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부동산 투자만 하면 부자가 된다는 말이 있었다. 아파트는 물론 다세대, 다가구 주택부터 토지, 임야까지 종목을 가리지 않았다. 사두기만 하면 몇 배로 뛴다는 말에 빚까지 내서 투자에 나섰다. 실제로 값은 천정부지로 올랐고 그 대열에 끼지 못한 사람이 바보가 됐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경기 악재로 부동산은 폭격을 맞았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부동산 대출도 9%대로 치솟으면서 상황은 역전됐다. 정부에서는 부동산 경기를 회복시키겠다며 규제완화와 세금감면 등의 대책을 내놨지만 얼어붙은 경기를 활성화시키기엔 역부족이다. 빚을 내서 집을 산 사람들의 한숨이 깊어간다.
처분조건부 대출자 ‘속이 탄다’
30대 중반의 중소기업 직장인 최 아무개씨. 5살된 딸아이와 아내가 있다. 작년에 큰맘 먹고 산본에 있는 25평형 아파트를 3억에 샀고 1억 정도를 대출을 받았다. 월급은 350만원을 받지만 외벌이라 생활비와 대출금 갚기도 빠듯하다. 세금 및 교통비 등을 포함한 생활비 250만원에 대출금 80여만원을 갚고 나면 남는 돈은 고작 20만원. 경조사라도 있는 달엔 마이너스에 가깝다. 아끼고 아껴보지만 저축은 꿈도 못꾸고 원금상환은 제자리 걸음이니 앞이 보이질 않는다. 설상가상, 집값은 기대만큼 오르지 않고 대출이자는 갈수록 불어나고 있어 요즘 애가 타 들어간다. 한 젊은 가장의 고달픈 삶 같지만,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얘기일 것이다.
집값 상승에 대한 기대감으로 추가로 아파트를 사면서 기존에 산 아파트를 1년 안에 처분하는 조건으로 대출을 받은 ‘처분조건부 대출자’들은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부동산 침체가 계속 되면서 거래는 되지 않고 금리부담은 계속 증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처분조건부 대출을 받은 경우가 7만1000건, 금액으로는 7조2000억 원에 달한다. 이 가운데 올해 만기가 돌아오는 것만도 2만9800건, 3조2000억 원에 이른다.
처분조건부 대출을 받은 경우 1년 안에 기존주택을 팔지 못하면 16~21%의 높은 연체이자를 물어야 하고 1년 3개월 안에도 매도하지 못하면 경매 등의 강제처분에 들어갈 수 있다. 수도권의 1인당 평균 대출이용 금액은 1억2000만원선. 금리가 1%포인트 오르면 연 120만원, 월 10만원 더 이자를 물어야 한다.
팔자니 나가진 않고, 갖고 있자니 이자부담이 무서워 이중고를 겪는 대출자들은 금융감독원과 은행권에 만기까지 집을 팔 수 없다며 기간을 유예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고 있지만 금융당국은 ‘원칙’을 이유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가계발 금융위기 재발 우려
시중은행 관계자는 “강제처분 등의 조치를 피하기 위해서 대부업체에서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 은행 대출을 갚는 경우도 적지 않다”면서 “하지만 그래도 기존 주택은 처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 시중은행의 처분조건부 대출자들이 원리금을 연체하거나 주택 처분을 못한 건수는 지난해 말 20여건에 불과했지만 최근 들어 50여건으로 부쩍 늘었다. 반년새 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거래가 뜸한 지역의 기존 주택을 처분하지 못한 대출자들 중엔 1년 전에 새로 산 아파트를 대신 팔아 대출을 해소하는 경우도 있다고 은행권 관계자는 귀띔한다.
잠실 일대 재건축 단지는 늘어나는 대출이자를 감당하지 못한 집주인들의 ‘전세 내놓기’ 전쟁이 한창이다. 자연히 전세가도 덩달아 떨어지고 있다. 신천동 정철 정철공인 대표는 “입주하면 무이자로 받은 이주비가 유이자 대출로 전환된다”며 “경기침체와 금리 인상을 걱정하는 집주인들이 은행 대출을 갚기 위해 전세 물량을 서둘러 내놓고 있다”고 전했다.
처분조건부 대출을 상환하기 위해 편법을 쓰기도 한다. 제2금융권 대출을 받아 갈아타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은행권 대출을 갚는다 해도 기존 주택의 처분 의무는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에 ‘대출 갈아타기’도 안전한 수단이 될 순 없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히 대출이자 부담이 아니다. 주택담보대출이 많은 가계 부문을 감안할 때 대출금리 인상이 가계 파산 증가 및 부동산 가격의 추가 하락을 부추길 우려가 있어 가계발 금융위기의 재발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것이라는 데 있다.
제2 서브프라임 사태 오나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6년말 기준 가계대출잔액에서 주택담보 및 주택관련 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약 70%에 달한다. 가계의 자산 구성에서 부동산 비중이 77%를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빚을 내서 부동산을 산 비중이 높다는 얘기다. 주택담보대출도 증가세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내 주택담보대출은 226조6000억원으로 추정된다. 이 대출의 대부분이 변동금리 대출로 시중금리의 인상이 차입자에게 고스란히 전가된다.
주택담보대출의 95%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변동형 주택담보대출이 최고 9%를 넘어선 뒤 지난 1월말 이후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변동금리 주택담보대출 금리 오름세가 가팔라지고 있는 것은 양도성예금증서(CD)금리가 오르기 때문. 9월 기준금리(정책금리)가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대출자들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3년 거치기간 만료 후 신규로 원리금을 상환하는 대출규모는 지난해 19조5000억원에서 올해 21조8000억원으로 그리고 내년에는 48조6000억원으로 급속히 증가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 최근 지속되는 높은 인플레이션과 경기둔화까지 가세하는 경우 가계 부문의 대규모 부실화가 현실화돼 부동산 담보 물건의 시장 유입 및 이에 따른 가격의 급락, 은행권 부실까지 지난 수년간 우려해온 거품 붕괴의 상황이 현실화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금리가 급등하면서 부동산 가격이 크게 조정을 받는다면 가계의 재무 상태나 채무 상환 능력이 크게 떨어질 수 있다. 현재 가계 대출 평균 금리는 대략 7.5%에 달하는데 비정상적 금리 급등이 나타난다면 가계 대출 상환을 위한 부동산 처분 압력이 나타날 수 있다. ‘금리급등→가계의 채무 상환 능력 약화→부동산 처분 압력 증가→부동산 가격 하락→금융 위기’와 같은 최악의 시나리오가 나타날 수 있다. 이는 한국이 미국과 같은 서브프라임모기지 부실사태가 재현되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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