라이슬러는 이후 강도 높은 자구계획 이행과 자동차 품질 개선 등을 통해 단기간 내 미국 내 수요를 끌어올렸다.
이 과정에서 미국 정부는 회사 정상화를 위해 경영 개입을 최소화하고, 정치적인 영향력을 배제했다. 대주주임에도 GM 본사 이전 제한, 임원 보수에 상한 설정 등 일부 문제에만 관여했다.
정부는 ▲민간주도 ▲강력한 자구노력 ▲채권단과 노조간 협력 관계 등을 GM과 크라이슬러의 구조조정 3대 성공 요인으로 보고 있다.
임 위원장은 “성공적인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원칙적으로 정부 개입은 최소화해야 한다”며“시장 원리에 따라 비효율적인 부분은 개선하고 경쟁력이 없는 사업은 정리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업계에서 자율적으로 사업재편, 인수합병(M&A) 등을 추진할 경우에는 정부가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이라며 “철강, 석유화학, 조선업 등에 대해서는 업계의 자율적 컨설팅이 진행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