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김부삼 기자] 물이 귀한 사막지방에서 우물이나 샘은 생명과 직결되는 귀중한 자원이요, 삶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맑고 풍성했던 그 물이 어느 날 갑자기 더러워지고 흐려진다면 많은 사람들을 실망케 하고 우물 혹은 샘으로서의 가치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곧 우물의 흐려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다”(잠 25:26)고 말씀하십니다. 즉 의인이 악인에게 져서 그 앞에 굴복하거나 의를 변개하고 타협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모든 사람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며, 의인이 곤경에 처할 때는 그 방패와 산성이 되어 구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연단하여 더 크고 아름다운 그릇으로 만들기 위해, 혹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때때로 어려움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결과는 악에 대한 선의 승리요 의인의 팔을 들어 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이며 절대불변의 진리입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을 보시고 그의 눈을 밝혀 주신 사건이 나옵니다. 이때 완악한 유대인들은 그에게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를 묻습니다. 하지만 그의 진실한 대답을 듣고도 그들은 예수님의 하신 일임을 믿지 못하여 다시 그의 부모에게 찾아가 확인해 봅니다.
그런데 그의 부모는 예수님께서 자기의 아들을 치료해 주셨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 하며 모른 척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사람은 유대인들로부터 출교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출교라는 것은 당시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완전히 매장당하는 것으로서 죽음을 의미할 정도로 두려운 징계였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또다시 그를 불러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료되었음을 인정하되,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 역사하셨다는 것은 믿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죄인 취급했던 것입니다.
이에 시각 장애인이었던 사람은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하며 담대하게 대답합니다. 즉 눈 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는 권능은 죄인으로서는 행할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깨우쳐 준 것입니다.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사람들 앞에 “아니”라고 정면으로 맞서 항변하는 것보다도 더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로 진실을 말하였던 것이지요. 자신의 부모와는 달리 많은 유대인들이 위협적으로 다가와도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담대히 진실을 증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그는 선하고 진실한 중심이었기에 예수님께서는 그가 구하기도 전에 먼저 그에게 다가가 치료해 주심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게 했던 것입니다.
외모는 비록 부족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선하고 진실하며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악인 앞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진리를 좇는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축복해 주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어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으니라”(잠언 25:26)
글쓴이=만민중앙교회 당회장, GCN 방송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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