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이종근 기자]미래에셋증권이 KB금융지주, 한국투자증권을 제치고 KDB대우증권 인수를 위한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대우증권을 품에 안게 되면 미래에셋증권은 국내 1위 증권사는 물론, 글로벌 투자은행(IB) 들과 경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미래에셋증권의 대우증권 인수전 승리는 한 편의 반전 드라마였다.
당초 KB금융지주가 유력할 것이라는 시장의 예상을 깨고 미래에셋증권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베팅 금액 차이가 결정적이었다.
미래에셋증권은 2조4000억원대의 최고가를 써내 2조2000억원대를 써낸 한국투자증권, 2조1000억원대를 써낸 KB금융지주를 따돌린 것으로 알려졌다.
가격 차이가 크지 않을 경우 인수 후 시너지효과와 적격성 등 가격 외적인 요인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지만 가격 차이가 상당했던 탓에 무게추가 기울어졌다는 평가다.
예상을 뒤엎는 결과를 두고 시장에서는 또 한번 박현주 회장의 특유의 승부사 기질이 반전 드라마를 만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1997년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한 박 회장의 도전이 자본시장 패러다임을 새롭게 쓰는 한편 한국 금융산업을 한단계 도약시킬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하게 된 셈이다.
'펀드 대통령'으로 불리는 박 회장은 한국 금융사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전인미답의 스토리를 가진 인물이다.
박 회장이 자본시장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생이던 20대 초반이다. '자본시장의 발전 없이 자본주의는 발전할 수 없다'는 말에 투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고, 대학원생이던 27살에 자문회사 형태인 내외증권연구소를 만든게 지금의 미래에셋그룹을 일구는 초석이 됐다.
이후 1987년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에 입사해 샐러리맨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입사 4년 6개월만인 33살에 최연소 지점장 타이틀을 달기도 했다.
그리고 "한 분야에서 10년이상 정진해야 한다"는 인생철학에 따라 외환위기 6개월전인 1997년 6월 자본금 100억원으로 미래에셋캐피탈을 창업했다.
1998년 12월 내놓은 국내 첫 폐쇄형 뮤추얼 펀드 '박현주 1호'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미래에셋이란 이름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박 회장은 이듬해인 1999년 고객에게 금융솔루션을 제공하는 금융그룹을 만들기 위해 미래에셋증권을 설립하고 2005년 미래에셋생명을 출범시켰다.
미래에셋은 적립식 펀드 활성화를 통한 펀드 대중화 바람을 일으킨 주역이다. 또 업계 최초로 해외에 진출해 금융상품을 수출하는 등 차별화된 전략을 구사하며 급성장했다.
'인사이트 펀드'는 박 회장에 기쁨과 아픔을 동시에 안겨줬다.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2007년 내놓은 '인사이트 펀드'는 출시 초반 박 회장의 브랜드 파워에 시중자금이 날개달린 듯 팔렸지만 '중국 몰빵 펀드' 논란 속에 수익률이 반 토막 나면서 명성에 상처를 입기도 했다.
대우증권 인수를 통해 박 회장은 또 한번의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박 회장은 항상 증권사의 자산이 10조원은 넘어야 제대로 된 투자를 할 수 있다고 강조해왔다. 그의 오랜 꿈이자 목표에 한발 더 가가서게 됐다.
그는 대우증권 인수를 통해 글로벌 IB 도약이라는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자기자본 4조3256억원(9월 말 기준)인 KDB대우증권을 인수하면 미래에셋증권의 자기자본(3조5000억원)은 자기자본이 7조8000억원대가 된다.
2위 NH투자증권(4조4900억원)과 삼성증권(3조6200억원)을 압도하는 규모다. 독보적 1위다. 하지만 일본의 노무라증권(자기자본 28조원), 다이와증권(14조원) 등에 비하면 아직 중소형사 수준이다.
미래에셋증권 관계자는 "아시아 대형 투자은행으로의 변모를 통해 글로벌 투자은행들과 경쟁할 수 있는 자본력을 갖추고, 본격적으로 아시아 시장을 선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