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사뉴스 홍경의 기자] 한국학중앙연구원은 한국 양명학의 전개와 특수성을 기존 철학사 중심의 틀을 넘어 사상사적 시각에서 조명한 학술교양서 『양명학(陽明學)』(한정길 지음)을 발간했다. 이 책은 한국 사상가의 궤적과 철학적 개념을 탐구하여 우리 안에 잠재한 사유와 문화의 근원을 이해하기 위해 기획한 <사유의 한국사> 교양총서의 여섯 번째 권이다.
한국 양명학, 시대를 읽고 세상을 밝히는 등불
양명학은 15~16세기에 형성되어 동아시아인들의 의식과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철학이다. 그러나 한국, 중국, 일본 삼국에서 양명학은 각국의 정치 문화와 학술 상황의 특수성으로 인해 다른 양상을 보인다. 중국에서는 명대 사상의 주류로, 일본에서는 국민도덕학으로 기능했던 반면, 한국에서는 주자학자들의 비판 속에서 수용되고 특화되었다. 따라서 한국 양명학의 전개와 특수성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비교 연구가 필수적이며, 동아시아 내에서 한국 양명학의 의의를 탐구할 필요가 있다.
총 11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한국 양명학 연구의 기존 철학사적 관점과 윤남한(1922~1979, 역사학자)이 제시한 사상사적 관점을 비교하며 시작한다. 철학사적 관점은 양명학적 사유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지만, 한국의 독특한 사상 토양에서 전개되는 양상을 포착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반면 사상사적 관점은 주자학과 양명학의 동질성 및 연계성을 중시하며, 한국 사상사라는 큰 틀에서 양명학의 전래, 수용, 배척 과정 및 다른 사상들과의 상호 영향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데 유용하다. 따라서 이 책은 철학사적 관점을 계승하여 양명학의 본질적 특성을 규명하고 범위를 확장하는 동시에,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사상사적 관점의 연구 비중을 높여 한국 양명학의 전개 과정을 폭넓게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한국 양명학 연구에서 양명학 수용 여부를 판별하는 기준의 모호성을 지적하며, 양명학의 특성을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이유를 논한다. 이는 왕수인 학문의 다양한 이론 중 본질을 파악하기 어려운 점, 그리고 양명학이라는 학문 개념이 지칭하는 대상의 모호성에서 기인한다. 양명학의 핵심적인 학문적 특성으로는 ‘마음[心]’을 중심으로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점, 양지(良知)를 마음의 본체로 간주하는 점, 마음공부만으로 성인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점, 성인상에 변화가 일어난 점, 그리고 경세 방면에 새로운 변혁을 일으켰다는 점을 제시한다. 특히 ‘각민행도(覺民行道)’의 방법을 통해 군주가 아닌 백성을 직접 깨우쳐 왕도를 행하는 민학(民學)으로 전개된 점을 혁명적인 변혁으로 평가한다.
이 책에서 주목할 부분은 조선의 양명학 수용과 비판에 작용한 정치적·학술적 배경을 철학과 시대적 상황을 교차해 입체적으로 분석했다는 점이다. 먼저 조선에 양명학이 비교적 일찍 전래되었음에도 이단으로 배척된 배경을 정치문화와 학술 두 측면에서 분석한다. 조선 성리학의 심학화 현상이 양명학 수용의 학술적 토대가 되기도 했으나, 주자학의 관학화와 ‘경(敬)’을 중시하는 주자학 심학의 경향이 양명학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특히 이황과 그 문인들의 양명학 비판이 조선학계에 강하게 자리 잡아 양명학이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언급하며, 조선 양명학이 이러한 비판을 주체적으로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음을 한국 양명학의 고유한 특징으로 강조한다.
혼란의 시대, 백성을 깨우쳐 세상을 구하려는 각민행도(覺民行道)의 정신, 한국 양명학이 이 시대에 전하는 강력한 메시지
한국 양명학은 조선 성리학, 실학, 서학, 근대 개화사상 등 다른 사상들과 만나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현실적으로 직면한 시대적·학술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특히 성리학자들의 비판을 극복하고 양명학을 옹호하기 위해 양명학의 주요 개념과 이론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 양명학의 경학적 근거를 확보하고자 했다. 또한 조선 성리학이 양명학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양명학으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기에 한국 양명학의 사상사적 역할 또한 적지 않다.
이 책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저자가 ‘마음공부’와 ‘경세사상’이라는 두 측면에서 한국 양명학의 사유 구조를 심층 분석했다는 것이다. 유학이 자기완성(내성)과 타자완성(외왕)을 추구하듯이, 양명학 또한 ‘내성외왕’의 이상을 지니고 이를 실현하는 방법을 탐구했다. 조선의 양명학자들 또한 양명학이 마음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차원에서 이를 수용했으며, 명명덕과 친민, 수기와 치인, 자기완성과 타자완성을 분리시키지 않는 양명학의 특성으로 인해 세상을 구제하는 경세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동아시아의 근현대사에서 양명학이 시대의 난제를 돌파하는 사상으로 기능했음을 저자는 다양한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특히 한국에서는 박은식, 이건방, 정인보 등 일군의 지성인들이 양명학을 통해 유교를 개혁하고 민심을 일깨워 국권 회복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했음을 강조한다. 또한 현재 우리가 직면한 현실 문제, 즉 신자유주의의 문제점, 이성 중심주의의 문제점, 개인과 집단 간의 갈등 등을 양명학적 관점에서 진단하고 극복 방안을 찾아야 함을 제언한다.
『양명학』 기획과 필자 선정, 그리고 3년의 집필
『양명학』은 발간까지 4년여가 걸렸다. 이 책은 <사유의 한국사> 시리즈 중 하나로 기획되었는데, 짧은 호흡의 단편적 연구가 아닌 깊이 있는 통찰을 얻기 위해 한 가지 주제를 한 명의 연구자가 일관되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3년간 집필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저자는 학계 동향 조사와 편찬위원회 검토를 통해 주제에 가장 적합한 연구자로 선정되었고, 한국 사상의 정통적인 측면과 새로운 시각이 모두 반영될 수 있도록 했다. 인물의 사상과 개념의 통찰이라는 두 축을 빈틈없이 엮어 기존 연구 성과를 망라하여 내용을 담았으며, 특정 이론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관점을 객관적으로 서술하여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했다.
이 책의 저자인 한정길은 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인 양명학 연구자다.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은 후,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연구교수, 한국양명학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며 학술적 역량을 쌓아왔다. 저자는 조선시대 경학과 동아시아 양명학을 중심으로 사상사의 흐름을 탐구해 왔으며, 조선 지식인들이 양명학을 수용하고 변용해나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조명해왔다. 『동양고전 속의 삶과 죽음』, 『동서사상의 회통』, 『양명학연론 역해』, 『조선 경학의 문화다원론적 심화와 대안』 등의 저서를 통해, 조선 사상사의 주체성과 실천성을 부각시키는 연구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한국 양명학을 처음 접하는 이들을 위해 쉽고 체계적으로 풀어낸 입문서. 철학사를 넘어 사상사적 관점에서 양명학을 조명하고 현대적 의미까지 통찰하는 필독서
이 책은 양명학을 단순한 철학의 틀에 가두지 않고, 마음을 통해 개인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실천적 지혜로서 조명한다. 한국적 특수성과 보편성을 함께 아우르며, 정제두에서 박은식에 이르는 한국 양명학의 흐름을 한눈에 조망하고, 『대학』의 경전 해설에서 근대 계몽운동에 이르기까지 그 사상을 생생하게 되살린다. 이를 통해 한국 양명학이 단지 사유의 체계가 아니라, 내면의 힘을 일깨우고 세상을 바꾸는 통찰로 작용한 실천 철학임을 깨달을 수 있다. 나아가 ‘마음’을 통해 인간과 우주를 이해하고, ‘양지’의 자각으로 새로운 삶의 길을 모색하며, ‘각민행도’의 정신으로 백성을 깨우고 세상을 밝히고자 했던 깊은 사상적 울림에 다가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