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조아라 기자] 미국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공식 탈퇴하면서 가장 주목받는 무역협정이던 TPP의 발효가 사실상 어렵게 됐다. 이에 따라 TPP의 급부상으로 주춤했던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TPP 회원국이자 RCEP 참여국인 일본, 호주, 뉴질랜드 등 7개국의 입장 변화가 예상됨에 따라 RCEP 협상이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TPP 타결 이후 협상 동력이 다소 상실한 것으로 알려졌던 RCEP가 TPP 발효가 불투명해지면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주요 Mega-FTA로 떠오르고 있다. RCEP는 아세안 10개국과 중국 일본 인도 한국 호주 뉴질랜드 6개 국가(이하 아세안+6)가 참여하는 다자간 무역협정이다. TPP와 함께 미·중, 중·일 간 동아시아 경제통합 주도권 확보 경쟁과 연계돼 진행돼 왔다.
지난달 7일 코트라의 ‘트럼프의 TPP 탈퇴 서명에 대한 TPP 가입국 반응조사’에 따르면 미국이 TPP 탈퇴를 번복하지 않는 이상 TPP 무산은 기정사실이 될 전망이다. 호주, 뉴질랜드가 “미국을 중국, 인도네시아 등으로 대체해 기존 TPP를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으나 대부분의 가입국들이 동의하지 않고 있으며, 일본, 캐나다, 멕시코 등은 “미국 없는 TPP는 발효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코트라는 “TPP 전체 GDP의 60%를 넘어서는 미국의 탈퇴로 TPP는 생명력을 잃었다”고 내다봤다.
반면 RCEP 협상은 참여국들이 올해 안 협상타결을 목표로 조속한 합의를 위해 노력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참여국들이 타결시한을 공식적으로 언급하지는 않고 있으나 참여국 다수가 2017년 타결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RCEP 협상에 참여하고 있는 TPP 회원국 7개국(일본 호주 뉴질랜드 싱가포르 브루나이 말레이시아 베트남)도 미국의 TPP 탈퇴 이후 적극적으로 협상에 참여하는 등 태도 변화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인구 48% 거대 경제권 형성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의 추진 현황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RCEP가 체결될 경우 세계 인구의 약 48%, GDP의 약 31%를 차지하는 거대 경제권이 형성된다. RCEP 참여국과 우리나라의 교역 규모는 우리나라 총 교역의 51.7%에 달하며, 수출에서는 55.8%, 수입 46.8%를 차지한다.
라미령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아시아태평양본부 동남아대양주팀 부연구위원은 “역내 다수의 기체결 FTA가 존재해 RCEP로 인한 무역창출 효과는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면서도 “그러나 기존 FTA의 개선 및 규범의 조화를 통한 역내 생산네트워크의 효율화를 기대할 수 있다. 특히 가치사슬이 여러 협상국에 걸쳐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원산지 규정 조화 등으로 인한 역내 거래비용 절감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국제 경제 주도권 노리는 중국
TPP서 RCEP로 눈 돌리는 일본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중국은 RCEP를 통해 무역과 투자 자유화의 이익을 누리고, 동아시아 지역 경제통합의 주도권을 확보해 이를 새로운 글로벌 통상질서 수립에 이용하고자 한다. 그러나 라 부연구위원은 “중국이 RCEP 타결을 통한 역내 생산네트워크 강화, 안정적 수출시장 확보 등 자국의 이익 증대를 기대하고 있으나, 중국의 리더십이 RCEP 협상과정에서 발휘되지 않고 있다”며 “RCEP가 아세안에 의해 제안됐고 그 원안이 일본이 제안한 아세안+6의 형태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중국이 RCEP 협상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일본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을 견제하고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TPP 타결에 집중해왔다. 올해 1월 TPP 비준을 완료했으며, TPP 발효를 위해 지속적으로 미국을 설득하는 등 여타 가능성을 타진해 왔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 1월24일 국회에서 “TPP 발효를 위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지속적으로 이해를 구하는 한편, RCEP 및 유럽연합(EU)과의 경제연대협정(EPA) 체결도 목표로 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TPP 발효가 어려워짐에 따라 RCEP 협상에 소극적이었던 일본의 입장에도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아세안 10개국은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아세안 내부적으로 합의과정을 거친 뒤 아세안의 FTA 체결국과 협상을 벌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다만 아세안 내부적으로 합의가 지연됨에 따라 RCEP 전체 협상이 지연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인도네시아의 경우 2014년 조코위 정부 출범 이후 국내 경제개혁에 집중하면서 RCEP에 대한 관심이 낮은 상태다. 최근 조코위 정부가 부분적으로 외국인투자 규제를 완화하고 있으나, 기존의 보호주의 기조가 이어지면서 비관세장벽이 강화되고 있다.
보호무역주의 심화… 美 대체시장 필요성 대두
라 부연구위원은 “RCEP의 조속한 타결을 통해 아시아·태평양 역내 보호무역주의 기조를 완화하고, 회원국 간 개발격차 감소 및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미국 내 보호무역주의 기조가 심화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으므로 우리나라는 이를 대체할 시장으로 중국, 인도, 아세안 등의 지역에 집중하고, RCEP 협상에 전략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더불어 “우리나라와 입장을 같이하는 국가들과 그룹화해 이해관계 분야를 대응해나가야 할 것”이라며 “우리나라는 RCEP가 포괄적이고 높은 수준의 자유무역협정이 될 수 있도록 협상을 주도해야 하며, 이를 통해 향후 아시아·태평양 자유무역지대(FTAAP) 등 아태지역의 신통상질서 구축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역내 중·일 간의 동아시아 경제통합 주도권 경쟁이 진행됨과 동시에 남중국해 영유권 갈등과 한·중 사드배치 갈등, 한·일 위안부 협상문제 등 참여국간에 여러 갈등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면밀한 대응방안이 요구된다”고 전했다.
우리 정부도 이와 비슷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지난달 14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주형환 장관은 RCEP 협상 의장인 필리핀 통상산업부 로페즈 장관과의 제1차 한-필리핀 경제협력공동위에서 RCEP 협상의 가속화를 위해 필리핀이 주도적 역할을 수행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러면서 주 장관은 “보호무역주의 확산과 미국의 TPP 탈퇴 선언 등 국제통상환경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RCEP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며 “RCEP 협상의 조속한 타결을 위해 상품·서비스·투자 등 핵심 분야 주요쟁점 해결과 후속 양허안·유보안 협상에 속도를 높여야 한다”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