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이종근 기자] 지난해 1월 발생한 사상 초유의 신용카드 고객정보 유출사태 장본인인 카드사들이 재판을 앞두고 사건 발생 당시와 180도 달라진 태도를 보이고 있다.
카드사들은 피해자들의 위임을 받은 변호사에게 소송 위임 사실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가 하면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는 증거도 내놓으라며 시간을 끌고 있다. 이 때문에 20만명이 참가한 카드정보유출 소송은 1년6개월이 넘도록 재판 한번 열리지 못하고 표류 중이다.
21일 금융권에 따르면 개인정보보호법 위반과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된 KB국민·롯데·농협카드 등 신용카드 3사에 대한 형사재판 공판준비기일이 오는 7월 1일 열린다.
공판준비기일이란 향후 재판이 효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미리 검찰과 변호인이 쟁점사항을 정리하고 증거조사방법을 논의하는 절차다.
본격적 재판도 아닌 재판준비 절차가 사건발생 1년 6개월이 지나서야 시작되는 셈이다.
변호인단은 변호사 선임과 증거 확보에 애를 먹고 있다. 이로 인해 2~3차례 변론만 열렸을 뿐 재판은 지지부진한 상태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대형사건의 재판이 이처럼 더디게 진행되는 것은 대형로펌을 고용한 카드사들의 고의성 짙은 지연전략 때문이라는 것이 금융당국의 시각이다.
우선 내달 1일 열리는 첫 공판준비기일 결정에 1년이상 걸린 것은 카드사들이 변호사에게 소송을 위임받았다는 증거를 보여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수만명에 달하는 소송참가자들이 일일이 입증자료를 모으느라 많은 시간이 소비됐다.
소송을 위임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카드사 홈페이지에서 개인정보유출 내용을 화면캡처하고 주민등록증 사본을 내야하는데, 컴퓨터 사용에 어려움을 겪는 고령자 등이 있어 이들의 증거자료 제출이 지연됐다.
변호인단은 재판부에 이 같은 어려움을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화면캡처를 모으는데만 1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공판준비기일은 당초 5월 27일로 예정됐다가 카드3사들이 연기를 요청해 한 달 넘게 미뤄졌다. 카드사들은 "변호인 일부를 기일에 임박해 선임해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금융당국은 이 과정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다. 사건 발생 당시 카드사들이 정보유출 내역을 일일이 파악해 개인별 통보까지 했던 만큼 마음만 먹으면 며칠내로 자료를 확인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본인들(카드사들)이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며 "시간끌기라고 볼 수 밖에 없다"고 잘라 말했다.
지난해 정보유출 사건 발생당시 카드사들은 피해를 입은 고객들에 관한 자료를 수일만에 확보한바 있다. 카드사들은 정보가 유출된 고객수가 KB국민카드 4,320만명, NH농협카드 2,165만명, 롯데카드 1,760만명 등 총 8245만명에 달한다고 스스로 공개했다.
카드사들은 이들에 관한 자료를 홈페이지에 게시한 것은 물론 당사자에게도 일일이 통보했다.
쟁점사안 중 하나인 정신적 피해보상은 말 바꾸기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카드 3사는 지난해 1월 코리아나 호텔에서 '대국민 사과'를 발표할 당시 "정신적 피해보상을 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금전적 피해가 없더라도 스팸문자나 피싱 범죄에 노출되는 고객에게 정신적인 피해보상을 검토할 의향이 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막상 법적 공방이 시작되자 카드사들은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는 증거를 대라고 요구하고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정신적 피해를 증명하는 것이 소송의 쟁점 가운데 하나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면서 "카드사들의 요구는 어불성설에 가깝다는 것이 당국의 시각"이라고 전했다.
금감원은 진행중인 소송에 개입할 수는 없지만 경과를 계속 지켜보며 필요할 경우 대책을 검토한다는 입장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카드정보유출 피해자 소송 과정을 꾸준히 모니터링하고 있다"면서 "소비자 피해가 발생하는 등 감독당국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대응방안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