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송경호 기자] “일단 마음 먹었으니까 끝까지 해봐야죠. 흔한 말로 칼을 꺼냈으면 무라도 베라고 하잖아요. 저도 그래요. 제가 어떤 영화를 만들게 될지 아직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영화가 정말 재밌어요. 그리고 점점 재밌어져요.”
앳되고 순한 얼굴의 박규택(32) 감독은 인터뷰 내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제 막 시작한 영화감독 생활, 그는 어느 분야의 신인들이나 그렇듯 신중하고 겸손했다. 하지만 영화에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면 분위기가 달라졌다.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있지만 정확한 단어를 사용해 핵심을 말하려는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그는 ‘터널3D’로 데뷔했다. 이 영화는 8월20일 개봉했지만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흥행 성적은 참담하다. 전국에서 7만8000여 명이 봤을 뿐이다. 영화 자체에 대한 평도 그리 좋지만은 않다. 단순비교를 하는 데는 무리가 있지만 1700만명이 보는 영화도 있지 않은가. 박규택 감독이라고 왜 아쉬움이 없었을까. 그의 말과 표정에는 '더 잘 할 수있었는데…'하는 감정이 묻어났다.
사실 기획 영화의 감독에게는 큰 권한이 없다. 시나리오는 이미 개발돼 있고 예산은 정해져 있으며 촬영 시간도 넉넉하지 않다. 감독의 연출에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다. ‘터널3D’도 그랬다. 공포영화에 필수인 특수분장팀도 없었고 촬영 22회차 안에 영화를 완성해야 했다. 하지만 박 감독은 “내키는대로 장편 데뷔작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며 웃어넘겼다.
“중요한 건 그 제약 안에서 좋은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는 겁니다. 주변 상황을 탓하자면 끝도 없어요. 모든 것을 통제하면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감독이 얼마나 있겠어요. 그리고 전 이제 겨우 데뷔한 신인감독인데요. 베테랑 감독들도 투자사와 배급사의 압력을 받잖아요. 그래서 제 자신에게 항상 말해요. '받아들여야 한다'고요.”
하지만 어떤 감독은 평단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데뷔하기도 한다. 그렇게 주목받은 영화감독은 자신의 영화세계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봉준호가 그랬고, 허진호가 그랬으며, 최동훈이 그랬고, 윤종빈이 그랬다. 박규택 감독에게 그런 욕심은 없었던 것일까. 자신이 쓰지 않은 시나리오로 제작사의 입김 속에 이뤄지는 연출을 받아들인 건 너무 가벼운 결정이 아니었을까.
박 감독은 "모든 영화감독은 ‘플란다스의 개’를 꿈꾸고 ‘8월의 크리스마스’를 꿈꾼다”며 웃었다. ‘플란다스의 개’는 봉준호 감독의 데뷔작이고 ‘8월의 크리스마스’는 허진호 감독의 데뷔작이다. 그는 “나라고 왜 그런 생각이 없었겠냐”며 “영화감독이 되는 길에는 한 가지 길만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짚었다. “장편영화 데뷔가 하늘에 별따기만큼 어려운 상황에서 충격적인 데뷔작을 만들어서 데뷔하겠다는 다짐은 허황돼 보인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충격적인 데뷔작’, 물론 이렇게 했으면 좋겠죠. 저는 데뷔를 한 상태이지만 그런 생각을 가끔 하기도 해요.(웃음) 그런데 예전에 봉준호 감독님의 특강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 제 생각이 조금 달라졌어요. 꾸준히 쉬지 않고 영화를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말씀이었는데 저한테는 굉장히 현실적인 말처럼 들렸던 겁니다.”
박규택 감독은 영화를 좋아했지만 영화와 관련 없는 학과를 졸업했고(동국대 불교학과를 나왔다), 군대에 다녀와서야 영화에 뛰어들었다. 3D영화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3D를 공부하던 중 우연히 영화 프로듀서를 만나 '터널3D'의 감독이 됐다. 대단한 작품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고 그저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박 감독이다. 그 과정이 그에게 기회를 줬다. 그는 그의 말 그대로 장편영화 데뷔를 했다.
그는 “생계형 감독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영화를 만들어 먹고 살 수 있는 감독이 되고 싶다는 의미다. 어떤 것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는 “이제 시작이다”며 웃어보였다. “노력해야죠. 공부하고 있어요. 매일 저 나름대로 작업을 합니다. 다음 번에는 제가 시나리오를 쓴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저의 세계가 담긴 영화요. 그게 가능했으면 좋겠어요.”
박규택 감독은 “SF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만들고 싶은 SF영화는 ‘스타워즈’가 아니었다. ‘그녀’나 ‘더 문’ 같은 영화였다. 그는 여전히 현실에 발을 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