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적 성악가를 초빙한 무대를 1만원에 즐길 수 있다니, 꿈같은 일이 분명했다. 코로나 팬데믹 속에 150여명의 관객만 자리했지만, 모두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뉴욕 메트가 부럽지 않았다.
24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극장에서 열린 ‘2021 정동 팔레트, 양준모의 오페라 데이트’는 오랜만에 ‘행복’이란 단어를 떠올려준 시간이었다. 코로나19로 경기가 이토록 바닥을 찍지만 않았다면 그 열배를 치러도 아깝지 않은 무대였다.
3년 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이하 뉴욕 메트)에서 동양인 최초로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로 데뷔한 신상근 테너(경희대 교수)와 부부 성악가로 유럽 무대서 유학과 활동을 15년에 걸쳐 해온 이민정 소프라노(백석예술대학 객원교수)의 참 실력과 하모니, 거기에 뮤지컬 ‘영웅’의 히어로 안중근으로 유명한 뮤지컬배우 양준모의 MC로서의 입담과 테너 실력까지 맛본 무대였다.
봄볕 따사로운 이날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서 들어선 정동극장에서는 오전 11시부터 한시간에 걸쳐 달콤한 음악세계를 꿈결처럼 거닐 수 있었다. 삼라만상이 깨어나는 봄이지만 여전히 코로나19의 답답함에 짜증이 날 즈음 만난 이날 무대는 그간 오페라가 무겁고 어렵다고 생각한 이들에게는 편견을 깰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신상근씨는 2018년 4월 23일(현지시간) 세계 성악가들의 꿈의 무대인 뉴욕 메트에서 플라시도 도밍고 지휘의 샤를 구노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로 데뷔하면서 전세계 음악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또 당시 공연 실황이 생중계되면서 일약 세계적인 스타덤에 오른 상황이었다. 하지만 뉴욕 메트가 어디인가. 그 이전까지 135년간 로미오역은 원작대로 서양인 성악가가 로미오를 맡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신상근씨는 “예를 들면 춘향전의 이몽룡 역을 외국인이 맡는 것 같은 거였다. 그래서 더욱더 잘해야 했다”면서 "로미오 데뷔를 위해 칼싸움만 하루에 5시간씩 연습할 정도로 노래 외에 연기 역량과 기술적인 부분도 크게 중요시 되었다”고 말했다. 양준모씨는 “한국인의 위상을 올려준 사건이었다”면서 “꿈의 무대인 뉴욕 메트에서 로미오로 데뷔한 것은 한국인의 위상을 올린 것이며, ‘준비된 가수’라는 증거로 ‘탄탄한 발성과 모국어 같은 딕션, 출중한 외모’ 때문에 뽑힌 것”이라며 미소지었다.
한편 3년 전 당시 공연차 일본에 가 있던 이민정씨는 "신상근씨의 뉴욕 메트 데뷔 소식을 접하고 너무 기쁘면서도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많은 고생을 감내한 남편이 고마워 눈물이 났다"고 털어놓았다.
이날 공연은 푸치니 오페라 ‘라 보엠’ 중 ‘오 사랑스런 아가씨’를 시작으로, 샤를 구노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 중 ‘아, 꿈속에 살고파라’(이민정), ‘로미오와 줄리엣’ 중 ‘떠올라라 태양이여’(신상근),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중 ‘오늘밤’(이민정, 양준모),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 중 ‘아무도 잠들지 말라’(신상근, 양준모),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중 ‘축배의 노래’(신상근, 이민정, 양준모)로 이어졌다.
곡이 끝날 때마다 우뢰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코로나19로 극장에서 배정한 좌석수가 적은 까닭에 150명 정도가 참석했으나, 장내 열기는 뜨거웠다. 갈채가 쏟아졌고, 여기 저기서 '브라보' 혹은 '브라비' 소리가 홀을 가득 채웠다.
특히 마지막 ‘축배의 노래’에는 경희대의 남녀 성악 전공자 9명이 함께 하며 분위기를 살리기도 했다. 연주 후에는 양준모씨가 학생들에게 ‘오페라 대중화의 길’을 묻는 토크를 즉석에서 갖기도 했다.

유명 오페라의 대표 아리아를 직접 듣고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는 성악가들에게 현장 이야기를 듣는 것은 관객에게 또다른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신상근씨는 부드러운 레가토는 물론, 저음부터 고음까지 소리의 포커스가 좋고 힘찬 소리로 카리스마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민정씨는 화려한 고음과 부드러운 저음, 슬픈 소리로 ‘라 트라비아타’의 비련의 주인공 비올레타 역할에 딱 알맞을 법한 매력적인 소리를 들려주었다.
한편 양준모씨는 MC로서 자연스럽게 토크를 이어가는 가운데, 3곡에 참여해 테너의 역량도 보여주었다. 뮤지컬 ‘영웅’에서 안중근의사 역할로 유명세를 탄 그는, 학부는 성악 전공으로 동명이인인 바리톤 양준모씨(연세대 교수)와 테너 신상근씨에게 배웠다고 이날 밝혔다.
자연스럽게 이어진 이날 토크에서는 오페라와 오페레타, 뮤지컬의 차이점, 신상근씨가 뉴욕 메트에서 로미오역을 맡는 과정에서의 어려움, 이민정씨가 남편의 로미오역 데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의 소감,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 오페라 대중화의 길 등에 대한 대담이 이어졌다. 한편 줄리어드 음대에서 오페라 코치로 일했던 피아니스트 정호정씨의 호흡도 멋졌다.

이날 공연을 관람한 진부운씨(57. 서울 서초구)는 "신상근 이민정 부부 성악가의 편안한 토크와 오페라 아리아 모음이 마치 따스한 봄날을 알리듯 너무 행복한 귀호강을 했다"면서 "뉴욕으로 이탈리아로 독일로 가지 않고 서울 정동에서 세계적 성악가의 오페라 아리아와 유명 뮤지컬을 들을 수 있고, 음악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행복했다"고 감탄했다.
또 최양미씨(56. 서울 서초구)는 "프로그램 취지가 너무 좋고 덕수궁 근처 정동극장의 아늑한 공간과 부담없는 가격, 세계적 성악가 신상근 테너의 완벽한 곡 소화 능력과 안정적이고 유려한 소리, 귀엽고 예쁜 이민정 소프라노의 아름다운 노래까지 인상깊었다"면서 "공연 사이 토크를 통해 오페라 지식도 얻고 부부 성악가의 진솔한 얘기도 들으면서 앞으로 오페라 문화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고 밝혔다.
고품격 문화산책을 표방한 '2021정동 팔레트'는 한달에 한번 수요일 오전 11시부터 한시간에 걸쳐 브런치 콘서트로 진행된다. 다음 공연은 4월 28일에 열린다. 관람 희망자는 사전 예약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