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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화순의 아트&컬처] 고국 온 김관호 누드화 <해질녘> 그리고 한국근현대인물화 <50주년 맞는 갤러리현대 기념비적 첫 전시…한국 근현대미술사 빛낸 작품 한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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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까지 갤러리현대 신관, 본관에서…도쿄예술대 소장품인 김관호・고희동・김용준・오지호・이종우 자화상…일제강점기, 6·25, 산업화와 민주화운동 격변기 조망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화가에게 인물화는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한 역사의 ‘자화상’이었다. 인물화는 한 화가의 개성과 표현방식의 걸출함 외에 역사적 기록물로서도 무척 중요하다. 올해로 개관 50주년을 맞는 갤러리현대가 한국근현대인물화를 재조명하는 <인물 초상 그리고 사람-한국 근현대인물화>전을 3월 1일까지 열고 있다. 갤러리현대는 이번 전시를 위해 191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100여 년에 걸친 한국 근현대미술의 성장과 발자취를 인물화라는 장르로 추적했다. 그리고 그 인물들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새롭게 고찰했다.





전시 1부(갤러리현대 본관)에서는 1910년부터 1950년대까지 제작된 한국근대미술의 명작을 만날 수 있다. 한국의 근대미술 도입과 그 전개과정을 살필 수 있는 미술사적으로 귀중한 작품들이 중심이다. 2부(갤러리현대 신관)에서는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제작한 새로운 유형의 인물화를 선보인다. 해방 이후 펼쳐진 파란만장한 현대사와 한국인의 희노애락이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한국인이 서양화 기법으로 그린 최초의 누드화인 김관호(1890~1959)의 <해질녘>(1916)을 비롯해, 한국에 최초로 서양화를 도입한 고희동의 <자화상〉, 문화재로 등록된 배운성의 <가족도>, 이인성의 <가을 어느 날>,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 등을 만날 수 있다. 

도쿄예술대 미술관 소장품인 고희동, 김관호, 이종우, 오지호, 김용준 자화상도 오랜만에 어렵사리 한국땅을 밟았다. 

당시 모두 도쿄예술대에서 유학했던 장래가 촉망되던 예비 화가들이 대학 졸업작품으로 그린 것으로, 화가의 정체성과 자기인식을 엿볼 수 있다. 오지호, 김용준, 이종우 자화상은 22년만에 한국에서 함께 전시되는 것으로 갤러리에서 전시는 처음이다. 

유흥준(미술평론가, 명지대 석좌교수), 최열(미술평론가, 서울대 강사), 목수현(미술사학자, 서울대 강사), 조은정(미술사학자, 고려대 초빙교수), 박명자(현대화랑 회장)가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 이들은 당대의 시대 정신을 구현하면서 자신만의 독창성을 화면에 담아낸 화가 54명의 71점을 최종 출품작으로 선정했다. 







알몸 누드의 충격 


1부 전시장에 들어서면 평양 능라도를 배경으로 목욕하는 두 여인의 뒷모습을 그린 김관호의 <해질녘>(1916)을 만나게 된다. 인물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 작품은 도쿄미술대 서양화과 수석 졸업생인 김관호의 졸업작품이자 <제10회 문부성 전람회>(일본 문부성 주관 공모전) 특선 작품이다. 이 그림은 현대 누드화에 비하면 점잖은 편이지만 유교적 도덕관이 여전히 남아 있던 1910년대에는 엄청난 충격을 던졌다.  

당시 <매일신보>는 “김관호의 특선 뉴스를 전했지만 벌거벗은 그림인 까닭에 그림을 싣지 않았다”고 밝혔다. 당시 유학생이던 이광수는 “아! 특선, 특선이라! 특선이라면 미술계의 알성급제(謁聖及第)다… 장하도다, 우리 김 군!” 하며 김관호의 특선을 흥분 가득한 글로 전했고, “김관호 군이 조선인의 미술적 천재성을 세계에 표(表)해주어 감사하다”고도 썼다.(<매일신보> 1916년 11월 2일자) 그러나 신문은 “벌거벗은 그림인고로 게재하지 못함을 양해해 달라”고 밝혔다. 

김관호는 이미 도쿄미술대 수석 졸업으로 유명세를 탔다. <매일신보>(1916년 4월 2일자)는 ‘월계관의 영광 얻은 김관호군, 미술학교를 최고점으로 졸업’이란 제하의 기사로 김관호를 상세히 취재해 썼다. 이 기사에 따르면, 평양 출신인 김관호는 5세부터 한문서당에 입학해 13세까지 한문을 배우고 평양 일어학교 졸업 후 평양사립대성학교를 다녔다. 경성중학교에 재입학해 4년간 다녔으며 1909년 도쿄로 건너가 2년간 명치학원에서 공부한 후 도쿄미술대에 입학했다. 1916년 도쿄미술대를 졸업할 당시 졸업 점수는 95점으로 전과와 본과를 통틀어 최고점을 받았다. “5척 8촌(약 175cm)의 키에 미술대 제복을 입고 백면의 귀공자 같은 호남자”라고 썼다. 당시 김관호는 “일본화와 양화를 혼합한 듯한 조선화는 이름있는 화가 삼사인이 있으나 제대로 떨치지 아니합니다. 작년에 경성사람 고희동이라는 사람이 나와 마찬가지로 미술대를 졸업하고 지금 조선에 들어가 있습니다. 나도 조선에 들어가서 양화를 퍼지게 할 생각이야요. 최초에 공업을 배우려고 도쿄에 왔으나 숙부가 승낙을 하지 않고 미술은 승낙해 미술학교에 입학을 했다”고 인터뷰했다. 평양의 가족들을 취재한 <매일신보>는 같은 지면에 김관호의 가족 소식을 다루면서 “김관호가 14세에 부친을 여의었고, 팔십 노모와 처자가 성취를 기다리고 있다면서 김관호의 우등 졸업 전보를 받고 희색이 만면했다”고 전했다. 

김관호는 일본 문부성 특선과 관련해 <매일신보> 10월 20일자 기사에서 “‘소위 첫째라는 졸업 작품이 전람회에서 낙선이 되면 안된다’며 마음을 많이 썼는데 입선(특선을 말함)이 되어 학교에 면목도 서고 자신에게도 기쁜 일이다”라고 밝혔다. 작품에 대해서는 “평양의 능라도 부근을 배경으로 삼아 두 여인이 냇물에서 목욕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설명하면서 “몇 해 전 어느 날 저녁 한 냇가를 지나가다 부인이 목욕하는 것을 멀리서 보고 그림 재료로 훌륭하다 여겼던 일이 생각나서 그린 것”이라고 밝혔다. 

<해질녘> 이후 작품인 서진달의 <나부입상>(1934)는 여인의 앞모습을 전신 누드로 그린 것으로 인체의 비례가 한층 조선여인의 것이어서 누드의 한국화 과정이 진행된 것을 알게 한다.





향토색과 조선색 


누드 못지 않게 향토적 특성을 지닌 인물화도 눈에 띈다. 저고리와 치마를 입거나 머리에 쪽진 소재나 서양인이 아닌 아담한 한국인 비례 표현, 흰저고리에 옥색 치마 같은 색채도 눈길을 끈다. 오지호가 아내를 모델로 해서 그린 <아내의 상>(1936)이나 박상옥의 <소년입상>(1936)도 향토적 표현이 돋보인다. 그런가하면 윗몸을 드러낸 처녀가 짙은 하늘, 가을 풀 배경으로 바구니를 들고 서있는 이인성의 <가을 어느 날>(1934)은 누드와 조선 여인상의 양면을 보여준다. 독일에 유학한 배운성이 그린 <가족도>(1930~35)는 타국에서 이국인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그려낸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여성 유화가로 시대를 앞서 살았던 나혜석의 <비구니>(1940년대)는 붉은 배경에 붉은색 가사를 걸친 비구니의 모습이 향토적이면서도 표현적인 면을 보여준다. 


해방이 미친 영향


해방은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중국 한커우(현재의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간판업, 인쇄업을 했던 임군홍은 <모델>(1946)에서 한껏 자유로워진 자세와 옷차림을 보여주는 젊은 여성을 위에서 아래로 보는 부감시(俯瞰視)로 그렸다. 이응노의 <거리풍경-양색시>(1946), <영차영차>(1954)는 한층 현실에 발을 내딛은 모습이다. 1920년대 김규진 문하에서 묵죽을 그리다 일본 혼고회화연구소에서 사물의 실재와 마주하는 방법을 탐구했던 이응노는 10여 년의 일본생활을 접고 귀국한 후 당대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거리풍경-양색시>는 당시 미군을 상대로 살아가던 양공주에 대한 따가운 대중의 시선을 보여준다. 

해방 공간의 이쾌대 <군상> 시리즈는 서사적으로 그린 시대의 초상이라 할 만하다. 해방이라는 기쁨과 좌우 이데올로기 사이에 놓인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희망을 향해 나아가고자 했던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연해주 출신 고려인으로 평양미술대 학장을 지낸 변월용은 북한에서 본 젊은 여성의 모습을 <양지의 소녀>(1953)에서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냈다. 그에게 북한은 부모의 고향이었다.  


월북 혹은 재북 작가 


전시에 소개된 김관호, 김용준, 배운성, 임군홍, 이쾌대는 월북 또는 재북 작가다. 1950년 6·25전쟁을 치른 뒤 북한에 거주하게 된 그들은 오랫동안 한국미술사에서 숨겨져 있었다. 그들의 이름이 세상에 빛을 보기까지 40여 년이 걸렸다. 김관호는 고향이 평양이었고, 김용준은 서울대 미대 교수직을 사직한 채 월북했으며, 배운성은 독일 유학 후 북한을 선택했다. 임군홍은 중국에서 귀국 후 북한으로 갔고, 이쾌대는 인민군으로 복무하다 포로로 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북한을 선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목수현 미술사학자는 “20세기 전반기는 인물을 보는 새로운 눈이 마련된 때”라면서 “화가들은 자화상을 통해 지식인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냈고, 당대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적인 사실성을 담아 포착해냈다”고 평했다.





1950~1970년대 한국 인물화 


죽음이 넘쳐나는 6.25전쟁 속에 화가는 당대성, 지금이라는 순간의 기록자가 됐다. 그리고 인물화는 이전보다 화가의 메시지를 담은 인물화로 특성을 담기에 이른다. 

월남 화가 권옥연은 <폐허에서>(1951)에서 삼단 같은 머리에 상반신을 노출한 아내(이병복, 무대미술가, 1927~2017)를 전쟁 속에서도 마치 고갱같이 원시적이고 강인하게 표현했다. 반면, 전쟁으로 인해 가족과 헤어지고 결국 짧은 비운의 삶을 마감해야 했던 화가 이중섭은 <길 떠나는 가족>(1954)에서 보듯, 소달구지에 가족을 싣고 구름을 가르며 따뜻한 남쪽 나라로 향하는 가족애 담긴 그림을 남겼다. 평양 출신으로 월남한 최영림은 <동심춘심(동심춘심)>(1970)처럼 그리운 가족들을 그리는 마음을 화폭에 그려냈다. 최영림과 함께 월남한 장리석은 거리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노인을 그린 <그늘의 노인>(1958), <복덕방 노인>(1958)으로 제7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대통령상과 입선을 거머쥐었다. 

박수근은 전쟁 후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동생을 업은 소녀의 모습을 <길가에서>(1954)로 그려냈고, 파리 유학 중이던 김흥수는 고향을 그리며 행주치마를 두르고 광주리를 머리에 인 여인과 옆구리에 낀 여인을 <길동무>(1957)로 그려냈다. 

김환기도 비슷한 시기에 바구니나 백자 항아리를 머리에 인 여인들을 그린 <항아리와 태양>(1953)를 그렸다. 이 여인들은 백자, 흰옷, 자연의 상징과 함께 한국이라는 국토성을 의미할 것으로 보인다.   

김인승의 <도기를 다루는 소녀>(1955)도 전쟁 시기를 지나며 국가 산업이 도자기와 같은 민예품 생산을 독려했던 시기를 보여주고, <욕후(浴後)의 화장>(1955)은 일상성의 표현이란 점으로 앞 작품과 다른 감상 포인트를 지닌다. 민족의 표상으로서의 인물은 심형구의 <여인>(1959)이나 김기창의 <보리타작>(1956)에서도 확인된다. 





자유로운 표현 누드화…


전쟁 후 누드화는 더 이상 재현의 대상이 아닌 자유로운 작가의 표현 형식으로 발전한다. 이봉상의 <나부(裸婦)>(1955), 김흥수의 <여인>(1980년대), 이숙자의 <보리밭 누드>(1997), 임직순의 <여인>(1961) 등은 사람에 대한 화가의 생각, 새로운 표현 양식을 보여준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모습을 담은 박수근의 <모자>(1961)는 마치 성화(聖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천경자의 <탱고가 흐르는 황혼>(1978)은 여성의 욕망이 억제되던 사회에서 거침없는 사랑과 표현으로 여성들에게 대리만족을 주던 시대의 초상화다. 

예술과만 동거하던 고독한 화가의 삶을 그린 작품들도 있다. 장욱진의 <수하(樹下)>(1954)에서 둥근 나무 아래 그늘에 두 팔을 괴고 누운 자유인이 등장한다. 술을 통해 고립의 길을 택한 작가의 모습이라평가할 만하다. <모기장>(1956)에도 그 자유인이 등장한다. 조은정 미술사학자는 “작품 속 익명의 존재들이 미술사의 뒤안길에서 서성이고 있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화가를 호명한 것”이라면서 “공간을 박제하는 액자 너머에서 역사가 기억으로 소환된다. 역사에 문신된 사건을 조우하게 하는 인물화는 예술과 삶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통해 생의 비밀에 성큼 다가가게 하는 통로 같다”고 말했다. 





1980년대 이후 인물화 


1980년대 주류였던 ‘민중미술’에서 인물화는 중심이었다. 불의와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향하는 과정이었고 그 시대가 예술에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이상과 가치였다. 민중미술가들이 그린 인물은 순응형도 아니었고 관음적 대상의 인물도 아니었다. 억제 당해온 이념과 양식, 내용과 형식, 소재와 주제, 기법와 방법을 확장해 능동적 인간형을 표현했다. 

대표적 작가인 오윤은 선굵은 목판화 <애비>(1981), <할머니>(1983) 그리고 <비천>(1985) 등을 만들었다. 당시 여성작가들의 변혁도 눈에 크게 띄었다. 노원희의 <어머니>(1990), 김원숙의 <사랑의 춤>(2002), 정종미의 <보자기 부인>(2008)은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 세상을 살아낸 인간으로서의 여자를 연출해냈다. 남성들의 여성을 그리는 관점과 태도도 달라졌다. 박생광의 <여인과 민속>(1981), 이만익의 <정읍사>(1976), 손상기의 <공작도시-취녀>(1982), 김정헌의 <딸-혜림>(1984), 이종구의 <활목할머니>(1990), 홍성담의 <봉선화>(2014) 등이 그 예다. 그런가 하면 일하는 사람들을 그린 그림도 쏟아졌다. 신학철의 <이랴! 어서가자>(2016), <지게꾼>(2012)과 이종구의 <아버지와 소>(2012), 임옥상의 <보리밭>(1983), 황재형의 <광부>(1980년대)는 모두 삶의 터전에서 노동한 사람들을 묘사했다. 심미주의에서는 사람들이 평온하고 온순하게 묘사되나, 민중미술에서는 그런 조화와 균형이 깨진다. 산천은 평온하지만 그 속의 사람들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김홍주의 <무제(자화상)>(1979), 최민화의 <식사>(1992), 강요배의 <흙가슴>(1990), 류병엽의 <광화문의 아침>(1987~2009) 등은 우리 젊은 날의 초상 같다. 




최열 미술평론가는 “1980년대 이후 살아 숨쉬며 상처 나면 피가 흐르고 눈물짓는 사람, 기쁨에 웃음이 범벅되는 인간상이 처음으로 미술사의 전면을 장식했다”면서 “스스로 선택할 줄 아는 첫 사람, 스스로의 운명을 자신이 결정하는 최초의 인간상이 1980년대 이후에 등장했다”고 덧붙였다. 

현대화랑 박명자 회장과 도형태 대표는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민주화운동에서의 역사적 아픔을 겪고, 격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우리의 따뜻한 내면과 한민족의 정서, 삶을 살아가는 개개인의 애환, 가족의 사랑과 성을 표현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잔잔하면서도 깊은 감동을 남길 작품들로 전시를 구성했다”면서 “이번 전시가 한국 구상회화의 가치를 재발견해 한국 근현대미술의 중요성과 독창성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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