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현대미술의 거장 다니엘 뷔렌(Daniel Buren.84)의 작품세계를 깊이 감상할수 있는 대규모 전시가 마련됐다. 대구미술관(관장 최은주)이 7월 12일부터 내년 1월 29일까지 세계적인 조형 예술가 다니엘 뷔렌의 개인전 <다니엘 뷔렌>전을 국공립미술관 최초로 개최하는 것.
대구미술관 1전시장과 어미홀에서 다니엘 뷔렌의 회화, 영상, 설치 등 작품과 공간의 특정 관계에 주목한 최근작 29점을 감상할 수 있다.

전시 전 대구를 찾은 거장 다니엘 뷔렌은 직접 설치작업을 마무리 짓으며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어린아이의 놀이처럼’(2014) 등을 전시 전 설치한 그는 "작가로서 제가 하는 일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니다”면서 “이는 관람객에게 나의 의견을 강요하지 않기 위한 측면도 있다. 관객이 작품을 보고 자신만의 느낌을 가진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뷔렌은 1961년 미국 버진아이랜드의 그레이프트리 베어 호텔에서의 커미션 워크를 시작으로 미주, 유럽, 아시아,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등 60개국에서 3000회 이상의 전시를 열고 있는 현역이다.
뷔렌은 작품을 설치한 공간과 주변 환경을 작품에 끌어들여 작품을 완성하는 '인 시튜'(In Situ) 작업으로 유명하다. 인 시튜는 그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모티브이기도 하다.
그가 세계 미술계를 놀라게 한 것은 1986년. 세계적 명소 파리 팔레-루아얄에서 대규모 설치작품 ‘두 개의 고원(Les Deux Plateaux)’을 발표했다. 팔레-루아얄 광장에 설치한 이 작품은 다양한 높낮이의 260개의 줄무늬 기둥으로 제작돼 누구라도 뛰어넘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실제로 어린아이들과 청년들이 작품들을 뛰어넘어다니며 즐기기도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작 ‘모나리자’를 품은 루브르박물관에서 불과 200여m 떨어진 파리 팔레-루아얄에서 미술관, 미술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었다. 설치장소인 팔레 루아얄은 루이 13세의 재상(宰相) 아르망 리슐리외의 저택이었으며, 루이 14세가 거주하던 고풍스러우면서도 위엄 있는 명소이다.
뷔렌은 같은 해 제42회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세계 미술계의 이목이 그에게 쏠렸다. 이후 뉴질랜드, 슈투트가르트, 일본 등에서도 권위 있는 미술상 수상이 이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정형화된 미술 제도에 대한 비판을 담은 작품에 미술계가 경의를 표한 것이다.
왕성한 작품 활동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온 뷔렌은 모더니즘적 미술 제도를 비판하거나 고정된 시각을 유발하는 미술사조의 틀을 거부하며 자신의 작업 세계를 구축해왔다.
1968년 줄무늬 패널을 등에 짊어진 ‘샌드위치 맨’이 거리를 활보하는 뷔렌의 퍼포먼스 역시 예술에는 현장이 있고, 현장에는 예술이 있다는 ‘인-시튜(In-Situ)’, 즉 장소특정적 예술 철학을 담은 작품이었다.

작품과 공간의 특정한 관계성을 심화시킨 ‘인-시튜(In-Situ)’ 작업은 파리 퐁피두센터(2002),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2005)에서의 기념비적인 전시를 비롯하여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 현대미술관(2014), 루이비통 파운데이션(2016) 등 국제적인 위상을 지닌 여러 기관에서 선보이고 있다.
‘인-시튜’는 제자리에 혹은 본래의 장소라는 뜻으로, 20세기 초 고고학자들이 주위 환경의 맥락과 유기적인 관계를 갖는 사물을 가리키는 뜻으로 처음 사용했다. 뷔렌의 ‘인-시튜’는 관점, 공간, 색상, 빛, 움직임, 환경, 분절 혹은 투영 현상을 복합적으로 활용하여 작품과 공간의 경계가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유도하는 작업이다.
아시아권에서는 처음 선보이는 대표작 ‘어린아이의 놀이처럼(2014)’도 ‘인-시튜’ 작품이다. 관람객은 최대 6m 높이, 40m 길이의 사면체, 정육면체, 원통형, 피라미드 또는 아치 형태의 기하학적 모양의 모듈 100여점을 마주하게 된다. 대칭적으로 배치된 이 모듈들 사이를 자유롭게 산책하며 입체적인 공간감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 작품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블록 쌓기 놀이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사면체, 정육면체, 원통형, 아치 형태의 104점이 최대 6m 높이까지 쌓아 올려져 40m 길이의 긴 어미홀에 배치되는 대규모 설치 작품이다.
2014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처음 공개한 후 나폴리(2014), 멕시코(2016), 시드니(2018)에 이어 대구에서 선보이는 이 작품은 작가가 설치를 위해 직접 한국을 방문할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차지한다.

작가의 삶과 예술 여정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자전적 필름도 아시아권 최초로 선보인다. 1968년 스위스 베른에서 예술적 시도를 과감하게 실행했던 뷔렌의 독백으로부터 시작하는 장편 필름 ‘시간을 넘어, 시선이 닿는 끝(2017)’. 작가가 직접 제작에 참여했다. 다큐멘터리형 장편 필름으로 러닝타임 6시간 30분에 이른다.
이 필름은 1968년 하랄드 제만(Harald Szeemann, 1933-2005)의 전시가 있었던 스위스 베른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뷔렌의 주요 행적과 기념비적인 프로젝트들을 포함, 도전적이고 전위적인 작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뷔렌의 회고전을 이끌었던 파리 퐁피두센터 베르나르 블리스텐(Bernard Blistène. 67) 관장의 인터뷰를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이어 펼쳐지는 1전시장의 넓고 밝은 공간에서는 뷔렌의 최근작을 만나볼 수 있다. 뷔렌은 1990년대부터 작품에 거울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번 출품 작품에도 거울이 등장한다.
뷔렌에게 거울이란 작품이 수용되는 장소를 확대하고 파편화하거나 변형함으로써 그 장소를 변모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다. 관람객은 거울을 통해 관람자와 공간의 관계에 의도치 않게 참여하게 되어, 뷔렌 작품의 실존성과 환영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점이 된다.
작품의 대부분은 거울, 플렉시글라스(Plexiglass) 등 사물을 비추거나 확대, 파편화하는 재료들로 구성되어 있다. 뷔렌에게 거울은 관람자와 공간 간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되,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나게 하는 ‘제3의 눈’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작용을 한다.
뷔렌은 ‘인-시튜’ 작업을 통해 공간을 닫거나, 열고, 둘러싸거나 해체하면서 자신의 개념과 행위를 무한히 확장한다. 이러한 행위들은 장소 속의 장소, 공간 속의 공간을 구축하여 안과 밖의 경계를 자유롭게 왕래하도록 한다.
대구미술관 마동은 전시기획팀장은 “다니엘 뷔렌은 모더니즘적 미술 제도를 비판하거나 미술사조의 틀을 거부하며 '인-시튜' 개념을 통해 자신의 작업 세계를 구축해온 작가”라며, “관람객들이 이번 전시를 통해 어린아이의 놀이처럼 미술의 천진한 본성에 좀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