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계적인 강국인 미국의 개척 역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청교도들의 눈물과 감사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험난한 항해 끝에 마침내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도착한 그곳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걸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요. 더구나 가지고 온 보리와 밀은 신대륙의 기후 조건과 맞지 않아 농사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원주민들의 위협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요. 인디언 추장 사모세트는 몇 가지 씨앗을 주면서 재배 기술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옥수수, 호박, 감자 등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청교도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자, 옥수수, 호박으로 만든 팬케이크를
긍휼이란 영적으로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아무리 가망 없어 보이는 영혼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구원을 얻게 하려는 마음이지요. 선한 마음의 바탕 위에서 상대의 입장과 마음이 되어 주어야 영혼을 살릴 수 있는 지혜, 구원의 길로 이끄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지혜로 지친 영혼에게 힘을 주고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할 수 있지요. 이처럼 하나님 안에서 긍휼을 베풀었을 때 얻어지는 모든 열매가 선한 열매이므로 긍휼과 선한 열매는 하나의 짝을 이룹니다. 그런데 긍휼은 단지 불쌍히 여기고 귀히 여기는 마음만이 아닙니다. 한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해 용서도 하고, 징계도 하며, 때를 좇아 구제도 합니다. 에베소서 4:32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했습니다. 하나님과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심과 같이 우리도 서로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긍휼히 여겨 용서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입장을 이해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입장에서는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도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하면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와 징계는
‘양순’은 영적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의 향이 말과 행함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선하다 해서 단순히 착하고 부드러운 것만은 아닙니다. 강하고 담대하지요. 영적인 선과 진리로 가득 찬 마음에는 어둠을 물리치는 빛의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진리로 이끌 수 있고 마음을 다스리게 도와줄 수 있습니다. 진리 안에서 이것도 저것도 가할 때 성령으로 분별해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깊은 선의 차원입니다. 그러면 양순의 특징을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어떠한 상황에 처한다 해도 진리로 문제의 핵심을 분별해 상대의 마음을 평안케 합니다. 어떤 사람이 유산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부모의 유산을 공평히 나누도록 자신의 형에게 권면해 달라고 하지요(눅 12장).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말씀하십니다. 탐심을 버리지 않는 한 이후로도 형제간에 감정 상할 일이 생길 수 있고, 탐심을 버릴 때라야 하나님께서도 물질의 축복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근본적인 해결 방법을 깨우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답변해
바둑 둘 때 훈수하는 사람이 세 수를 더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직접 두는 사람은 심리적 부담으로 쉬운 것도 못 보는 수가 있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승패에 대한 부담이 없어 그만큼 여유가 있고 시야가 넓어지지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할 때에는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설령 어떤 것이 진리인지 안다 해도 눈앞의 유익에 집착하면 진리대로 행하지 못하지요. 그러나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하나님 말씀으로 채우면 옳은 것을 쉽게 분별할 수 있고, 진리를 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답을 제시해 줄 수 있지요. 이것이 바로 관용의 열매로 얻는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관용의 영적 의미는 ‘진리가 마음에 풍성하게 임하면서 동시에 진리의 자유함이 있으므로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다 내어주기 위해서는 사심이 없고 진리가 마음에 가득해야 합니다. 창세기 13장에 나오는 아브람의 행함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가축이 많아지자 아브람과 조카 롯의 목자들 사이에 풀과 물을 얻기 위해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아브람
[시사뉴스 김정호 기자] 10월 3일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에 위치한 극락정사에서는 특별한 위령제가 열렸다. 일본 교토시에 있는 조선인이총(朝鮮人耳塚)에 묻힌 영가(靈駕)들을 위한 위령제. 조선인이총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전리품을 확인하기 위해 목 대신 베어갔던 조선인들의 귀와 코를 묻은 무덤이다. 이 무덤에 묻힌 영혼들을 고국으로 모셔오기 위한 작업을 한 스님이 오래전부터 해오고 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극락정사의 주지인 무학스님이다.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군에게 조선 백성들을 보는 대로 사살해서 그 수급(首級)을 모아오라고 명령했는데 수급이 너무 무거워서 그 대신 귀와 코를 모으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일본군은 조선에서 조선군과 민중들을 죽이고 코를 베어갔습니다. 그때 일본으로 보내진 조선인들의 코와 귀를 묻은 곳입니다. 저는 이국만리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는 126,000위의 영가(靈駕)들을 고국으로 모셔오기 위해 기도법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영가들을 모셔오기 전에 100회의 기도법회를 진행하는데, 이날은 45회 째였다. 이날 법회에는 『삼계망령 십이만육천 조선인 귀 코 유주무주 애혼 고혼 각 열위 열명영가』 라는 문구를 내건 가운데 엄
가정이나 학교, 직장, 사업터 등 자신이 속한 분야마다 아름답게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지혜가 있다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며 마음을 하나로 모아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과 화평하는 것이 지혜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해결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학식이나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데도 겸손하여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만하여 상대를 무시하는 사람도 있지요. 뛰어난 두뇌와 능력을 가졌다 해도 상대를 무시하고 화평을 깨뜨리는 사람은 큰일을 이룰 수 없고 오히려 해를 입힐 수도 있습니다. 조선시대 조광조라는 인물은 왕과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과감한 개혁 정책을 단행하려 했습니다. 그는 소신이 뚜렷하고 열정이 있었기에 왕도 처음에는 그를 힘껏 밀어주었고, 백성도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과격하고 급진적으로 일을 추진해가니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고, 그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아 그를 지지하던 왕조차 외면하고 말았지요. 결국 그는 개혁 정책을 실행해 보지도 못한
하나님의 지혜를 받는다는 것은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주관을 받는 것과 흡사합니다. 마음에 악이 없는 것이 성결의 기본 조건이듯이 하늘의 지혜도 마음이 선한 만큼 더 섬세하고 깊이 받을 수 있습니다.이처럼 하나님의 지혜는 항상 선한 방법으로 나옵니다. 마음에 악이 있으면 누군가 선한 지혜를 알려 준다 해도 그 방법을 따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먼저 마음의 악을 버리는 것이 지혜를 받고 지혜가 주는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길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는 사람은 대화할 때에도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선한 표현을 씁니다. 곱고 은혜로운 말, 누가 들어도 덕스러운 말을 하지요.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만한 표현은 하지 않고, 선한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선하고 덕스러운 말이나 선한 기도는 자신이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악이 있으면 은연중에 악이 배어나오지요. 반대로 마음이 선하면 자연히 선한 기도, 선하고 덕스러운 말만 나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이나 말로 인해 오해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은 선한 의도로 말했는데 도리어 난처한 입장에 놓이거나 비방을 당하는 경우도 있지요. 이럴 때에는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보다
사람마다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건강과 장수, 명예와 권세, 부귀와 영화, 지식과 지혜를 소중하게 생각하는데 과연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일까요? 삶의 지혜가 기록된 잠언 3:13~17을 보면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잠 4:7),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교훈합니다. 악하고 간교한 꾀도 지혜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지혜는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수 없으니 많은 것을 얻었다 해도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반면 선하신 하나님의 지혜를 받으면 모든 일에 형통하며 가정이나 학교, 직장 등 자신이 있는 곳에서 사랑받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3:17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 했는데, 여기서 “위로부터 난 지혜”란 하나님의 지혜를 말합니다. 선하신
우리는 살면서 순간순간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가 있으면 어려운 일을 피해 갈 수 있고, 혹 어려운 일을 만난다 해도 잘 극복하여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3:18에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말씀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을 말할 때 제갈공명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중국 삼국 시대의 지략가로서, 앞일을 정확히 내다보았으며 천기를 읽고 바람의 방향까지 바꾸었습니다. 유비는 덕이 있어 백성의 신망이 두터운 사람이었지만 지혜가 부족했기에 오랜 세월 확실한 기반을 잡지 못했습니다. 지략가를 물색하던 유비는 마침내 제갈공명을 만나 그의 지혜를 따른 결과, 전쟁마다 승리하고 때를 따라 적과 화친하여 강대한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제갈공명은 어떻게 이런 지혜를 가질 수 있었을까요? 신을 인정하는 선한 마음을 가졌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욕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의를 위해 재능을 사용하니 명철의 길도 훤히 보였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것이 급변하는 시대에는 제갈공명과 같은 지혜를 지닌 인재가 더욱 요구됩니다. 지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경험과 학문을 통해 얻을
시간이란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금은보화를 주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는 크게 달라집니다. 세월을 아끼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5:18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술이란 알코올이 들어간 음료만이 아니라 진리에 어긋나고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온 것을 의미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어찌하든 믿는 자들을 미혹해 사망에 빠뜨리고자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충만함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야 미혹당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면 강하고 담대한 자가 되어 세상을 이길 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이 됩니다. 성령 충만함을 입으려면 무엇보다 쉬지 말고 불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을 기름에 비유한다면, 기도는 영혼의 등불에 기름을 공급해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게 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찬미할 때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세상에 물들지
성경 에베소서 5:9에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했고, 이어서 5:10을 보면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말씀합니다. 이는 곧 빛의 열매를 맺어 주님을 기쁘시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됐던 성경상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들 수 있습니다.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삶 자체가 빛의 열매 곧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화평함을 좇아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는가 하면, 자기 것이 아닌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취하지 않으려는 깨끗하고 착한 마음의 소유자였지요. 그는 선한 마음뿐만 아니라 의로운 행함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명하시자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그대로 순종했지요. 또한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도 하나님 말씀을 의심 없이 믿은 자체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의로움이 되었습니다(창 15:6). 즉 자신이나 아내가 이미 출산할 수 없을 정도로 늙었으나 하나님께서 하늘의 뭇별을 보이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말씀하시자
교만이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 내가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제일로 여깁니다. 매사에 상대를 무시하고 얕잡아보며 가르치려 합니다. 보통 자신보다 못해 보이는 상대에게 교만한 모습을 보이지만 심한 경우에는 자신을 가르쳐 주고 이끌어 준 사람이나 질서상 윗사람까지도 무시합니다. 윗사람이 어떤 권면이나 지적을 하면 “뭘 모르고 저렇게 말씀하시네.”라고 불평하거나 “그 정도는 나도 다 아는데…. 잘할 수 있는데.” 하며 잘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과 대화를 하면 곧잘 변론으로 이어져 다툼이 생깁니다. 잠언 13:10에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했으며, 디모데후서 2:23에는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말씀합니다. 자신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고 악한지를 깨우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양심이 다르고 지식도 다릅니다.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배우며 체험한 것이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식 중에는 오류도 많고 스스로 엉뚱하게 입력한 것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심리학자 에빙하우스는 실험 결과, 사람은 하루가 지나면 기억의 70%를, 한 달이 지나면 80%를 잊어버린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보고 들어도 기억이 전혀 없거나 흐릿하게 남는 것이 있는 반면, 오랜 세월이 지나도 확실하게 떠오르고 잊히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이는 기억 장치에 내용을 입력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무심코 흘려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보고 듣기는 했지만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기차를 타고 고향에 내려갈 때 창밖으로 누렇게 곡식이 익어가는 논과 밭이 보입니다. 이때 다른 생각에 골몰해 있으면 고향에 도착했을 때 막상 무엇을 보았는지 별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또 학생이 수업 시간에 오락 등 잡념에 빠져 있었다면 수업이 끝난 후 무엇을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요. 둘째로, 담아둔 것이 있습니다. 창밖에 펼쳐진 논밭을 볼 때 부모님과 연관하여 기억해 놓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농사짓는 모습 등을 떠올리며 논과 밭을 보았다면 어느 정도는 기억으로 남습니다. 또 학생이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런가 보다.” 하고 가볍게 담아두기만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