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홀. 파4. 358미터. 핸디캡3 그린까지 계속 오르막. 실제 보다 훨씬 멀게 느껴짐. 그린 쪽으로 갈수록 페어웨이의 폭이 좁아지므로 정교한 공격이 요구됨.***[신이 내린 스포츠, GOLF SEX. 첫 번 공격에 실패했을 경우 페널티를 받고 재차 시도할 수 있다.]바람이 불고 있다. 회오리바람이 뉘누리를 일으키며 나뭇잎을 비질하듯 쓸어 모아 하늘로 말아 올린다. 마치 바람이 생명체인양 짓궂은 장난을 한다. 치마 속으로 들어와 치마폭을 범선의 돛처럼 부풀린다. 바람은 개구쟁이 수컷인가. 세어볼 것도 없이 여지까지 꺽정씨가 친 타수는 1언더 파이다. 이번에는 어떤 명기가 펼쳐질까 다들 숨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고 있다."어어?"꺽정씨가 드디어 명기를 보여준다. 그의 공이 추사선생의 난초 잎처럼 포물선의 궤적을 그으며 날아간다. 가히 예술적이다. 보는 이들의 체증이 내려가게 시원한 오비를 한방 날려준 것이다."아기다리 고기다리 던 오비여..."야지랑스러운 넉살은 경희가 부렸지만 민호씨도 웃고 있다. 인간이라면 실수도 좀 있어줘야 인간답지 않은가.완전무결한 존재는 신(神)이다. 하느님도 벼락을 때릴 때 슬라이스를 내서 죄 없는 고목나무를 때린다고 골프육법
*** 15홀. 파3. 153미터. 핸디캡9. 굴뚝처럼 올라간 포대그린. 그린 오른 쪽은 깊은 벙커. 페어웨이 왼쪽은 벼가 누렇게 익은 논으로 이루어진 오비지역***[신이 내린 스포츠, Golf Sex. '넌 즈로'로 정복하기도 한다.]프로 골퍼 치치 로드리게스는 '골프는 옷을 벗지 않고 할 수 있는 운동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운동'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골프란 옷을 입고도 벗고도 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뜻이겠다. 누드촌에 있는 골프장에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알몸으로 골프를 한다고 한다. 외눈박이만 사는 곳에선 두눈박이가 장애자이듯이, 다 벗고 알몸으로 사는 곳에서는 옷을 걸친 사람이 우스꽝스럽게 비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누드촌이라도 그린에서는 쭈그려 앉아서 퍼팅라인을 읽을 것이다. 그럴 경우, 남자들은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겠지만, 여자들은 아무래도, 왠지, 좀 불편할 것 같다. 내가 남보다 상상력이나 호기심이 강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망측한 상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꺽정씨가 돌아서서 바지를 다시 입고 있다. 바지 밖으로 기어 나온 셔츠를 집어넣고 있다. 허리띠에 붙은 금속 띠쇠가 절렁절렁 부딪쳐서 소리가
*** 14홀. 파5. 458미터. 핸디캡13. 티잉그라운드 바로 아래에 워터 해저드인 연못이 있음. 연못에서 살고 있는 비단잉어의 유유자적한 삶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골프장의 배려로 누구나 산뜻하게 넘길 수 있을 만큼 연못의 길이가 짧음. 남성골퍼는 투 온을 노려봄직함. ***[신이 내린 스포츠, Golf Sex. 음주 후에 하면 결정적인 실수를 하는 수가 있다.]"전 여긴 버디가 기본입니다."얼굴이 불콰해진 꺽정씨가 말했다. 우리는 그늘집에서 따끈한 청주를 한 모금씩 마셨다. 가슴이 후끈후끈 달아오르고 있다.여태까지의 경험으로는 그늘집에서 술을 마시면 티샷이나 두 번째 샷에는 별 무리가 없었다. 무리가 없다기보다 알코올은 비거리를 늘리는 힘이 있었다.하지만 퍼팅이 문제였다. 퍼팅라인도 잘 안보일 뿐더러 공이 스위트 스폿에 맞아주지 않았다. 그린이 좌우로 갸웃갸웃 고개를 흔드는 것 같았다. 키 속의 곡식알처럼 까불리는 기분일 때도 있었다.깊어가는 가을의 스산한 날씨가 온기를 그립게 했고, 13홀의 버디가 알코올을 불렀다. 그래서 청주로 목을 축였다."그늘집 다음 홀을 조심하랬어요. 민호씨, 연습으로라도 용왕제 지내지 마세요."나는 진심으로 민호씨를 위해서
***13홀: 파3. 148미터. 핸디캡 17. 오른 쪽은 병풍을 둘러 친 듯한 산, 왼 쪽은 오비, 내리막 경사의 막바지에 그린이 있음. 그린의 앞쪽과 뒤쪽은 벙커. 티샷이 짧아도 벙커에 빠지고, 길어도 벙커에 빠짐. 공을 오뚝이처럼 세울 수 있어야 단번에 그린에 공을 올릴 수 있음.***[신이 내린 스포츠, GOLF SEX. 벽을 이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앞조가 진행을 못하고 멈춰서 있다. 아무래도 새치기조 때문에 진행에 차질이 있나보다. 이렇게 밀려있을 때면 대화로써 긴장을 풀어야 한다. "요즘 차.. 뭐타고 다녀요?"꺽정씨는 자동차에 관심이 많다. 일년에 한차례씩은 차를 바꾼다. 그러기에 경희가 묻는 말이다."국산차 애용 차원에서 그랜저를 탑니다.""오호... 그랜저를 타시는군요. 그럼 그랜저 안에서 머머 했다, 를 여섯 자로 표현하면 어떻게 되죠?""깊고 중후한 맛.""그럼 티코 타고 머머 한 것을 다시 여섯 자로 줄이면요?""좁은데 욕봤다. 근데 경희씨, 자꾸 케케묵은 우스개나 재탕 할 것인가요?""학습 진도를 나가기 위한 복습이었어요. 그런데, 뭐 하나만 물어볼 게요. 꺽정씨, 숲속에서 해봤어요?""숲속에서요?""그래요. 숲속에서 해봤냐니까
*** 12홀. 파4. 330미터. 핸디캡11. 페어웨이 좌우로 곧게 자란 소나무들이 벽처럼 늘어서 있음. 이 페어웨이는 그린을 향해 갈수록 좁아지고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깊은 숲이 러프와 연결되어 공이 숨으면 쉽게 찾지 못함. ***[신이 내린 스포츠, GOLF SEX. 플레이 중에는 금연을 요구한다.]일본으로 골프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내가 갔던 골프장은 각 홀마다 특별한 이름이 붙어 있었다. 홀의 생긴 모양에 따르거나 난이도에 따라 붙여진 이름 같았는데, Find me out, Eden, Demon's hand, Noah's Ark, Lone maple, The fork in the road, Hit and pray, Water kappa, Double or nothing, Happy knoll 등이었다.페어웨이가 좁아서 영락없이 오미의 쓴맛을 볼 것 같은 'Find me out', 이 세상 어딘가에 에덴이 존재한다면 바로 여기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녹음방초가 우거지고 새들이 지저귀던 'Eden', 소풍 나온 듯이 잠시 잔디에 앉아 푸른 하늘도 바라보고 뺨을 스치는 바람도 만져보며 쉬었다 가고 싶은 Happy knoll, 페어웨이가 넓고
*** 11홀. 파5. 563미터. 핸디캡5. 그린을 향해 길고 평탄한 페어웨이가 뻗어있음. 좌측은 오비이자 일렬로 네 개의 벙커가 누워있음. 우측은 송림. 만만치 않은 페어웨이의 길이가 핸디캡의 순위를 지켜줌. 티샷을 충분히 날려줄 것을 권장함. ***[신이 내린 스포츠, GOLF SEX. 백문이 불여일견.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설명해주어도 그 재미를 모른다.]나는 11홀을 해시계 홀이라고 부른다. 고른 키의 소나무들이 페어웨이에 드리운 그림자로 시각을 어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몽당연필처럼 짧은 그림자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지금은 아마 1시 반쯤 되었으리라. 여름에 비해 기운이 쇠락했어도 초가을의 햇빛은 아직 다사롭다. 티잉그라운드에서 페어웨이를 바라보면 좌측인 남쪽으로 소나무가 성벽처럼 도열해 있고 그 바깥쪽으로는 철망이 울타리를 치고 있다. 울타리 너머는 자동차 도로이다. 나무 기둥 틈새로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가끔 눈에 띄기도 한다. 하늘을 비질하며 서있는 소나무는 행길쪽으로 튀어나가는 공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도로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걸러준다. 소나무는 햇살이 따가운 여름날은 그늘을 골라 딛을 수 있게 하고,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은
**10홀. 파4. 핸디캡7. 383미터. 페어웨이 중간까지는 완만한 내리막이다가 점점 하향의 경사 각도가 심해짐. 티샷의 공이 날아가는 방향만 보일 뿐 떨어지는 지점은 볼 수 없음. 그러나 대체로 여성골퍼의 티샷은 급경사의 내리막이 시작되는 지점까지는 도달 못함.**[신이내린 스포츠, GOLF SEX. 에티켓을 갖춘 사람이 환영받는다.]아웃코스를 돌고 인코스로 들어오니 채가방들이 밀려있다. 우리 가방은 세 번째 줄이다. 조와 조 사이의 시간을 6분으로 계산하면 12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면 내가 티잉그라운드에 올라서기 전에 뒷조의 뒷조인 승헌씨가 나타날 것이다."안녕하세요? 여기서 뵙다니. 공은 잘 맞아요?"입 속에서 그에게 할말을 굴려본다. 일상적인 평범한 인사말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의 가슴에 화살처럼 꽂힐 멋진 대사는 없을까."뵙고 싶었는데... 원(願)이 강하면 하늘이 도와주나봐요."이건 너무 간지럽다. 적나라하게 내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 우아하게 꼬리치는 법이 없을까.그늘집에서 우동 한 그릇을 비우고 나왔는데도 승헌씨의 가방은 아직 건너오지 않고 있다.나는 벤치에 앉아 손톱을 깨물다가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이 참 못생겼다.
*** 9홀. 파5. 489미터. 핸디캡2. 산자락의 지형을 이용한 페어웨이가 이채로움. 페어웨이는 그린까지 가파른 오르막이면서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흐르고 있음. 또한 오른쪽으로 굴러 내려오는 공을 주식으로 삼는 악마 같은 벙커가 5개나 아가리를 벌리고 있음. ***[신이 내린 스포츠, GOLF SEX, 클라이맥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기도 한다.]나는 9홀 티잉그라운드에 서면 지레 힘이 빠진다. 홀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다고 느껴진다. 깃발이 펄럭이는 고지까지 헐떡거리며 공을 치고 또 쳐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숨이 차다. 그리스 신화 속의 시시포스처럼 헛된 노력을 하는 것만 같다. 아니 오늘만 그렇다.누군가를 가슴에 품고 있다는 건 고통스럽다. 낭떠러지에 안간힘을 쓰며 매달려 있는 듯하다.전 홀에서 승헌씨가 나를 알아봤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두방망이질 치던 가슴의 박동이 가라앉지 않는다. 호랑나비 한 마리가 팔랑팔랑 내 곁을 맴돌면서 따라오고 있다. 그가 보낸 전령인가. 나는 자꾸 뒤돌아본다.외로움은 상황이 아니라 감정이다. 개선하는 나폴레옹도 외롭다고 했다. 승헌씨와 나 사이의 거리가 갑자기 나를 고독에 휩싸이게 한다."18홀, 4시간 이상 걸리는 플레이 중
***8홀. 파4. 309미터. 핸디캡 18. 완만한 내리막 경사의 페어웨이는 그린 쪽으로 갈수록 넓어짐. 핸디캡이 꼴찌인 만큼 초보도 파 사냥이 용이함. 슬라이스가 나면 페어웨이를 따라 길게 누운 벙커에, 훅이 걸리면 7홀의 페어웨이로 공이 날아감. ***[신이 내린 스포츠, GOLF SEX, 가끔은 현금이 오고 가기도 한다.]"얘, 꺽정씨가 진짜 신사라면 우정의 오비로 숙녀들에게 기쁨을 선사해주겠지?"경희가 내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넌 신사를 한번도 못 만났나 보구나. 우정의 오비라니. 애초부터 우정 이건 애정이건 정 비슷한 것은 없는 인간이야. 경희야, 넌 그 정도 관상도 볼 줄 모르니? 저 화상이 오비를 날리게 생겼나."나는 누구에게라도 똑똑히 들리도록 큰소리로 떠든다."저어, 숙녀 분들 담소를 나누시는 중이온데 제가 공을 날려도 방해가 아니될런지요."모자를 벗어서 가슴에 대고 허리는 반쯤 굽힌 채로, 자기가 제법 신사인 척, 중세의 기사라도 된 양, 정중하게 말한다. 떠들지 말라는 뜻이다."쇤네들 지저귐은 괘념치 마시고 니 맘대로 치시옵소서...""그럼..."꺽정씨가 티잉그라운드로 올라갔다. 드라이버 헤드로 티마커를 탕탕 두들겨서 우리의 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