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저마다 다른 성품과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을 연단하여 그릇의 특성에 맞게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금그릇은 첫째로, 변함없는 그릇이고 둘째로, 소중한 그릇이며 셋째로, 아름다운 그릇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그릇이란 어떤 사람을 말할까요?하나님께서는 악이 없고 마음과 행함이 선에 속한 것을 아름답다 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상대에게서 티를 잡지 않고 오해하거나 판단하지 않으며 오직 상대에게 덕을 끼침으로 평안과 쉼, 행복을 줍니다. 어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으며 아무 일에든지 다투지 않지요. 악한 사람이나 힘든 상황을 만나도 마음에 불편함이 없으며 오직 진리 안에서 어떤 것이라도 이해하고 받아 줍니다. 마음이 솜털같이 부드럽고 포근하기에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 주며, 아늑함과 평안함을 줍니다. 더 나아가 다른 이를 위해 대신 죽어줄 수도 있는 최고의 선과 사랑을 가졌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럽겠습니까? 대표적인 예로, 에스더를 들 수 있습니다. 에스더는 유다인으로서 바사 제국의 왕후가 되었지만 마음이 교만해지지 않았고 겸손했습니다. 악한 하만의 궤계로 동족 유다인이 전멸될 상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각자의 그릇대로 쓰임받는데,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며 크게 쓰시는 사람은 바로 금그릇과 같은 사람입니다. 금그릇은 첫째로 변함없는 그릇이며, 둘째로 소중한 그릇입니다. 하나님 앞에 소중한 그릇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신 사람들은 한결같이 지대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 안에서 주어지는 특별한 사명들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곧 금그릇이지요. 대표적인 예로, 세례 요한은 인류의 구세주이신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11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중요한 사명을 띠고 있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지요. 세례 요한은 이런 소중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기가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누가복음 1:80에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한 대로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았지요. 그리고 마태복음 3:4에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
평소에는 아끼고 사용치 않다가 귀한 손님이 오거나 아주 특별한 날에 식탁에 내어놓는 귀한 그릇이 있는가 하면, 늘 편하게 쓰는 그릇도 있고 천하게 쓰는 그릇도 있습니다.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이는 그릇이 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금그릇이 된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금그릇은 어떠한 그릇일까요? 첫째로, 변함이 없는 그릇입니다. 금은 불활성 금속으로 다른 물질과 화학반응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본래의 아름다운 광택이 유지되며 변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환경에서도 변치 않는 중심을 가진 사람을 금그릇에 비유하시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한 번 만난 후로 어떤 시험, 환난, 풍파가 올지라도 조금도 변개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27을 보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면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여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안타깝게도 진정한 기독교인의 수는 결코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과 제사장들 그리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사람 앞에 보이려고 신앙생활 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신앙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요셉은 형들의 시기를 받아 애굽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 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의 특유의 성실함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주인 보디발의 인정을 받았고, 외국인 노예로서 가정 총무로 파격 승진을 하였지요. 그러던 어느 날, 주인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다가 도리어 누명을 쓰고 깊은 감옥에 갇혔지만 요셉은 결코 불평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요셉을 은혜를 원수로 갚고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자로 여겼지만, 요셉은 모든 것을 보고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을 뿐이었지요. 요셉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해명하고 따진다면 누명을 벗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진실이 드러나면 자신은 억울한 일을 당하지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소원을 이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까지도 능히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며 사랑 자체이시니 자녀들이 구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주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교회에 왔다 갔다 하면서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면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응답받는 신앙생활을 영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자기의 마음 됨됨이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미신을 믿거나 자기 스스로를 믿고 살다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났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혹시 해결되지 않을까?’ 반신반의하면서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대부분이지요. 따라서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아 추호라도 의심하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구원의 확신이 있는지 점검해 보고 신앙상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수 없지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우리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구하면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7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들이 하나님께 구하여 복된 삶을 영위하기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는 말씀이지요. 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찌 자녀가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부모가 있고,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줄 부모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우리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것으로 넘치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할까요? 첫째로, 하나님의 능력과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시편 105:4에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은혜와 능력을 주셔야 세상을 이기고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이 능력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며(막 9:23), 마음 중심에서 믿어지는 영적 믿음
하나님께서는 모든 응답과 축복을 반드시 영계의 법칙에 따라 주십니다. 여기에 적용되는 공의의 법칙이 바로 일곱 영입니다. 일곱 영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 행실 등 모든 분야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일곱 가지 측면에서 측정하지요. 일곱 영(1), (2)에서는 첫째 믿음을, 둘째 기쁨을, 셋째 기도를 측정하시는 분야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다음으로 일곱 영이 측정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넷째로, 감사를 측정합니다. 참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중심에서 감사의 고백이 나옵니다.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영혼이 값없이 주신 주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었고, 천국에 가게 되었으니 중심에서 감사가 나올 수밖에 없지요. 더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셔서 삶을 한 걸음씩 인도해 가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특별한 감사의 조건이 없다 해도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성장할수록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으로 축복해 주시기 때문에 감사의 조건도 점점 많아집니다. 하루에도 감사의 조건이 참으로 많습니다. 사건 사고 많은 세상에서 지켜 주시니 감사합니다. 또 악한 세력으로부터 지켜 주
하나님께서는 온 땅의 인생들을 두루 감찰하실 때 하나님의 마음인 일곱 영을 보내십니다. 일곱 영이 모든 사람의 마음과 행실을 살펴서 공의에 맞게 응답과 축복을 주시지요. 일곱 영(1)에서는 첫째 믿음을, 둘째 기쁨을 측정하시는 분야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 다음으로 일곱 영이 측정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기도를 측정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 뜻에 합당하게 기도하는지”를 측정합니다. 무조건 많이 기도한다고 합격하는 것이 아니라, 짧은 시간이라도 하나님 마음에 맞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기도는 먼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하신 대로 매일 습관을 좇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영적으로 깨어 있어 어떤 시험에도 들지 않습니다. 설령 시험이 와도 신속히 통과할 수 있지요. 또한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상의 선지자들은 물론 예수님께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구하면서 겸비하게 무릎을 꿇고 아뢴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하셨듯이, 기도는 자기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일곱 영은 영 자체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말합니다(요 4:24). 우리가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 마음을 알아서 그 뜻에 맞게 구해야 하는데, 이러한 마음과 응답의 기준을 제시해 주는 것이 바로 일곱 영입니다. 여기서 ‘일곱’이란 숫자는 하나님의 영이 일곱이라는 뜻이 아니라, 영적으로 ‘완전하다’는 의미로서 완전하신 하나님의 영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일곱 영이 측정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로, 믿음을 측정합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믿음대로 되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면 마음에서 믿어지는 영적인 믿음이 아니라 지식으로만 아는 육적인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머리로 알고 입술로 고백한다고 해서 믿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믿음은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고 인간의 생각이나 지식에 맞지 않아도 마음에서 의심 없이 믿는 믿음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을 믿지요. 이러한 영적인 믿음은 내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죄악을 버리고 성결되는 만큼 위로부터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영적인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명을 지키는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라” 하신 것은
낡고 오래된 가죽 부대는 신축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이산화탄소가 발생하여 결국 터지고 맙니다. 하지만 새 부대는 신축성이 좋기 때문에 그럴 염려가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눅 5:37). 이 비유를 통해 무엇을 깨우쳐 주고자 하신 것일까요? 요한복음 15:1에 예수님은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포도나무라면 그 열매는 이 땅에 사역하시면서 기사와 표적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신 모든 일들이지요. 또한 포도즙은 포도 열매를 짜낸 액이며, 영적으로는 예수님의 보혈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많은 열매를 내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보혈을 흘리심으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위해 생명을 주시는 사랑으로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셨지요. 따라서 주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 신약이며, ‘새 포도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묵은 포도주’란 구약의 율법적인 삶의 방식을 의
2천여 년 전, 온 인류의 기쁨과 소망이 되시는 구세주가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동방박사들은 구세주가 되실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별을 보고 베들레헴에 찾아와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면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드린 세 가지 선물에 담긴 영적인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로, 황금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황금은 이 땅에서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귀금속 중의 하나로서 부와 재물을 상징합니다. 마태복음 6:21에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황금을 예물로 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것이며,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즉 기본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 그 이상의 것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2:42을 보면,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드렸던 가난한 과부가 나옵니다. 이 여인은 가난하여 두 렙돈밖에 안 되는 적은 돈을 하나님께 드렸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시고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가진 전부를 드리는 것, 할 수 없는 중에도 하
그릇 됨됨이와 상대되는 개념으로 마음 됨됨이가 있는데 이는 얼마나 마음을 넓혀 사용하는가 하는 차원입니다. 그릇 됨됨이가 그릇의 재질과 관계가 있다면, 마음 됨됨이는 그릇의 크기와 관련이 있으며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신이 해야 할 것 이상으로 해내는 경우입니다. 마음 됨됨이가 좋은 그릇이지요. 일례로, 부모가 방 안에 떨어진 휴지를 주우라고 하면 휴지를 주울 뿐 아니라 방 안 구석구석까지 청소하는 자녀가 있습니다. 이 경우는 부모의 기대 이상으로 행했기 때문에 흡족함과 기쁨을 줍니다. 스데반 집사나 빌립 집사는 평신도였지만 주의 종에 못지않은 마음 됨됨이로 성결하고 충성하며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고 집사임에도 불구하고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자신이 해야 할 것만 하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주어진 책임과 의무는 확실하게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거나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데까지는 마음을 쓰지 못합니다. 부모가 휴지를 주우라 하면 휴지만 줍는 경우입니다. 물론 순종한 것에 대해서는 칭찬을 받지만 그 이상으로 기쁨이 되지는 못합니다. 교회에서 어떤
경작이란 농부가 씨를 뿌리고 가꾸는 수고를 통해 열매를 얻는 과정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땅에 사람을 경작하는 수고를 통해 참 자녀라는 열매를 얻고자 아담과 하와라는 첫 번째 씨를 심으셨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을 경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불순종하여 타락할 것과 이로 인해 근심하게 될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여 악을 버리며 그분의 마음을 닮은 참 자녀가 나올 것을 알기에 끝까지 사랑으로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흙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흙의 속성과 닮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흙은 새로운 생명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성질이 있어서 밭에 씨를 뿌리면 싹이 나고 자라 열매를 맺습니다. 또한 흙은 어떠한 성분을 가미하느냐에 따라 토질이 바뀝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짜증이나 화를 잘 내는 경우 점점 혈기가 많은 토질로, 거짓말을 잘하는 경우 거짓된 속성이 강한 토질로 바뀝니다. 첫 사람 아담이 죄를 지은 뒤 그와 그의 후손들은 육에 속한 사람이 되어 급속히 비진리로 물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마음밭을 개간하여 다시 영으로 회복해야 하는 경작 과정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경작받는 목적은 마음밭을 개간하여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