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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화순의 아트&컬처] 김창열 다시보기, 물방울이 문자와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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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현대 50주년 기념 전시, 29일까지 개최
정체성 찾던 시절 운명적으로 만난 '물방울'
어린시절 추억과 동양으로 '회귀'가 낳은 작품

 

작가가 40년 이상 한 모티브로 작업을 계속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일지 궁금하다면 이 전시를 추천한다.   

김창열(91) 화백이 48년간 지속해온 물방울과 문자 그림을 모은 개인전 <The Path(더 패스)>전. 1976년 파리에서 활동하던 김 화백의 첫 국내전시를 연 갤러리현대가 창립 50주년 기념 전시로 마련한 전시다.  29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가 14회째다. 

 

이 전시는 명작이 탄생하기까지 작가가 수행하듯 쏟은 끊임없는 노력과 그 과정을 보여준다. 다만 이번에는 '물방울'을 돋보이게 해준 ‘문자’에도 초점을 맞춘 것이 전시 기획의 의도이다. 30점의 작품이 걸렸다.

 

‘물방울’ 그림이 탄생하게 된 동기는 우연이었다. 파리 외곽의 마굿간에서 생활하던 가난한 예술가는 1971년의 어느날, 밤새 그린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 유화 색체를 떼어내고 재활용하기 위해 캔버스 뒤에 물을 뿌려 놓았다. 그런데 캔버스를 뚫고 올라온 물방울이 아침 햇살을 받으며 밝게 빛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물방울을 만나면서 존재의 충일감에 온몸을 떨었습니다."

김창열 화백은 운명적으로 물방울을 만난 후 이렇게 소회를 밝혔다. 그렇게 시작된 물방울에 감동받아 깜깜한 밤하늘에 영롱하게 빛나는 단 하나의 물방울을 그린 작품이 1972년 파리 화단에서 큰 화제를 뿌렸던 작품 ‘밤의 사건’이다. 자신의 예술가 인생을 단번에 바꿔놓는 ‘물방울’과의 만남에 대해 그는 ‘한밤의 사건’이란 제목을 단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물방울 그림을 통해 그는 부와 명예를 다 거머쥐는 작가로 거듭났다. 

 

김창열 화백은 해방과 좌우익 이데올로기 대립, 분단, 6·25전쟁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체험하면서 수차례 사선(死線)을 넘었던 세대다.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생명이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고향 평안남도 맹산을 떠나 서울로 왔다. 한국 근대화단을 이끈 이쾌대(1913~1965)가 운영하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공부를 했다.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지만, 월북작가 이쾌대의 제자라는 이유로 학업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첫결혼의 실패 등 우여곡절 끝에 1969년 낯선 파리에 정착했다. 김환기, 백남준, 문신, 박서보, 정상화 등 당대의 거장들과 교류했다.

 

하지만 파리에서의 생활은 힘들었다. 당시만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가난한 예술가였다. 성공이 절실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 소중한 이들과의 이별, 작가로서의 고뇌로 점철된 시간들을 보냈을 것이다.

 

김 화백은 “물방울을 그리는 행위는 모든 것을 물방울 속에 용해시키고 투명하게 무(無)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행위이다”라고 말했다. 또 “타국에서 작가로 산다는 것은 서양과 다른 나 자신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한 방울의 ‘물방울’이었다”고 밝혔다.

 

물방울은 불교의 공(空)과 도교의 무(無)와도 통하는 것이었다. 또 물방울 그림을 그리는 것은 일종의 죽은 이들의 넋을 기리는 행위였고 그들의 영혼을 보호하기 위한 정화의식이었던 셈이다.

 

실제로 그에게 6·25의 상흔은 작지 않았다. 전쟁 중에 중학교 동창 120명 중 60명이 죽었고 그 상흔을 총알 맞은 살갗의 구멍이라고 생각하고 물방울을 그렸다고 했다.

 

 

문자의 등장

 

하지만 별은 혼자 빛나지 않는다. 환한 낮이 아닌 캄캄한 밤하늘이 필요하다. 물방울도 마찬가지. 김 화백은 물방울을 완벽하게 담아낼 ‘지지체’를 찾기 위해 제작 기법을 끊임없이 변주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물방울이 문자와 최초로 결합한 1975년작 ‘휘가로지’가 제작됐다.

 

캔버스 마대, 신문지, 모래, 나무판 등 다양한 재료가 지지체로 활용됐다. 한자가 등장한 것은 1980년대말 ‘회귀’ 시리즈부터는 한자(漢字)를 그린 캔버스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지지대의 변화에 따라 물방울은 ‘천의 얼굴’로 나타났다. 나혼자 당당히 빛나는가 하면, 가족처럼 옹기종기 모여 방울방울 매달려 있기도 하고, 탁 터졌거나, 터져서 흐르다 얼어붙기도 했다.

 

 

 

“물방울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거칠거칠한 캔버스, 목판, 모래, 흙과 같이 즉각적으로 물질성을 보여주는 표면 위에서 직접 작업하곤 했다. 하지만, 화면이 커짐에 따라 캔버스는 물질성을 상실했다. 그 자리를 공허감이 대신했다.”(김창열, 2003)

 

이 한자들은 고향에서 명필로 통했던 조부에게 사랑받으며 배웠던 천자문에서 온 것이다. ‘회귀’라는 작품 제목이 알려주듯이 김 화백이 어린 시절 쓰고 그리며 놀았던 천자문을 수행하듯이 때론 단정한 해서체로, 때로는 서예의 자유로운 운필과 회화적 요소가 강조되는 초서체로 겹쳐서 수없이 쓰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에는 ‘해체’ 연작을 통해 온전한 글자가 해체되어 의미 없는 기본 획이나 캔버스에 스민 물감 자국과 같은 문자의 흔적들이 화면에 등장한다. 한자는 작품 전체를 가득 채우기도 하고, 넓은 여백과 함께 화면 구석이나 주변에 자리잡는다.

 

 

작가는 ‘회귀’ 연작에서 날짜, 계절, 시간, 농사, 전쟁 등 문명의 근본과 세상의 이치가 담긴 천자문을 깨치던 배움의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유년의 깨끗한 마음으로 ‘참’을 추구하고, 창작을 통해 ‘진리’를 전달하며, 자연의 흐름을 따르겠다는 작가적 의지를 녹여냈다.

 

 

환갑을 지나면서 작가는 천자문을 쓰거나 그리고, 문자 주변에 물방울을 정교하게 배치해 그리는 ‘돌아간다’는 의미의 '회귀'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회귀'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작가는 “‘하나는 유년시절로 돌아간다. 또 하나는 동양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밝혔다.

 

전시 작품은 1층 ‘문자와 물방울과의 만남’, 지하의 ‘수양과 회귀’, 2층의 ‘성찰과 확장’으로 구성됐다.

 

전시장 1층에는 물방울이 문자와 최초로 결합한 1975년작 ‘휘가로지’가 걸려있다. 프랑스 신문 ‘휘가로(Le Figaro)’ 1면에 수채 물감으로 물방울을 그린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캔버스에 환영으로만 존재하던 물방울을 현실 세계의 장소에 새롭게 안착시킨다. 그 옆으로 자리를 옮기면 붓글씨 한 획에 물방울 몇점이 그룹을 이루듯 포진한 작품을 보게 되고, 또다른 벽면에는 8폭 병풍 위에 큰 붓으로 내려 그은 세로의 먹선과 그 아래 영롱한 물방울이 조화를 이룬 ‘회귀’ 작품도 보게 된다.

 

 

지하의 작품들에서 천자문과 물방울 모두가 반듯하고 단정하게 존재한다면, 먹과 한지를 소재로 한 2층의 작품들은 수차례, 겹겹이 중첩되고 교차되며 서로에게 스며들어 또 다른 세계를 구축한다. 수차례의 중첩에도 수채화를 보듯 투명한 색과 이미지 그리고 문자들은 천자문, 고시들이 지닌 깊은 뜻과 진리에 작가의 사색을 덧칠해, 또 다른 세계로 확장된다. 그 세계는 작품을 보는 관람객들이 찾아낸 또 다른 사색과 진리, 깨달음이 덧칠되면서 더 큰 확장으로 이어진다.

 

 

한편 전시명이 ‘길’이란 뜻의 ‘Path’로 지어진 것은 작가가 평생 수행하듯 추구한 물방울과 문자의 만남, 철학적 주제 의식에 주목해달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한편 김창열 화백의 서울 평창동 집도 ‘구립미술관’이 될 예정이다. 지난 9월 23일 김 화백은 가나아트센터에서 가족이 참석한 가운데 종로구와 구립미술관 건립 업무협약을 맺었다.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은 2016년 제주시 한림읍에 개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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