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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애국지사 거룩한 희생 되새 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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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시, 만세운동 항일유적지·인물을 찾아서

올해로 3.1절 92주년을 맞는다. 용인 만세항쟁은 1919년 3월21일 원삼 좌전고개에서 그 횃불이 타올랐다. 용인시는 오는 3월 말경 좌전고개 만세운동 기념탑을 준공한다. 용인에서는 1919년 만세운동에 1만3200명의 주민이 참여해 저항했다. 당시 시위가 전개됐던 경기도 22개 부·군 가운데 두 번째로 많은 지역민이 참여한 고장이다. 용인은 한말 순국열사를 비롯해 무장투쟁의 맹활약을 펼친 의병, 애국계몽활동을 펼친 언론인, 만주 신민부를 주도한 김혁장군 등 수많은 항일투사를 낳았다. 만세운동과 항일유적지·인물을 살펴본다.

◆처인구

처인 지역은 수많은 항일의병을 비롯해 교육자, 언론인을 낳은 곳이다. 그런가하면 친일파 매국노 송병준의 초호화별저(현 온누리요양센터)가 양지면 추계리에 있었고, 용인지역의 금을 약탈하기 위한 금광, 쌀을 수탈하기 위한 수여선 협궤철도 등 일제 수탈의 현장이 처인에 흔적이 남아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일깨운다.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와 프로문학가 안막의 신접 생가도 원삼면 문촌리에 있었다.

◆원삼좌전고개

1919년 3월21일 새벽 원삼면과 양지면의 경계인 좌전고개에서 용인만세운동이 시작됐다. “횃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내려오니 좌항리와 맹리 주민이 합세했다. 새벽 3시경 사암리로 향해 태극기를 마을 주민들에게 나눠주며 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다. 원삼면사무소에 이르자 고당리, 문촌리 주민들이 합세했다. 원삼면장을 앞세우고 백암리에 있는 경찰주재소로 가는 길목에 이르자… 일경과 헌병대원이 발포해 수많은 사람들이 살상당한 채… ” 일경에 체포돼 징역 10개월에 처해졌던 김은수 의사의 아들 김사원이 역사의 장면을 기록으로 생생히 재현하고 있다. 시는 원삼면 좌항리 산21-1번지 외 3필지 3만4035㎡규모에 기념탑 건립을 추진 중이며 오는 3월 말 준공한다. 기념탑과 전시실, 광장 등으로 조성된다.

◆오의선 선생

원삼면 죽릉리 659-2번지에는 애국지사 오의선 선생의 묘소가 있다.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신학문을 배우던 선생은 1919년 도쿄 한인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선포한 2.8독립선언에 참여했다. 고향에 들렸다가 3.21원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해 일제의 고초를 겪고 이후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임시정부에서 활약하고 만주지역에서 활동, 국내에 돌아와서 시대일보 기자로 활동하는 등 항일 운동을 펼쳤다.

◆3대 독립항쟁 기적비(紀蹟碑)

원삼면 죽릉리 청룡마을에는 의병장 오인수, 아들 오광선, 손녀 오희영과 오희옥 등 3대에 걸친 독립운동을 기념해 세운 비석이 있다. 오인수는 원삼면 죽능리 어현에서 출생해 1905년부터 의병으로 활동하다 1907년 만주로 망명했다. 아들 오광선은 만주에서 무장 독립군으로 활동했으며 오광선의 장녀와 차녀인 오희영, 오희옥도 청년공작대에서 활약했다. 오인수의 부인 정전산 역시 임시정부와 함께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의병장 옥여 임경재

옥여 임경재(1872~1907)는 양지면 평창리 태생으로 1907년 농상공부 주사직을 맡고 있었으나 고종 강제퇴위를 계기로 관직을 버리고 항일투쟁에 나선다. 그는 용인뿐 아니라 이천,안성 등지에서 유격대 활동과 인근 의병부대 연합작전으로 유격전을 펼치며 일본 기병대를 급습하고 일본군과 싸워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해 11월10일 잠시 들른 고향집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일진회 친일파들에 급습당해 강렬히 저항하다 현장에서 사살됐다. 1993년 고향마을 앞에 동상이 건립된다.

◆기흥구

기흥만세운동은 1919년 3월30일 하갈동에서 일어난다. 김구식과 김혁의 주도로 시작된 기흥 만세운동은 300여명의 주민이 참가하는 대규모 시위로 번진다. 김구식은 체포돼 1년6개월의 수형을 견디어야 했고 김혁은 만주로 피신, 독립군 활동을 전개한다.

◆김혁공원

김혁(1875~1939)장군은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 육군장교로 근무하다가 1907년 군대 해산명령이 떨어지자 낙향한다. 기흥 만세운동 시위를 주도한 후 만주로 망명해 독립군 부대인 신민부의 집행위원이자 신민부에서 설립한 사관학교의 교장으로 활동하면서 대일항쟁에 앞장선다.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 전투 승리에도 큰 공을 세운다. 1928년 신민부 본부를 급습한 일경에 체포돼 모진 옥고를 치르는 등 파란의 생애를 겪고 병을 얻어 고향에 돌아왔으나 해방을 보지 못하고 영면한다. 구갈동 성지초교 앞에 김혁공원과 기념비가 있다.

◆명륜학교

1906년 기흥구 언남동 335번지에 위치한 용인시 향토유적 제1호인 용인향교(일명 구성향교) 내에 명륜학교가 설립됐다. 구한말 나라의 위기를 근대교육으로 극복하자는 애국사업의 일환으로 용인지역 지사들의 우국지정으로 탄생한 용인 최초의 신식학교이다. 설립자는 구한말 대학자인 동전 맹보순 선생, 초대 교장은 학부대신을 역임한 이도재 선생이었다. 명륜학교는 만주 독립군을 양성한 김혁장군, 상해 독립운동가 이영선 선생 등을 배출했다. 1908년 일제의 압력으로 명륜학교는 용인보통학교로 바뀐다.

◆민영환 묘소

기흥구 마북동 산36번지에는 충정공 민영환(1861~1905) 선생의 묘소가 있다. 경기도 기념물 13호이다. 여흥 민영환은 대신으로 고종 황제에게 정치 군사제도의 근대적 개혁을 건의하고 독립협회 등 사회단체와 재야 인사들과 교유하며 자주민권운동을 지원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결국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해 한국의 자주권을 박탈한 후 민영환 선생은 상소를 올리고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고하는 유서 세통을 남기고 단도로 자결했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수지 3.1만세운동기념탑 - 독립의 메아리

수지만세운동은 1919년 3월29일 고기동에서 시작 수지 전역으로 확산된다.

수지만세운동 기념탑은 용인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회장 유성희)가 건립을 추진해 용인시가 지원한 건립비와 206명의 시민들의 성금으로 건립됐다. 수지의 역사 복원과 정신 계승을 통해 유입 인구가 많은 수지지역 시민 정주의식 고취를 위해 추진돼 2009년 11월에 제막했다. 풍덕천동 689번지 수지새마을공원 내 330㎡의 부지에 조성된 기념탑은 주탑과 기단에 태극기 형상과 만세를 부르는 민중의 손들을 중첩시킨 단순한 조형미로 3.1저항정신을 명료하게 표현했다. 정기웅 작가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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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산 건조 마늘과 양파를 냉동 제품으로 위장 밀반입 한 5명 적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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