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김수정 기자]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했던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미국 4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한국이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최순실 게이트로 사실상 국정이 마비된 상태인데다 예상 외로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뒤늦게 '트럼프 리스크'에 대비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됐다.
'트럼프가 온다'…한국 경제 초긴장
자국우선주의와 고립주의, 강력한 보호무역주의를 앞세운 트럼프 당선인의 등장은 수출 주도형 경제에 의존하는 한국에 적지 않은 타격을 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강도 높은 통상 경제 압력이 예고됐기 때문이다.
먹구름을 드리우는 요소는 곳곳에 널려있다. 트럼프는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을 "미국 내 일자리를 죽이는 거래(job killing deal)"라고 비판하며 재협상이 필요하다고 수차례 주장한 바 있다. 만약 한미 FTA 전면 재협상으로 양허정지가 이뤄질 경우 한국경제연구원이 추정한 우리나라의 5년간(2017~2021년) 총 수출손실은 269억달러, 일자리 손실은 24만개에 이른다.
한·미 FTA를 재협상하지 않더라도 부당염가판매(반덤핑), 상계관세, 긴급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 등 무역구제수단 등의 조치를 활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미·중 무역전쟁으로 한국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신세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미국 재무부가 환율보고서에서 한국을 관찰대상국으로 지정한 만큼 미국이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할 경우 우리도 엮여 들어갈 수 있다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트럼프는 취임 직후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고 모든 중국산 수입품에 징벌적 상계관세 45%를 부과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중국의 지적재산권 침해에도 강력하게 대응할 뜻을 밝혀왔다.
중국과 미국은 각각 한국의 1, 2위 수출국인만큼 이들 국가의 무역 둔화는 우리 수출시장에도 타격을 입할 전망이다. 미국의 자국우선주의는 세계 교역 성장세를 둔화시켜 수출 의존도가 큰 우리 경제에 충격을 줄 수도 있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미국이 중국에 규제를 가하며 같은 기준을 우리에게도 요구할 수 있다"며 "중국에서 생산하는 우리 기업들에게 차별을 주는 등 한국에 대한 직접 규제 뿐 아니라 중국 생산 경로도 막힐 수 있다"고 전망했다.
다만 트럼프가 집권 후에는 극단적인 정책을 다소 완화 조정할 것이라는 시각도 나온다. 박창균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미국 내에서도 무역자유화로 피해를 보는 계층이 있고 이익을 보는 계층이 있다"며 "지금은 피해보는 계층의 목소리가 나오지만 무역자유화로 돈 번 주체가 다국적 기업, 금융기관 등인 만큼 표는 적지만 표를 움직일 사회적 헤게모니를 지닌 사람들이라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트럼프가 백악관에 입성한 후 공약을 얼마만큼이나 이행하냐에 따라 트럼프노믹스가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도 달라질 수 있는 만큼, 향후 트럼프의 공식적 움직임에 주목하되 지나친 우려는 금물이라는 조언이다.
한편에서는 트럼프의 경기 부양이 성장과 인플레이션을 불러 올 것이라는 낙관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기대의 근거는 트럼프가 공언한 대규모 인프라 투자다. 트럼프가 1조달러 규모의 공공인프라 투자를 공언함에 따라 건설업·통신인프라·운송·건설기자재 분야의 수출 확대가 기대된다. 또 트럼프는 기후변화를 '사기(hoax)'라고 칭하며 친환경 에너지 정책을 반대하고 있다. 전통에너지 분야에 대한 규제 완화가 기대되는 부분이다.
방위비 분담금 인상, 곧 현실 되나
트럼프의 자국 우선주의와 관련해 자유무역협정만큼 우려되는 것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 문제다. 트럼프는 군사부문에 있어 끊임없이 미국의 역할 축소 의사를 강조해왔다. 전 세계와의 동맹관계가 균형적이지 못하다는 인식 아래 현재의 관계를 유지하려면 방위비 분담금을 대폭 올려야 한다는 것이 트럼프의 주장이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은 지난 2014년 이뤄진 한미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 한국은 지난해 약 9200억원의 분담금을 지불했다. 물가상승률에 따라 연동돼 협정이 만료되는 2018년이면 1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 방위비 분담 협정을 새로 시작하게 되는데 어떤 식으로든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관측이다.
트럼프는 또 방위비 분담과 연계해 스스로의 방어력을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의 독자적 핵무장을 용인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인 바 있다. 이에 따라 점증하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전술핵 재배치' 등을 주장한 국내 강경파의 목소리가 커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한국의 외교안보통일 전략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할 때가 왔다"며 "한국사회가 트럼프 당선 이후 동북아 안보지형의 급격한 변화 가능성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방안을 본격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트럼프가 일관성 있는 안보정책을 보이지 않아왔다는 점에서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 하에서 다른 핵보유국의 반대와 중국의 반발이 심할 경우 없던 일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울러 주한미군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또한 일정 변화가 생길 수 있다. 현재 주한미군에 운용비용만 제공하면 되게끔 돼 있지만 향후 재협상 과정에서 사드 1개 포대 당 약 1조~2조원에 달하는 구매비용을 실제 청구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일각에서는 '최순실 게이트'로 정국이 혼란한 상황에서 발 빠른 대응만이 미국의 대(對) 한반도 정책의 혼선과 역내 정세 혼란에 대비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옥남 바른사회시민회의 정치실장은 "한미동맹과 북핵 문제에 대한 기조는 큰 변화가 없다고 하나 미국의 대외정책은 대통령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면서 "특히 대미 의존도가 높은 탓에 국내에 미칠 영향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다만 이 실장은 내치(內治)가 엉망인 것이 걱정스럽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정부는 시나리오별 대책만 마련한 채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분위기여서 향후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허약한 정부시스템이 제대로된 대책을 만들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