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우동석 기자] 우리 사회가 다시 복고 열풍에 빠졌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인기를 끌면서 복고와 추억 열풍을 재점화시켰다. 8090세대 가요계를 주름잡은 가수 변진섭과 1990년대 인기그룹 '터보'도 새 음반을 내며 복고열풍에 합류했다.
추억은 전자제품 등에도 녹아있다. 시대를 풍미했던 삼성의 '유행아이템'을 통해 그때 그 시절을 꺼내봤다.
TV가 '요술상자'라 불리던 1970년대, 당시 TV는 전원을 켠 후 약 20초의 예열 시간이 지나야만 화면 속 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 1975년 8월 삼성이 전원을 켠 후 5초 안에 화면이 뜨는 '이코노TV'를 내놨다. 예열 시간이 절반 이상 줄어드니 TV 시청이 편리해진 것은 물론이고 약 20%의 절전 효과(하루 5시간 시청 기준)까지 볼 수 있었다.
석유파동으로 인한 에너지 절약 운동과 맞물려 이코노TV는 큰 인기를 끌었다. 1978년에는 판매량 74만6000대, 시장점유율 40.9%를 기록하며 TV시장을 장악했다. 이코노TV는 일명 '부엉이TV'로도 불렸다. TV 광고에 박사모를 쓴 부엉이가 등장해 붙여졌다.
'응답하라 1988'에서 덕선이가 강력한 '득템' 의지를 보이던 '삼성전자 마이마이'는 집과 음악다방 같은 특정 공간에서만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제약을 허물어버린 휴대용 오디오다. 라디오 기능에 카세트 테이프 재생도 되는 마이마이는 1980~1990년대 학생은 물론 직장인들의 감성을 음악으로 적셔줬다.
손 안의 마이마이와 귀에 꽂은 이어폰은 패션의 완성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마이마이에 공테이프를 넣어두고 라디오를 듣다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녹음해 자신만의 음악 테이프를 만들 때도 많았다.
컴퓨터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동전을 넣고 게임 한 번 하겠다고 오락실이나 문방구 앞에 줄을 서던 초등학생들을 집으로 불러들인 주인공이 있었다. 바로 '겜보이'다. 집에서 겜보이를 TV와 연결하면 얼마든지 오락을 즐길 수 있었다.
게임이 들어 있는 팩을 겜보이에 끼워야 플레이할 수 있었다. 1990년대 초반 당시 인기를 끌던 팩으로는 '슈퍼마리오' '스트리트파이터' '쿵푸' '더블드래곤' '올림픽' 등이 있다. 게임팩 하나 가격이 2만원 선으로 만만치는 않았다. 이 때문에 동네 문방구에서 일주일 동안 3000~4000원에 팩 하나를 빌려주기도 했다.
요즘 스마트폰은 단순한 통화 기능을 넘어 만능 디바이스 역할을 하고 있지만,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휴대전화의 관건은 '통화 품질'이었다. 당시 휴대전화의 기능은 음성 통화가 전부였다. 이마저도 도심을 벗어나면 끊기기 일쑤였다.
이런 가운데 '한국 지형에 강하다'는 광고 문구와 함께 등장한 삼성전자 애니콜은 휴대전화를 향한 대중의 관심에 불을 지폈다. '언제 어디서나 통화가 잘 된다'는 이름대로 산에서도 잘 터졌던 데다 가격 마저 기존 휴대전화의 절반에 불과했다. 최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휴대전화가 일반 소비자와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1998년 삼성전자 MP3 플레이어 옙(YEPP)의 등장은 음악 마니아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카세트 테이프나 CD가 아닌 기계 자체에 음악을 저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 획기적이었다. 크기도 기존의 휴대용 플레이어보다 훨씬 작았다.
옙 초기 모델의 저장 용량은 32MB에 불과했으나 이후 64MB, 128MB, 256MB로 점차 업그레이드됐다. 카세트테이프나 CD를 여러 장 휴대해야 했던 시절에 비하면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1996년 '숨겨진 1인치를 찾았다'는 광고 문구와 함께 탄생해 2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기억되는 삼성전자 '명품 플러스원 TV'. 이전까지 TV 모니터는 4대 3 비율로 다소 답답한 느낌이었지만 세계 최초 12.8대 9 화면 비율을 선보인 명품TV는 훨씬 시원시원한 화면을 구현했다.
명품TV의 인기는 대단히 뜨거웠다. 모 백화점에서는 자사에서 혼수를 마련한 예비부부 중 24.1%인 2079쌍이 삼성 25인치 CT2555 명품 플러스원을 샀을 정도다. 이후에도 명품 플러스원TV는 판매가 급증해 29인치 이상 고급TV 시장을 50% 점유했다.
삼성물산 패션 부문 '골덴텍스'는 명품 원단의 대명사였다. 기성복 브랜드가 생겨나기 전인 1970년대, 정장은 무조건 '맞춤'이었다. 자연스럽게 원단이 중요해졌다. '국산품보다는 역시 외제'라는 생각이 팽배했던 시대였지만 사람들은 이내 국산 골덴텍스를 고급 옷감의 기준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당시 골덴텍스의 인기는 폭발적이어서 결혼 예단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신부가 망신을 당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기성복의 시대가 도래한 이후에도 골덴텍스는 고급 정장 브랜드의 원료로 쓰였다. 옷의 안감에 붙은 '골덴텍스' 라벨로 강렬한 존재감을 남겼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더플코트처럼 남녀노소 폭넓은 인기를 구가한 패션 아이템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중고생은 교복 위에 더플코트를 덧입고 대학생은 더플코트에 면바지를 매치해 캠퍼스룩을 완성했다. 직장인은 정장 위에 더플코트를 입었던 것이 당시 겨울 풍경이었다.
당시 수많은 브랜드가 더플코트를 내놨지만, 빈폴 더플코트의 인기는 단연 압도적이었다. 너나 할 것 없이 비슷한 디자인을 입었을지언정 빈폴 더플코트 주머니에 새겨진 자전거 문양과 고급스러운 체크무늬 안감은 '빈폴'임을 어필하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