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오병욱 칼럼니스트] 오늘은 고령산 수리봉(520m)이다.
고령산은 보광사로 해서 오르는 앵무봉(622m)만 알고 있었는데, 얼마 전 집사람이 동네 친구들과 다녀온 꾀꼬리봉을 이야기하며 한적하고 참 좋더라고 하여 찾아보니, 의외로 양주시의 넓은 면적을 차지하며 수리봉, 장군봉, 꾀꼬리봉, 첼봉 등을 포용하고 있는 양주의 대표적인 산이다.
집사람의 추천도 있고 하여 일요일 늦은 아침을 먹고 차를 몰아 장흥 유원지에서 오르는 말머리 고개로 간다. 북한산 북쪽에는 유명한 송추 계곡과 장흥 유원지가 있으며 장흥 유원지에서 말머리 고개 쪽으로 오르면, 고개 위에 옛 유스호스텔 건물이 있었는데 현재는 모 제과 그룹의 연수원으로 바뀌어 있다.
연수원 근처의 빈터에 차를 세우고, 집사람이 다녀온 오른쪽의 꾀꼬리봉 반대편의 연수원 뒷길로 들어서니 고령산 등산 안내도가 나오며 안내도를 따르면 보광사가 있는 앵무봉까지 등산로가 이어져 있다.
오늘은 다녀온 앵무봉을 피해 수리봉을 목표로 가벼운 산행을 시작한다. 9월 초의 숲은 아직 덥고 초록이 짙게 우거져 있지만, 바닥에는 도토리가 지천으로 떨어져 있다.
계절은 벌써 가을걷이를 시작하는 듯하다. 들머리를 어느 정도 고도가 있는 말머리 고개에서 시작해서인지 산은 초보 등산객도 즐길 수 있을 정도의 오르내림에 호젓한 산길의 여유를 즐길 수 있다. 장군봉으로 가는 갈림길도 지나고 몇 번의 오르내림 후에 한 시간여의 산행에서 마주한 곳은 기산 보루 성이다.
기산 보루 성은 해발 530m 높이의 산마루에 축조된 산성으로 양주시에 산재한 보루 성(돌이나 흙으로 쌓은 진지) 중의 하나다. 양주시에 28개의 보루 성이 있다고 하는데, 축성연대는 알 수 없고 신라 시대 때 축조된 것으로 추측한다고 한다.
남쪽으로 13m 정도와 북쪽으로 4m 길이의 성벽이 남아 있고, 성안에 웅덩이가 남아 있다. 이곳이 봉수대(봉화대)로 쓰였을 것이라 추정된다고 하여 봉수대 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곳에서 바라보이는 남쪽의 북한산, 도봉산 사패산은 시원한 경관을 선사하고 있다.
그러나 보루 성을 안내하는 안내판은 빛에 바래고 거북등처럼 갈라져 글을 읽기가 힘들다. 그래도 “산은 우리를 반기고 역사는 진행됩니다”는 문구가 신선하다.
우리가 살아있는 곳곳이 과거와 연결되어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역사가 진행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새로운 무언가가 발견된듯한 느낌에 빠진다. 이것은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이것을 눈뜸이라고 한다면 마치 눈먼 사람이 눈뜨는 기적 같은 것은 아닐까.
다시 길을 진행하는 숲길은 호젓하다. 산새와 바람 소리를 벗 삼아 가는 길에는 말로 할 수 없는 수많은 언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듯하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열면 자연이 들려주는 말이 들려오고, 마음을 열기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게 된다.
이런 것이 바로 공감이라는 것이 아닐까. 육체적 눈이 먼 것보다 심각한 것은 마음의 눈이 먼 것이다. 마음의 눈을 뜨면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보게 된다.
사회생활을 하며 경쟁의 대열에서 뒤쳐지면 실패자가 된다는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가설을 진실처럼 믿고 힘겹게 살아왔지만, 작은 꽃 한 송이가 어떻게 피어났는지를 상상하고, 나도 꽃처럼 어려움을 이기고 꽃피우리라는 마음, 그것이 공감이 아닐까 한다. 미래의 시대는 많은 것을 공감하는 공감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
스스로 낮아짐으로 높아지는 아름다움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어서 많은 사람이 낮아짐으로써 높아지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도 공감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는 것이리라.
앵무봉을 2㎞쯤 남긴 지점에 수리봉으로 갈라진다는 이정표가 서 있다. 앵무봉은 많이 올라가 보았으니 오늘은 수리봉 쪽으로 방향을 튼다. 또 한고비의 오르내림을 맛본 후에야 수리봉의 표지석을 만난다.
수리봉에서 바라보는 남쪽의 전경은 북한산 삼각봉과 도봉산, 사패산 등이 멀리 보이고 발아래로는 장흥 계곡의 여러 건물이 훤히 보인다.
수리봉 한옆에는 벤치도 마련되어 그곳에 앉아 장흥 계곡을 바라보며 한참을 상념에 젖어본다. 산은 이렇듯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어 숨 쉬고 있는데 저 발아래 세상에는 코로나 19로 점점 각박한 마음만 흐르고 있다.
현재 유행하는 코로나 19는 일설에 의하면 박쥐의 바이러스가 천산갑을 거쳐, 중국에서 천산갑의 비늘을 뽑다가 그 체액에 들어있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중국의 한 시장에서 전파되었다는 시나리오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천산갑의 바이러스와 코로나의 염기서열을 분석해 보면 그 서열이 99% 이상 일치한다고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천산갑 비늘을 갈아먹으면 종기가 가라앉고 혈액순환에 좋다고 한다. 천산갑 비늘의 화학성분은 우리의 머리털, 손발톱과 같은 각질 단백질 케라틴이다. 딱히 약재로 쓰일만한 것이 없어 보이는데 어쩌다가 이 천산갑 비늘이 정력에 좋다는 소문이 나돌아 중국에서는 밀수한 천산갑 비늘이 수십 톤에 달한다 한다. 근거 없는 믿음이 불러온 것이 이번의 바이러스 사태라 생각하니 어이없기 한이 없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앉아 있다가 다시 돌아 나오는 길도 호젓하긴 한가지다. 산에서는 같은 길을 걷고 같은 꽃을 보지만 자연은 늘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나를 맞이한다. 들어올 때 느낌 다르고 나갈 때 느낌 다르다.
오늘의 아름다움은 작년의 아름다움과 또 다르다. 아름다움은 해마다 더욱 깊어진다. 변하더라도 아름답게 변한다. 인간은 해가 바뀌면 그만큼 늙고 청춘의 아름다움을 점점 잃어 가지만 자연은 고목처럼 늙어가면서 점점 여유로워지고 늘 새롭게 태어나는 듯하다.
어느덧 다시 돌아온 들머리의 초입 언덕에서 말머리 고개의 건너편을 바라보니 기산 저수지가 보이고 저수지 위쪽에 조그만 한옥 지붕이 보인다. 말로만 듣던 허경영의 하늘궁이다. 허경영이라는 사람의 말과 기행에 얼마나 진실이 들어있는지는 잘 모르나 하늘궁을 바라보고 있자니 인간이 만드는 세상과 자연이 만드는 세상 사이의 격차가 구월의 파란 하늘만큼이나 깊어 보였다.
오늘 산행은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수리봉을 왕복하는 동안 산행에서 마주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정도로 정말 호젓한 숲속의 여유로움이 내 집 가까이 있어 행복한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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