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강신철 기자]'이태원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미국인 아더 존 패터슨(36)에 대한 첫 정식 공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에드워드 리(36)가 "패터슨이 흉기로 피해자를 찌르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다.
리는 4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부장판사 심규홍) 심리로 열린 패터슨에 대한 살인 혐의 1차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리에 대한 증인 신문은 이날 오후 2시부터 시작해 장장 8시간 30분 가량 진행됐다. 남색 정장 차림으로 법정에 모습을 들어낸 리는 시종일관 "패터슨이 살인범"이라고 지목했고, 패터슨은 그런 리를 뚫어지게 쳐다보거나 직접 설전을 벌이면서 결백을 주장했다.
◆리, “패터슨이 흉기로 피해자를 찌르는 모습 목격”
증인신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후 검찰은 리에게 "패터슨에게 '멋있는 것을 보여줄테니 화장실로 따라오라(I'm going to show you something cool, come in bathroom with me)'라고 말한 바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리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전혀 없다"고 부인했다.
리는 "사건 당시 화장실에서 세면기를 이용해 손을 씻고 있었다"며 "손을 씻고 있는 와중 패터슨이 화장실로 들어와 대변기 칸을 살피는 것을 거울을 통해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리는 이어 "대변기 칸을 살핀 패터슨은 갑자기 소변을 보고 있던 피해자 조모(사망·당시 22세)씨를 흉기로 찔렀다"며 "너무 놀라 돌아섰는데, 패터슨이 계속해서 흉기로 피해자를 찌르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리는 증인석에서 일어나 당시 흉기에 찔린 피해자의 행동을 직접 재연하기도 했다. 리는 두 손으로 목을 잡고 무릎을 살짝 굽히며 "(이 모습이) 목격한 피해자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리는 그러면서 "패터슨은 범행 직후 화장실을 나섰다"며 "이 과정에서 (본인과) 살짝 부딪히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리, 패터슨과 공범 檢 공소사실 전면 부인
그는 또 자신이 패터슨과 공범이라는 검찰의 공소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리는 "당시 패터슨과 범행을 공모하지 않았고, 패터슨이 단독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리에게 진술조서를 제시하며 "이같은 내용으로 진술조서 내용을 확인한 뒤 서명, 날인하지 않았는가"라고 말하자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짧게 답했다.
리는 오히려 "당시 검찰 수사는 상당히 강압적이라고 느꼈었다"라며 "잠도 재우지 않고, 소리를 질러가는 등 대답을 강요했다"고 주장했다.
패터슨 측 변호인이 "범행을 인정하지 않고 거짓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묻자 리는 "조씨를 살해하지 않았다"고 거듭 목소리를 높였다.
변호인이 "당시 부친이 지인들에게 증언을 잘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사실은 인정하는가"라고 묻자, 리는 "지인들은 미군부대서 거주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는)들어갈 권한이 없어 (지인들과)접촉조차 하지 못했다"라고 부인했다.
리는 오히려 "지인들은 미군범죄수사대(CID)에서 '패터슨이 범인이다'라고 진술했다"며 "검찰 수사 과정에서 진술이 번복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리-패터슨, 당초 증인 진술 놓고 법정서 직접 설전
리에 대한 증인신문이 진행되는 도중 패터슨이 직접 리에게 직접 질문을 하기도 했다. 패터슨과 리의 지인이 진술한 내용을 두고 양측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였기 때문이다. 지인 A씨는 "리가 패터슨에게 '멋있는 것을 보여줄테니 화장실로 따라오라'고 말했다"라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진다.
과거 검찰 수사 당시 A씨의 이 같은 진술로 인해 리가 살인범으로 지목된 바 있다. 하지만 이후 재판이 시작되자 A씨는 법정에서 "리가 패터슨에게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당초 진술을 번복했다.
이에 대해 리는 "A씨는 그같은 내용의 진술을 (검찰에서) 하지 않았다고 법정에서 증언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패터슨은 "A씨가 진술을 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특정할 수 없지만 둘 중 한 사람이 화장실로 따라오라고 했다는 의미로 법정에서 증언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러자 리는 "사건 이후 A씨는 패터슨의 아버지가 (리가 그렇게 말했다는 취지의)대답을 부탁했었다며 미안하다고 말했다"며 "A씨가 진심으로 사과하기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고 맞섰다.
◆리-패터슨, 당시 범행 현장 직접 재연…엇갈린 진술
리와 패터슨은 법정에서 직접 당시 사건 현장을 재연하기도 했다. 검찰이 리에게 "피해자와의 거리가 1m20㎝ 이내인가"라고 묻자, 리는 "정확한 거리를 특정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그러자 검찰은 "당시 어느 정도 거리였는지 표현해봐라"라고 말했고, 리는 증인석에서 일어서 직접 당시 상황을 재연했다. 이 과정에서 검사들이 피해자와 피고인(패터슨) 역할을 맡기도 했다.
리는 "당시 손을 씻는 도중, 거울을 통해 패터슨이 피해자를 공격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패터슨도 직접 당시 상황을 재연했다. 패터슨은 "피해자가 화장실에서 떠나면 리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리라 기대하며 세면대 쪽에 서 있었다"며 "리가 갑자기 피해자를 공격해 매우 놀랐다"고 반박했다.
◆리 "진실을 말하라" vs 패터슨 "리 진술 바꿔"
리는 증인신문 말미에서 "증언을 하러 법정에 온 이유는 피해자 가족을 도와 그들의 평화를 찾도록 하기 위해서다"라며 "또한 명예를 되찾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리는 이어 "패터슨의 변호인은 언론을 이용해 (리가) 진범이라고 말하고 있다"며 "집을 나서는 것마저 두려울 정도"라고 재판부에 호소했다.
리는 그러면서 패터슨을 향해 직접 "진실을 말하라"고 쏘아부쳤다. 이에 패터슨도 "리는 본인의 범행을 숨기기 위해 계속해서 진술을 바꾸고 있다"며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패터슨은 이어 "리는 당시 범행을 저지른 뒤 (패터슨이) 진범이라고 소문을 냈다"며 "이로 인해 당시 미군범죄수사대는 선입견을 가지고 수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패터슨은 또 "리는 많은 질문에 대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고만 답했다"며 "(증언 방법에 대해)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피해자 부검 담당 증인신문은 다음 기일에 진행
재판부는 리에 대한 증인신문이 길어지자 당시 피해자 조모(사망·당시 22세)씨의 부검을 맡았던 이모씨에 대한 증인 신문은 향후 기일에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이 사건 재판에서 검찰과 변호인 양측이 신청한 증인은 리를 포함해 총 31명에 달한다. 신청된 증인들 중에는 리와 패터슨의 지인, 혈흔 형태 분석가, 도검 전문가 등이 포함돼 있다.
이 사건 쟁점은 사건 당시 함께 있었던 한국계 미국인 리가 범인이라는 패터슨의 주장이 인정되는지, 검찰이 재판부에 제시한 증거가 받아들여지는지, 일사부재리 원칙이 인정되는지 여부 등이다.
패터슨은 1997년 4월3일 오후 10시께 서울 이태원 소재 한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한국계 미국인 리와 함께 대학생 조씨를 흉기로 수차례 찔러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됐다.
패터슨은 지난 9월23일 송환된 이후부터 법정에 서기까지 줄곧 "범인은 (에드워드)리"라며 혐의를 부인했다.
검찰은 지난 2011년 '이태원 살인사건' 수사 및 기소를 맡았던 박철완 부장검사(43·사법연수원 27기)를 공소유지를 맡은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부장검사 이철희)와 함께 재판에 투입하는 등 혐의 입증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