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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도 시련도 돌고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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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대한민국은 88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그 어느 때보다도 번영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샴페인 거품은 빨리 꺼졌다. IMF 쓰나미가 몰아치고 서민들의 삶은 더욱 힘겨워졌다. 1990년대 당당한 신세대가 등장했지만, 2000년대에는 88만원 세대가 울고 있다. 주윤발과 ‘뉴키즈 온 더 블록’에 열광하던 청소년들은 서태지에 몰입하고 한국영화에 몰려들었다. 아시아에 한류 광풍이 불었다. 짧은 20년의 역사에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대목은 많았다.
올림픽 거품, IMF 폭풍… 그리고 월드컵
1980년대 후반 올림픽 이후 당시 고성장으로 과소비라는 단어가 사회 전반을 지배했다. 상류층의 환락을 상징하는 오렌지족이라는 단어도 유행했다. 당시 올림픽을 준비하며 대도시는 새로운 인프라를 확충했다. 하지만 그 개발의 과정에서 판자촌은 정부 선전용 밝은 그림들로 대충 가려졌다. 이것이 1980년대 한국의 현실이었다. 곪아터진 상처를 대충 못 본 채 가리면서 ‘코리안 드림’의 환상만 계속 키웠던 것이다.
환상은 머지않아 깨졌다. 1997년 IMF라는 시련이 찾아왔다. IMF는 많은 것을 바꾸었다. 양극화는 더욱 심화됐고 몰락한 중산층들이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쓰러져갔다. 노숙자가 넘쳐났고 실업률이 증가했다. 그때 실업자 구직을 위해 법안 통과된 것이 바로 지금까지 문제가 되고 있는 비정규직 채용이다. 경제적 문제로 인해 그 이전까지 주춤했던 여성의 사회 진출도 늘어나며 여성의 지위도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하지만 대부분 비정규직 채용에 머무는 것이 현실이었다. 물질만능주의, 복고주의 등 국민 의식을 지배하는 키워드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IMF는 결국 약자를 더욱 약자로, 강자를 더욱 강자로 만드는 터닝포인트였다.
IMF를 기점으로 금 모으기 운동 등을 통한 애국심은 높아졌지만 반대로 이민 열풍 또한 거셌다. 한국에 대한 혐오와 자괴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이 같은 현상을 뒤엎는 반전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2002 월드컵이었다. 스포츠 이벤트가 적절한 타이밍에 정권이나 국민의 숨통을 터준 셈이었다.
신세대에서 88만원 세대로
1990년대는 경제적 풍요 속에서 자라난 새로운 세대를 지칭하는 신세대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세대론이 처음 등장했다. 일본의 신인류와 미국의 X세대와 맥락을 같이 한 한국의 신세대는 개성을 중요시하는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10대와 20대를 가리킨 신조어였다. 당시 신세대는 이어폰을 꽂고 다니며 서태지를 좋아하는 문화적 특성을 지녔다. 조직과 권위를 부정하는 세대로 기성세대와 달리 돈보다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고, 권력에 복종하기 보다는 도전하는 성향으로 설명됐다. 신세대의 실제에 대한 논란은 있었지만 광고 마케팅 등에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신세대 이미지를 재생산해나갔다.
하지만 IMF의 폭풍 속에서 정치적 권력 추구나 조직의 결성을 통한 이윤 추구가 거리가 먼 신세대는 선배 세대인 386 세대의 ‘힘’과 ‘권력’에서 밀려나가는 분위기가 됐다. 그들은 조직의 하위로 들어가 개성은 고사하고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어정쩡한 개인주의로 존재감이 사라져갔다. 사회반항적이라던 신세대에 대한 분석들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후배는 88만원 세대라는 비극적 이름을 달아야 했다. IMF 이후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이 극심해진 세상에 내던져진 20대 젊은이들은 비정규직 88만원으로 세상을 이겨나가야 하는 경제적 약자로 타고났다.
‘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 박사는 “88만원 세대는 우리나라 여러 세대 중 처음으로 승자독식 게임을 받아들인 세대다”고 말했다. 우 박사는 이 같은 문제를 “세대간 불균형이 경제를 비롯한 사회 전반에서 독점화가 진행되면서, 정치적 자기 보호 능력이 없는 지금의 20대에게 그 피해가 집중된 때문”이라고 파악했다. 승자독식 체제는 대학의 풍경마저도 바꿔버렸다. 그래서 지금의 20대는 선배 세대 그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고 더 높은 토익점수를 들고서도 실업자로 전락하는 우울한 세대가 됐다. 그래서 대학은 영어 공부와 재테크 강좌에 몰두한다. “요즘 애들은 낭만이 없다” “젊은이들은 나약하다” “사회문제에 관심도 없고 의식도 없다”는 선배 세대의 비아냥은 그야말로 배부른 탄식이 된 것이다.
기술의 진보가 세상을 바꾸다
1980년대 이후 생활상을 가장 많이 변화시킨 것 중 하나가 기술의 진보다. 삐삐의 등장은 통신문화에 충격적 변화를 몰고 왔다. 1997년에는 인구 세 명당 한 명꼴로 삐삐를 찼다. 삐삐의 대중화로 공중전화의 길은 언제나 길게 늘어서 있게 됐다. 이때 공중전화에서 기다리다 시비가 붙어 싸우는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기도 했다. ‘8282(빨리빨리)’, ‘1004(천사)’ 등의 숫자언어가 유행하기도 했다.
당시 젊은 세대에게 삐삐는 사적인 관계를 강화시켜주는 획기적인 기기였다. 이전에는 가족들이 공유하는 전화 외의 통신 수단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곧 휴대폰의 시대가 도래 했다. 1990년대 초 ‘벽돌’로 불리던 커다란 휴대폰은 부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1995년 한국이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방식의 이동통신 기술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면서 핸드폰의 대중화가 시작됐다. 1997년을 정점으로 핸드폰의 대중화가 이루어지면서 공중전화의 긴 줄도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기술의 진보가 가장 혁명적 영향을 끼친 것은 인터넷이다. 1990년대 인터넷의 발전과 함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큰 변화가 이루어졌다. 정보의 민주주의가 실현됐고, ‘아이러브스쿨’ ‘메신저’ ‘동호회’ 등을 통한 인간관계의 변화도 일어났다. 디지털 카메라와 캠코더로 찍은 동영상들은 블로그 등 개인미디어를 통해 세계 각지의 영상 언어로 서로 소통되는 시대가 됐다. 국경과 계층과 장르의 구분이 없는 인터넷적 마인드도 빠르게 전파됐다.
어제는 해외스타에 열광, 오늘은 한류 열풍
통신수단의 발전 이상으로 눈부신 속도로 성장한 것은 한국의 대중문화다. 88올림픽 이후 개방의 물결을 타고 대중문화의 토대가 다져지기 시작한다. 1991년 SBS가 개국하면서 방송사 시청률 경쟁이 시작됐다. 오락프로그램과 드라마 전쟁이 본격화된 계기가 됐다. 일본문화 개방과 미국직배 영화의 상륙으로 몰락할거라는 우려와 달리 한국 영화도 르네상스를 맞이한다.
1991년 우리 대중문화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사건이 하나 벌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뉴키즈 온 더 블록’ 내한공연 압사 사건이다. 미국의 아이돌 팝 스타 ‘뉴키즈 온 더 블록’이 한국에 방문하자 흥분한 10대들이 한꺼번에 몰려 콘서트장에서 여고생 한 명이 압사당한 것이다.
지난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는 외국 스타에 열광한 시대였다. 청소년들은 헐리우드 스타와 미국 팝에 빠졌고 홍콩영화에 중독 됐다. 하지만 ‘뉴키즈 온 더 블록’ 사건 다음해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당대 가요는 물론 문화 지형 자체를 혁명적으로 바꿨다.
한국 영화도 ‘방화’라는 오명을 벗고 세계 시장에서 승부하는 수준으로 급상승했다. 1998년작 ‘쉬리’는 한국영화 흥행돌풍의 시초가 됐다. 한국문화는 마치 한국의 근대화가 그랬듯 기하급수적으로 몸집을 키워갔다. 가요를 듣거나 ‘방화’를 보면 수준이 낮은 사람처럼 취급되던 시대가 어제였는데 눈을 떠보니 한류가 아시아를 휩쓴 시대가 돼 있었다. 문화란 돌고 도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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