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김창진 기자] 한국 프로 스포츠의 양대 간판인 야구와 축구가 2014 인천아시안게임에서 동반 금메달 사냥에 나선다.
두 종목 모두 역대 대회에서 국민들에게 큰 기쁨을 선사했지만 만만치 않은 시련의 아픔 또한 겪어야 했다.
야구가 아시안게임에 도입된 것은 1994년 히로시마대회 때부터다. 초대 대회 결승전에서 일본에 5-6으로 패해 은메달에 그친 한국은 프로 선수들이 총출동한 1998년 방콕 대회를 시작으로 세 차례나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방콕에서는 메이저리그(MLB)에서 뛰던 박찬호도 소속팀 LA 다저스의 동의 아래 태극마크를 달고 영광을 누렸다.
2006년 도하대회는 한국 야구의 유일한 실패로 기억된다. 방심과 전략 수집 소홀이 도출한 잔혹한 결과물이었다.
당시 김재박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한국은 류현진, 오승환, 이대호, 손민한, 박진만 등 초호화 멤버를 구성해 도하에 입성했다.
하지만 한국은 대만과의 첫 경기에서 궈홍치의 벽에 막혀 2-4로 패한 뒤 사회인 야구 선수들로 구성된 일본에도 7-10으로 덜미를 잡혀 일찌감치 우승권에서 멀어졌다. 류현진과 오승환을 내고도 역부족이었다.
남은 세 경기를 모두 잡았지만 결과는 동메달이었다. 일본전 7-7로 맞선 9회말 수비 때 오승환이 끝내기 스리런 홈런을 허용하는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몇몇 국가에서만 성행되는 야구와는 달리 대부분의 나라들이 참가하는 축구는 더욱 힘겨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아시아의 맹주를 자처하던 한국이 20년 간 금메달을 목에 걸지 못한 것만 봐도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지 쉽게 알 수 있다.
히로시마대회는 지금과 달리 연령에 관계 없이 모든 선수들을 자유롭게 차출할 수 있었다. 사실상의 A매치인 셈이었다.
한국은 개최국 일본을 8강에서 꺾고 우승에 바짝 다가섰다. 일본 축구계의 전설적인 인물인 미우라 가즈요시에게 선제골을 내주고 수비수 M.이하라에게 동점골을 헌납했지만 황선홍이 종료 직전 얻어낸 페널티킥을 성공시켜 기세를 올렸다.
4강전 상대는 우즈베키스탄. 지금이야 축구팬들에게 익숙하지만 당시에는 생소한 나라였다. 한국은 30개에 가까운 슈팅을 퍼부었지만 모두 무위에 그쳤다. 반면 우즈베키스탄이 때린 회심의 중거리슛은 골키퍼 차상광의 다리 사이를 통과해 골망을 흔들었고 이는 결승골로 기록됐다.
1998년에는 개최국 태국에 발목을 잡혔다. 3전 전승으로 조별리그를 통과한 한국은 8강에서 홈팀 태국을 만나 고전했다.
선수들은 열광적인 성원에 기를 빼앗긴 듯 무기력한 플레이로 일관했다. 급기야 1-1로 맞선 연장전에서 골든골을 허용해 쓸쓸히 귀국길에 올랐다. 태국 선수 2명의 퇴장으로 인한 11-9의 수적 우위를 안고도 지면서 허정무 당시 감독은 꽤나 곤혹을 치러야 했다.
한국은 월드컵 열기를 그대로 이어간 2002년 부산대회 4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이란에 패했고 2006년에는 이라크와 이란에 연거푸 져 메달도 걸지 못했다. 박주영, 구자철, 지동원 등이 포진된 2010년 광저우 멤버들 역시 금메달의 숙원을 풀기에는 역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