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가 약자에게 못할 짓이 없고, 약자가 살기 위해 강자에게 못할 것이 없다.』
영화로도 흥행한 소설 <남한산성>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처절하다.
결사항전을 주장한 예조판서 김상헌은 “청(淸)군 첩자를 건네준다”는 늙은 사공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린다. 먹고살 배삯을 받기 위해 강자에게 못할 짓이 없었던 약자에게 또다른 강자(망국 직전의 대신이라도)는 못할 짓이 없었던 것이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은 끝이 없고, 그래서 절대강자란 없다.
예판의 군주인 인조가 청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찧은 치욕의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도 살기 위해선 못할 일이 아니었다.
청의 강자 행세도 300년을 못 갔다. 아편전쟁에서 대패하고 영국에 홍콩을 100년 동안 내주어야 했고, 중일전쟁으로 일본에게도 씻을 수 없는 굴욕을 당해야 했다. 패망한 일본도 살아남기 위해 미국에 못할 것이 무엇이 있었으랴. 그리고 미국이라고 언제까지나 최강자일 수 있을까.
역사가 오늘의 우리에게 알려주는 진실은 강자도 약자도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이리라.
남한산성은 세계문화유산답게 그런 진실을 일깨워주는 곳일지 모른다.
“강자도 언젠간 더 강한 자에게 약자가 될 수 있다”는 역사의 진실을.
그러나 그것은 어른들의 이야기다.
아이들은 강자의 논리로 약자를 괴롭히지도, 약자의 논리로 굴복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강약(强弱)보다는 친구가, 승패(勝敗)보다는 놀이가 마냥 좋을 뿐이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워즈워드의 시(詩)는 반복되는 영욕의 역사를 알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어른들을 꾸짖는 말일 것이다.
‘남한산성 나라사랑(호국)문화제-전국 학생 글짓기 및 그림그리기 대회’는 그래서 소중하다. 어느덧 열여섯 해를 맞게 된 것도 여전히 순수한 마음으로 글을 짓고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이 있어서다. 영원한 강자는 때묻지 않은 아이들이다.
미중, 북미, 한일 간 갈등과 분쟁으로 바람 잘 날 없는 이때 아이들 이야기를 문화제 시상식에 맞춰 커버스토리로 ‘모신’ 이유도 그래서다. 자만한 강자와 비굴한 약자의 미래를 역사는 이미 숱하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남한산성은 ‘전쟁의 과거’이지만, 그곳에서 글을 짓고 그림을 그린 아이들은 ‘평화의 미래’다.
꿈을 ‘그리고’ 희망을 ‘쓰는’ 아이들은 모두 미래에서 온 거장(巨匠)이고 문호(文豪)다.
강약과 승패에 연연하는 우리 어른들은 잠시라도 그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남한산성>의 마지막도 아이다. 바로 적군 첩자를 건네주다 죽임을 당한 늙은 사공의 손녀다. 이제 대장장이는 무기 대신 농기구에 망치질을 하고, 소녀는 연을 날리러 동무들 속으로 뛰어간다. 언제 그런 강약의 승패가 있었냐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