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초였습니다. 인터넷에 ‘류승범 태도논란’이라는 검색어가 떴습니다. 포털사이트에는 ‘류승범 시사회 태도 논란, 기자들 질문에 무성의한 대답’, ‘프로답지 못한 행동 눈살’, 심지어 ‘류승범, 불성실 태도에 영화 완성도까지 입방아’라는 제목까지 단 기사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류승범이 출연한 <수상한 고객들> 기자시사회에서 류승범이 기자의 질문에 "먹먹하다"라는 말로 답변을 끝내고 다른 질문에도 계속 단답형으로 답한 것을 두고 쓴 기사였죠. 연예부 기자들이 일제히 류승범의 성의 문제를 들먹이며 십자포화를 날린 겁니다.
류승범은 결국 인터뷰를 통해 "영화를 처음 본 지 얼마 안 돼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며 그때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기자들은 그렇게 그 날의 ‘불성실한’ 태도에 대해 류승범의 해명을 요구하는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위주로 실었습니다. 영화 이야기는 별로 없었습니다. 류승범의 태도만을 꼬집을 뿐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적과의 동침> 기자시사회가 있었습니다. 이 기자시사회에 기자들이 엄청난 관심을 보였습니다. 바로 얼마 전 배우 김혜수와 결별한 배우 유해진이 나오기 때문이었습니다. 결별 후 첫 공식석상이라고 연예부 기자들은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습니다. ‘유해진 첫 공식석상, 결별 입 열까?’ 이런 제목을 단 기사들이 나왔죠.
결국 한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영화 속 로맨스가 비극으로 끝나는데 유사한 경험이 있느냐?" 얼핏 봐도 결별을 노리고 한 질문이 틀림없었죠. 거기에 유해진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또 기사들이 나왔습니다. ‘끝내 김혜수 언급 안 해’, ‘유해진, 수척해진 모습으로 김혜수 결별은 언급 회피’, ‘이별 아픔 컸나? 침묵만...’, ‘첫 공식석상 묵묵부답’ 이렇게요.
물론 영화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유해진이 결별에 대한 느낌을 알리지 않았다는 점을 더 강조했죠. 그들에게 핵심은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결별에 대한 유해진의 심정만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 질문에 답을 안 했으니 연예부 기자들, 특종 놓친 거죠. 또 십자포화 날아오는 거 아닌가 괜히 불안해지네요.
영화를 알리는 빠른 방법, 여배우의 드레스?
한국영화가 개봉하기까지 거치는 두 가지 행사가 있습니다. 바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리는 제작발표회와 영화를 처음으로 영화 전문 기자들과 관계자들에게 선보이는 기자 시사회입니다. 이 두 행사에는 모두 기자들과 감독, 배우들이 함께하는 기자 간담회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배우들의 사진을 찍는 포토타임 시간도 함께 있지요.
제작발표회와 기자 시사회. 이 행사의 주인공은 사실 ‘영화’입니다. 영화를 만든 감독과 출연한 배우들의 입을 통해 영화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와 의견을 나누는 자리가 바로 간담회지요.
하지만 간담회에서 영화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내용을 파악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왜냐구요? 기자들은 이런 심오한(?) 이야기는 잘 안 하려 합니다. 아니, 꺼낼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그럼 어떤 질문들이 나올까요? 가장 먼저 하는 질문은 "왜 이 영화에 출연했나요?"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하는 배우의 70%∼80%는 "시나리오가 좋아서"라고 답변합니다. 혹은 감독과의 의리, 제작사와의 의리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감독이나 동료 배우에 대한 믿음 때문이라는 답이 나옵니다.
그 다음 많이 하는 질문, ‘촬영 뒷이야기’입니다. 특히 베드신이나 러브신이 나오는 경우는 여지없이 ‘그 장면을 찍었을 때 기분이 어땠나’란 질문이 나옵니다. 신인 여배우들은 이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배우가 이야기하고 감독도 이야기합니다. 여러 에피소드들이 나옵니다. 인터넷 기자들은 열심히 그들의 이야기를 받아치고 기사를 작성합니다.
그리고 여러 질문이 나오지만 거의 대부분 촬영 뒷이야기의 연장입니다. 영화의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혹은 영화의 중요한 부분을 짚어내는 질문은 가뭄에 콩 나듯 나옵니다. 아니, 콩이라도 나면 다행이지요. 간담회는 그렇게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끝이 나고 배우들의 포토타임이 이어집니다.
포토타임의 꽃은 단연 여배우입니다. 여배우는 늘 드레스를 입고 등장하죠. 드레스를 입은 여배우의 모습은 바로 인터넷에 들어옵니다. 드레스 입은 여배우의 모습이 먼저 전해지고 배우가 한 말이 그 다음에 전해집니다. 영화에 대한 느낌이나 비평, 거의 안 나옵니다. 리뷰 전문 기자들의 글이 그 후에 나오게 됩니다.
영화를 알리는 가장 빠른 방법은 바로 여배우의 드레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왕이면 ‘반전 뒤태’를 보여주면 더욱 좋겠죠. 뒷태, 각선미, 심지어 노출까지 사진기자들의 시선은 온통 여배우에만 쏠려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육감적으로 나온 사진을 올리고 제목을 달죠. ‘반전 드레스, 육감적 뒷태 노출’, ‘아찔한 쇄골+각선미 반전매력’, ‘블링블링 드레스 입고 입장’, ‘반전 드레스도 청순하네’ 이런 식으로요. 그래서 시사회에서 여배우는 대부분 드레스를 입고 간담회를 하게 됩니다.
기자 시사회에 ‘영화’가 없다, 스캔들 찾는 게 먼저네?
언제부턴가 기자 간담회가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영화의 의도나 영화 전반적인 내용에 관한 날카로운 시선보다는 영화 뒷이야기나 듣고 그것을 받아 적는, 드레스 입은 여배우의 사진 찍기에 열 올리는, 배우들 얼굴과 표정만 담아 가는 행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홍보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배우들과 감독들을 찍고 영화 제목 하나라도 올리는 것 자체가 홍보가 되지만 정작 중요한 ‘영화’ 이야기가 빠진 영화 기사는 의미를 찾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더 큰 문제는 영화보다는 영화 바깥의 이야기에만 신경쓰려는 기자들이 많다는 겁니다. 앞에서 말한 배우 유해진의 예를 보면 알 수 있지요. 스캔들이 나거나 기타 불미스런 일이 생긴 배우의 경우에는 어떻게든 영화와 배우의 상황을 맞추려는 질문들을 던집니다. 당연히 배우는 대답을 하지 않지요. 왜? 영화 이야기하러 왔지, 자기 하소연하러 왔겠습니까?
그러면 연예 기자들은 일제히 ‘대답 없음’ 운운하며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기자의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라며 아쉬움을 가득 담은 기사를 씁니다. 이 정도면 그래도 다행입니다. ‘질문에 성의없이 대답했다’, ‘질문을 무시했다’ 이런 식으로 기사가 나오면 참 곤란해집니다. 졸지에 그 배우는 ‘건방진’ 배우가 되어버립니다. 기자 질문 무시한 죄지요.
그래서 간담회 전 관계자들은 스캔들이나 기타 불미스런 일에 대한 질문은 피해달라는 멘트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답을 들으려는 기자들의 머릿속에는 영화는 뒷전입니다. 정작 메인이 되어야 할 ‘영화’는 연예부 기자들에게 내동댕이쳐진다 이겁니다. 그들은 그렇게 배우와 감독 구경만 하고 유유히 극장을 빠져나갑니다. 내 할 일은 다했다 이거죠.
그리고 바로 인터넷에는 드레스를 입은 여배우의 사진과 ‘키스신 찍을 때 기분이 어땠다’는 자극적인 내용의 기사가 나옵니다. 영화에 대한 정보는 마지막에 한두 문장으로 끝낼 뿐입니다. 작품은 없고 연예인만 있습니다. 이게 지금 한국영화 기사의 현주소입니다.
차라리 ‘관객과의 대화’가 더 내용이 좋다
연예 기자들이 점점 ‘권력화’ 되어간다는 것은 어제오늘 나온 문제는 아닙니다. 대답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인터뷰를 사절한 배우들을 가차없이‘건방지다’라고 쓰는 게 바로 그들이지요. 헌데 지금은 독자들도 그 사실을 다 압니다. 누군가를 비난하는 기사가 나오면 가장 많이 달리는 댓글이 ‘기자 말에 대답을 안 했구나’니까요.
솔직히 지금같은 형식의 간담회는 정말 의미가 없습니다. 차라리 일반 관객과의 대화가 더 알차고 재미있습니다. 그저 촬영 뒷이야기나 듣고 사진이나 찍으려는 간담회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기자들의 먹이감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영화에 대한 알찬 이야기가 나오고 그 이야기가 기사로 실리고 관객들이 기사를 보고 ‘저 영화 참 괜찮겠구나’라고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모습이 계속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