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순의 아트&컬처] 테라코타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온 한애규(65) 작가가 19일까지 서울 통의동 아트사이드 갤러리에서 ‘푸른 길’ 전시를 연다. 1980년대부터 꾸준히 흙을 재료로 작업하고 있는 작가는 일상에서 느끼는 여성, 여성의 삶과 존재에 대한 사유를 긍정적인 시선으로 표현해왔다. 40점을 내놓은 이번 전시에서는 평화를 염원하는 긴 행렬을 만나게 된다.
지하 1층 전시장을 들어서면 가슴 뭉클한 생명체를 보게 된다. 분명 생명이 없는 작품들인데 마치 살아있는 듯 바라보는 것 같다. 흙으로 빚은 인물상, 동물상, 반인반수(半人半獸), 그들에게 눈을 맞추며 한발 한발 조심스레 그 행렬에 발을 맞춰본다.
맨앞은 가슴과 배, 엉덩이까지 온몸이 둥글둥글한 여성, 그 뒤에 상체만 여성인 반인반수가 따르고, 말과 소, 그리고 다시 여인이 따른다. 하지만 작가는 꼭 필요한 한명의 남성을 잊지 않았다. 여자들이 흙색을 띤 채 둥글둥글하다면, 행렬의 맨 뒤를 지키는 청일점은 푸른 색을 띤 건장하면서도 직선적인 서역인 조형물로 배치했다.
이 행렬은 고대 인류 문명의 교류가 진행되었던 길, 그 길 위에 존재했던 시간과 역사의 흔적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테라코타 조각에는 푸른색 유약 표현이 눈에 띈다. 다양한 종류의 흙과 소성 온도의 조절로 고도의 농축된 조형성을 표현한다.
“여인상인 ‘조상’ 시리즈는 나의 조상이었던 여인을 상징한다. 북방민족을 표현하는 말은 ‘실크로드’, ‘소’는 인류에게 친숙한 동물을 나타낸다. 또 상체는 인간이고 가슴 아래부터 뒷부분은 말과 유사한 반인반수 조각은 ‘신화’ 시리즈다.”
1층 전시장에는 기둥 조각과 파편들을 표현한 작품 ‘흔적들’이 있다. 이는 지나간 문명의 흔적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현재는 폐허로 남았지만 찬란했던 한 시절의 이야기를 흔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의자 삼아 작품 위에 앉을 수도 있다.
이번 전시에서 보이는 ‘푸른색’ 유약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류 문명의 교류가 진행된 길, 그 길 위해 존재하는 ‘물의 흔적’을 상징한다.
작품은 ‘자아찾기’ 여정...‘페미니즘’에서 ‘반가사유상’ 거쳐 ‘조상’으로
전시 속 여인상들은 작가의 자아찾기 여정을 보여준다. 특히 풍만하고 당당한 이미지의 여인상이 작품의 중심이다.
“처음엔 페미니즘에 관심이 컸다. 80년대엔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여성의 생물학적 우수성을 도발적으로 표현했다면, 2000년대엔 사유하는 존재,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에 집중했다. 그리고 5~6년 전에는 ‘반가사유상’을 여성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사유와 철학이 남자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뜻를 담았다. 뚱뚱한 여자가 반가사유상의 모습을 띠고 있는 거다.”
작품 속 여성을 보니 작가의 DNA가 녹아있다. 무심한 듯 편안한 한국 여인네 얼굴이 보인다. 몸매는고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와 닮았다. 여인들 외에 반인반수와 동물까지 통통해 부드럽고 유려한 곡선미가 아름다운데다 따스한 흙의 색감과 질감에 마음까지 푸근하다. 이런 원시적 생명력을 띤 이들 행렬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남북 이어져, 길도 마음도 넓어지고 자유로워졌으면”
작가는 “한반도 분단으로 끊어진 북방으로의 길이 다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또 아주 자유롭게 먼 곳까지 왕래했던 과거 어느 시점을 그리워하면서 행렬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2년전 작품을 구상하고 만들 때는 남북의 화해 무드는 생각도 할 수 없었으나 전시가 임박해서 4·27 남북정상회담, 6·12 북미회담이 조성되면서 이제는 자신의 바람처럼 끊어진 기찻길이 이어지고, 막힌 길이 뚫릴 것 같다고 미소짓는다.
흙이 주는 촉감, 흙 냄새가 좋아서 테라코타 작업을 하고 있는 그는, 흙을 주무르다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일을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작업실 창유리의 색조가 바뀌어 있는데, 그런 시간 속에서 작가의 생각은 꿈처럼 뭉게뭉게 피어난다.
“처용을 떠올리면 신라때도 아랍과의 교류를 알수 있듯이, 우리 조상들은 고대에 중국 만주 너머 드넓은 세상과 교류하며 살았다. 분단되면서 통큰 대륙적 기질을 우리가 잃어버린 게 아닐까. 이제 길도 트고 우리의 본래 성정도 되찾아야 할 때란 생각이 든다.”
염원이 시류를 만들기도 하는가 보다. 독서와 사색으로 한반도가 드넓은 대륙으로 이어졌던 그 옛날을 그리워 하던 2년 전 어느날, 우연히 말 한 마리를 만들었단다. 그런데 한순간 말과 마차 사람의 행렬까지 이번 전시 전체가 확 떠올랐다고 한다. "하하하" 웃는 그는, 덕분에 요즘 의도치 않게 시류 타는 작가가 됐다고 손사레친다.
그의 바람대로 남북의 끊어진 길이 하루 빨리 이어져 만주 벌판을 말 타고 달릴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길 희망한다. 그래서 작가는 처용 같은 서역인도 만들고, 날개도 만들었나 보다. 정 안되면 날아서라도 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