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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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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봉화산...
노무현 전 대통령이 몸을 던진 봉화산 부엉바위. 봉화산은 알고 있었을까? 노 전 대통령은 지난 23일 이른 아침 어린 시절 자신을 키워준 곳으로 되돌아갔다. 세상의 등불을 꿈꾼 소년 노무현과 함께 했던 봉화산은 어느새 훌쩍 자란 ‘대통령 노무현’을 영원히 품게 됐다.
63세를 일기로 타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숨길과 희비가 담긴 한편의 ‘서사시’였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그만의 ‘원칙’과 지역주의에 항거했다가 번번이 좌절한 ‘소신’을 무기로 최고 권좌에 올랐지만 퇴임 후 짧았던 삶은 불행했던 전직 대통령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이 초라했다.
정치개혁의 선봉에 섰고 깨끗한 정치, 반칙없는 사회를 실현하겠다고 장담했다. 인권변호사로 부산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대통령에 당선돼 재임할 때까지 그는 주류가 아닌 비주류에서 주류를 비웃는 한국 정치사의 이단아였다.
호남에 지역기반을 둔 민주당의 영남 출신 대선후보라는 성립될 것 같지 않은 그림도 그렇지만 재임 당시 국회 탄핵소추안이 의결되고 야당에 대연정을 제안한 헌정사상 첫 대통령이라는 점을 돌이켜 볼 때 그리 놀라운 것도 아니다.
“노무현도 대통령이 됐는데”라는 말은 농담처럼 흘려졌지만 서민들에게는 희망의 씨앗이 됐고 서민출신 대통령의 모습에서 희열을 느끼게 했다. 바보 노무현으로 불렸고, 노짱으로 통했다. “이쯤되면 막가자는 거지요”라는 유행어를 남겼고 “노무현이 하니까 반대하는 것 아니냐”는 어록도 남겼다.
‘부림사건’이 인생의 전환점
그의 인생사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있어 베스트셀러가 됐다. 노 전 대통령은 1946년 9월 1일 경남 진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노판석씨(1976년 작고)와 이순례씨(1998년 작고)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노 전 대통령이 태어난 봉하마을은 “까마귀가 와도 먹을 것이 없다”고 하던 가난한 곳이었다. 중학교 1년 휴학, 야간 경비로 일하며 공부하던 부산상고 재학 등이 가난했던 그의 어린 시절을 대변한다.
“모두가 가난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노 전 대통령의 꿈은 1975년 제17회 사법고시에 합격하면서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7개월 만에 판사직을 그만둔 노 전 대통령은 ‘변호사 노무현’으로 가난 탈출이라는 목표를 이뤘다.
1981년 그의 인생을 또 한 번 바꿔 놓는 부림사건을 맡기 전까지 그는 돈 잘 버는 변호사였다. 부산 향토기업들의 상속세 반환 소송 등을 도맡다시피 했고 100억 원 이상의 거액 소송을 맡기도 했다. 부산상고 동창회 회장을 지냈으며 요트 타기도 즐겼다.
‘부림사건’은 노 전 대통령의 인생에 중요한 계기가 됐다. 부산의 운동권 학생 30여명이 일명 ‘좌경학습’을 하다 검거된 이 사건의 변론을 맡게 된 그는 시국(時局)의 급박함을 온몸으로 체득하게 된다. 노 전 대통령은 “부림사건 변론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됐다”고 말했다.
이후 학생 운동권과 접촉하며 재야인사와 교류를 시작한 노 전 대통령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때 제3자 개입 혐의 등으로 구속돼 변호사 업무가 정지됐다. ‘인권변호사 노무현’으로서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된 것도 이때다.
돈키호테 같은 용기를 눈여겨본 김영삼 (金泳三)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 측의 권유로 88년 13대 총선에 출마, 5공 실세였던 허삼수 후보를 꺾고 제도권 정치에 입문했다. 초선의원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신데렐라처럼 부상, 한국정치의 새 희망으로 떠오르게 한 무대는 88년 5공 청문회였다.
‘승부수를 던지는 ‘정치실험’의 연속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 힘있는 증인들을 정연한 논리와 송곳 질문으로 몰아세워 TV를 시청하던 국민을 열광시키면서 ‘청문회 스타’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정치인으로서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90년 1월 3당 합당 때 김영삼 총재의 손을 뿌리치고 합류를 거부한 뒤 지역주의의 벽에 막혀 낙선을 거듭하는 등 비주류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1998년 보궐선거 때 서울 종로에서 금배지를 달았지만 2000년 총선에서는 부산에서 당시 허태열 한나라당 후보에 패배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후에도 재임기간 내내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노력했고 지방분권, 지역균형발전 정책 등도 당시 구의 구상에서부터 나온 것임에 틀림없다.
김대중 정부 시절 해양수산부 장관을 거쳐 지역주의에 염증을 느끼던 유권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대선에 도전했으며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중심으로 하는 단단한 지지세력은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노풍(盧風)’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됐다. 노풍의 진원지는 호남이었다. 민주당 대선후보 광주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하는 이변을 일으켰고 이는 ‘이인제 대세론’을 함몰시키면서 전라도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경상도 출신 후보로 나서는 발판으로 작용했다.
대선이 치러진 새벽 국민통합 21 정몽준 대표가 후보단일화를 철회했지만 마지막 순간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정면돌파를 택했고, 정치 인생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던 그 특유의 승부수는 청와대 입성의 ‘기적’을 이뤄냈다.
그의 재임기간은 영욕의 시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2004년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야권이 여소야대 구도에서 열린우리당 지지발언 등 선거법 위반 혐의를 걸어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해 가결했다.
노 전 대통령은 그해 3월12일부터 헌법재판소가 탄핵안을 기각한 5월14일까지 63일 동안 대통령 직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모든 분야에서 언제나 ‘새로운 정치’를 추구했던 그의 끊임없는 시도는 때로는 극찬을 받기도 했고 또 때로는 민심이반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퇴임 전까지 노 전 대통령은 정치, 경제, 대북관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상대의 허(虛)를 찌르는 승부수를 던지는 ‘정치 실험’을 그칠 줄 몰랐다. 2005년 8월에는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했고, 2007년 4월 레임덕에 시달리자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을 제안했다. “왜 개헌하면 안된다는 것이죠”라는 질문은 유행어가 됐다.
“내가 걸림돌이 된다면 열린우리당을 탈당하겠다”며 나왔고 손학규 전 경기지사와는 보따리 장수 공방도 벌였다. 새벽 5시면 일어나 인터넷 서핑을 즐겼고 때문에 댓글대통령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국정브리핑에 댓글을 달며 공무원들에게 자주 찾을 것을 권해 야당으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그만큼 자유분방한 사고를 지녔다.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이룬 업적에 대해서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특히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선거자금을 둘러싼 정경유착의 고리를 없애려던 노력은 평가받을 만하다.
삼권분립을 가장 중시했고 국가정보원과 사법부 독립에 앞장섰다. 평검사들과의 대화를 했고 권력기관 기관장들의 임기는 철석같이 지켜줬다. 퇴임 후 고향으로 내려간 첫 대통령이 됐고 서거 전까지 그의 삶은 정치실험 자체였다.


‘눈물의 봉하마을’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 씨 “우리 장애인들에게는 아버지였다”

지난 5월 23일 아침 한 통의 날아든 비보에 국민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제16대 대통령인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올 수 없는 극단의 길을 한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는 주말을 지나 평일에도 많은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봉하마을 합동분향소에는 이해찬 전 총리와 한명숙 전 총리, 유시민 전 장관, 이종석 전 장관 등 민주당 옛 당직자들이 상주를 맡아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수십만 추모행렬 이어져
조문객들 사이로 하염없이 울고 있는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로 잘 알려진 이희아 씨는 “말로 표현이 안돼요. 너무너무 분하고 마음이 아프고 억울하고 그래요”라며 답답한 심정을 얘기했다. 이희아 씨는 장애인에게 특별한 애정을 보였던 고(故) 노 전 대통령과 인연이 깊다. 권양숙 여사 또한 2003년 12월 장애어린이를 청와대에 초청 격려하기도 해 각별한 사이였다.
이씨는 “진짜 우리 장애인들에게는 아버지이시고 또 가난하고 정말 소외된 분들을 위해서… 정말 착하시고 그러셨는데… 너무나 불쌍하잖아요”라며 “일본에서 돌아와 안되겠다싶어 바로 봉하마을을 찾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일부 신문과 방송이 노 대통령에 대한 제대로 된 진실과 정확한 내용이 아닌 비판을 위한 내용만 보도해 지금에 이르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전국에서 몰려든 수만명의 조문객들로 봉하마을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서거 당일인 23일에만 1만여명이 다녀갔고, 일요일인 24일에는 13만여 명이, 25일 저녁 6시 현재 40만명이 조문한 것으로 집계됐다.
봉하마을 외에 전국에 설치된 분향소에도 밤새도록 추모의 물결이 이어졌다. 행정안전부는 전국 지자체에서 81곳의 분향소를 설치한 것으로 파악했다. 지역별로는 경기도가 13곳으로 가장 많고, 충북이 11곳, 경북 10곳, 서울 및 충남 각 8곳, 전북 7곳, 전남 및 강원 각 5곳, 경남 4곳, 부산·대전·울산 각 2곳, 대구·인천·광주·제주 각 1곳으로 조사됐다.
정당과 종교단체, 시민단체 등이 설치한 민간 분향소도 25일 오후 6시 현재 전국에서 197곳으로 파악됐다. 서울역에 마련된 분향소에는 자정이 넘은 시각까지도 추모물결은 계속 이어졌고, 부산에서도 추모객들의 열기는 끊이지 않고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성지인 광주 옛 전남도청 건물에도 밤 늦게까지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해가 지면서 추모객들은 한 손에는 국화꽃을 한 손에는 촛불을 들고 고(故) 노 전 대통령을 추모했다. 처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덕수궁 앞 분향소에는 매일 300여 명의 추모객이 밤을 지새우면서 고(故) 노 전 대통령의 영정을 지켰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수백 미터까지 늘어섰던 추모행렬은 자정을 넘어서까지도 끊어지질 않았다. 긴 행렬에 의해 3시간이 넘어서야 분향을 할 수 있었지만, 국화꽃 한송이를 든 추모객들은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했다.
넋 빠진 경찰
그러나 경찰은 불법시위 우려해 서울광장과 청계광장 등 서울 도심권을 경찰버스로 계속 봉쇄하고 있고, 덕수궁 앞에 차려진 분향소를 경찰차벽으로 완전히 둘러싸 분향소 공간을 최대한 좁게 만들고 있다.
이 경찰차벽으로 인해 분향을 기다리는 시민들은 덕수궁 돌담길이외에 공기가 매우 탁한 지하철역 통로에서 몇 시간씩 기다려야 하는 불편을 겪고 있다. 경찰은 “갑자기 사람이 많이 모이면 반정부 집회 등 불상사가 우려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납득될만한 변명은 아니라고 시민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지난해 촛불집회로 넋이 빠져버린 경찰은 추모객들이 모여 대규모 집회로 이어질 것을 염려하며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애절하게 보인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과 달리 경찰이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은 지난 해 촛불집회 때 노사모도 대거 참여했다는 생각과 함께 추모를 이용해 반정부 시위를 벌일 것이라는 판단이다. 특히, 주상용 서울경찰청장은 “분향소를 버스가 둘러싸고 있으니까 분향하는 데 오히려 아늑하다는 사람도 있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전국 500여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민생민주국민회의가 덕수궁 앞 분향소에서 경찰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명백한 추모방해”라며,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결례와 국민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욕”이라고 경찰을 질책하면서 덕수궁 주변 경찰 철수와 서울광장을 개방을 요구했지만 경찰은 요지부동이다. 경찰의 “평화적인 추모행렬에 유연하게 대처하겠다”는 말과는 달리 추모객들을 잠재적 시위대로 바라보는 눈은 시민들의 질타를 면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봉하마을 분향소의 자원봉사자들과 덕수궁 앞 분향소는 누가 해 달라가 아닌 자발적 행동으로 생전에 노 전 대통령의 '자발적 움직임'과 같다. 노 전 대통령의 행동은 우리 역사뿐만 아니라 국민정서에 한 획을 그어 국민들 가슴에 남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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