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수동이에요 맞받아치려면 파리한 눈물 흘려야 해요 잡풀은 두려움 먹고 살아요 버거운 한숨의 내력 기복(祈福) 같은 연민으로 공감해요 벗어나는 방법은 책에 많아요 효력 없을 뿐 취업전선에 고개 숙이며 눈빛 잃는 게 정답이지요 생명은 무임승차 없어요 시멘트 뚫은 민들레에게 낭만 신화 꾸미지 말아요 희생자 역할 남아돌아요 겁먹은 가면으로 공과금 내는 기능인처럼 무뎌진 자괴감 가려요 저승 문 앞에 날벌레 사체 줄어들지 않아요 일찍 떨어지지 않으려는 꽃잎 같은 생명 무게 머리카락 한 올 같은 만용으로 버텨요 가시 박힌 마음은 말 잘 듣는 바람처럼 정글 숲의 순리를 살아요 저자: 김현희 시인, 껍질의 시(2020) / 고수(高手) (2021) / 견유주의(2021) / 소식주의 (2022)
그늘을 자른 건 사심(私心)이 아닙니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정거장입니다 밤 열두 시에 지하철을 찾아가는 맨발입니다 조금의 햇살이 필요합니다 뒤틀린 뿌리가 새싹을 내야합니다 질곡의 혈육 뒤엉켜 살아내려고 희망에 기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찰나의 봄에 태어나 남은 계절 동안 자기 수분을 빼앗깁니다 튼 살로 나이테를 새기느라 손발톱이 사라집니다 햇볕 한 줄기에 나르시스 호수처럼 부푸는 꽃망울도 있습니다 아지랑이처럼 꿈꾸기도 합니다 시퍼렇게 동상 입은 가난들 검버섯 아래 뽀얀 영혼이 있을까요 숨길을 죽여 연분홍 꽃가루를 위해 겨울을 자른 게 아닙니다 딱 하루만 이름 없는 봄으로 아무 색깔의 꽃이라도 되려면 조금의 햇빛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저자: 김현희 시인, 껍질의 시(2020) / 고수(高手) (2021) / 견유주의(2021) / 소식주의 (2022)
조카가 전국노래자랑에서 일등 했다 객사 소식 없는 아비가 보았을까 출발선 위치 다르다고 발밑 원망하지 않는다 혈안(血眼)의 동물처럼 도박장을 드나드는 아비라도 자기에게 생일날을 선물한 사람이라고 둥근 돌처럼 말한다 어릴 적 뽑기 기계에서 뽑은 가장자리 뜯긴 꽃잎 같은 작은 토끼 인형 하나 내던지듯 선물하고 떠도는 아비 잊지 않는다 살아있겠지 하는 말끝에 그리움은 곰국 같은 진국 열 살부터 자기 생계를 책임진 조카 스무 살에 흡혈 같은 아비 나타나 조카 이름으로 자동차를 사서 다시 사라졌어도 고아는 아니라며 동네 커피숍에 걸린 세한도(歲寒圖)처럼 웃는다 잠시 산책 나온 오후의 놀이터 같은 사생아(私生兒) 부자유친(父子有親)의 삶 새벽 3시에도 깨어 있는 수도자로 산다 저자: 김현희 시인, 껍질의 시(2020) / 고수(高手) (2021) / 견유주의(2021) / 소식주의 (2022)
이론의 배설물을 경단으로 빚어 굴리는 고위층 논객들 쳇바퀴의 철창에 갇힌 서민의 밥벌이를 치료제 없는 질병으로 돌돌 굴려 가십의 말똥구리 만들어낸다 태양을 굴리겠다는 듯 잉여물의 잔챙이조차 나눠 가지며 양복 윗주머니 액세서리 손수건 같은 배려의 추상화를 제삼자처럼 필요하면 사용하고 무용하면 버린다 해결된 숙제인 양 기댈 그물망 있을 거라는 참고서 같은 엔딩 멘트 좋은 결과 있을 거라며 콜레스테롤 많은 저녁 회식을 한다 시장 문턱의 패스워드인 양 끼리끼리 칭찬의 물거품 주고받는다 취업 시장 몰려다니는 벌떼 사진이 화면의 에필로그 해충 떼가 휩쓸고 간 길 뒤처져 훑으며 찌꺼기 줍는 땅벌레의 공익 광고 밝고 환하다 질려버린 시청자는 어혈의 맨살이 무기 생명세 공과금 납부하려고 귀 막고 달리기 멈추지 않는다 저자 : 김현희(<명리학그램1.2.3,4.>, 시집<소식주의>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