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석고 덩어리가 / 조각가의 손에 의해/ 두 개의 심장으로 빚어진다/ 마치 우주가 신에 의해 / 음과 양의 대칭으로 이루어지듯 / 마주보는 두 얼굴로 (시인 신규호)
인간의 삶은 유한하지만, 예술가의 업적은 영원히 남는다. 조각가 문신(1922~1995, 본명 문안신)도 그중 한 사람이다. 서울 올림픽공원을 거닐다보면 200여점의 조형 작품 중 유난히 반짝이며 높이 솟은 조각을 만나게 된다. 묵주처럼 생긴 반구(半球)형의 두 기둥이 층층을 이루며 하늘 높이에서 해를 받아 주위를 비추고 있다. 문신(1922~1995)이 서울올림픽 기념 예술올림피아드에 참여해 만든 25m 높이의 올림픽 1988」이다.
스테인레스 기둥은 거울처럼 하늘과 해, 빛과 구름, 나무와 꽃, 나비와 배, 사람들을 담아낸다. 프랑스의 국보급 작가 세자르도 출품했지만, 미국 NBC방송은 1988년 올림픽공원 현장 인터뷰에서 “세계 72개국 191명 예술가의 작품 중 최고 명작”이라고 평가했다.
문신은 한국을 대표하는 모더니즘 조각가이다. 생전의 그가 50여년간 추구한 예술의 폭은 아주 넓다. 회화에서 시작하여 부조조각, 조각, 채화, 드로잉, 건축에 이르기까지.
마산 바다보며 예술가 꿈 키워
일제강점기 일본 규슈의 탄광촌에서 한국인 이주노동자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소년은 마산 바닷가에서 고독을 벗 삼으며 그림을 그렸다. 소년 문신의 꿈은 피카소 같은 화가가 되는 것이었다. 피카소 작품을 화집으로 만나게 된 인연이었다. 가슴 속에 커진 그 꿈을 이루기 위해 16세에 밀항선을 타고 일본 도쿄로 떠나 일본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망이 짙어갈 무렵 23세의 문신은 도쿄에 있던 조각가 김종영의 아틀리에에서 자신의 「자화상」(1943)을 그리기도 했다. 해방과 함께 귀국해 한국전쟁시에는 종군화가로 입대해 동부전선에서 야전병원을 스케치해 목판화를 제작하기도 했고, 고향 마산에서 만난 어부의 살아숨쉬는 생명력을 분출한 부조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한때 홍익대 미대에서 강의(1965-1966)도 했다.
도불 후 추상조각가로 파리 화단 주목받아
1961년 1차 도불에서는 추상화에 전념했다면 2차 도불부터는 추상 조각이 중심 작업이 되었다. 문신은 1970년부터 파리에서 빛나는 활약상을 하게 된다. 프랑스 남쪽 항구 발카레스 국제조각 심포지엄에 「태양의 인간, Homme du Soleil」(1970)을 발표하며 파리 화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특히 「태양의 인간」은 50여 년 동안 발카레스시 성장에 이바지한 상징이 되었다.
‘르 피가로’지 1면을 장식하고, 당시 전철에 문신의 작품이 소개될 정도로 당시 프랑스에서 인기를 얻는다. ‘살롱 드메’를 비롯한 주요 살롱전에 매년 초대를 받게 된다. 파리 체류 시절 150여회의 초대전과 개인전에 초대를 받으며 세계적인 조각가로 부상했다.
귀국 후 마산에 정착해 지연, 학연 등에 얽매이지 않고 창작에만 몰두하다가 직접 디자인, 건축한 문신미술관을 1994년 개관하고 이듬해 타계했다.
외로운 이방인이기도 했던 그의 프랑스에서의 작업 활동은 마치 전쟁에 임한 전사와 같았다.
작업 노트에 따르면, “섭씨 45도의 찌는 듯한 모래사장에서 나는 작업을 하는 동안 수시로 손목을 베었다. 다행히 응급용 붕대로 지혈을 했지만 작업실 곳곳은 난자했다.(중략) 마치 격렬한 전장에서 피를 쏟은 채 쓰러져가는 전사(戰士)를 보고 복수심에 불타 돌격하는 군인이 된 기분이다. 지금 나는 붕대를 맨 뒤 소음이 진동하는 전기톱을 마치 기관총을 잡듯 붙잡고 있다”라고 썼다.
「태양의 인간」이나 「올림픽 1988」에서 보듯, 문신은 자연과 인간을 모티브로, 평화와 화합,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좌우대칭(Symmetry)으로, 균형과 견제, 상생(相生)과 조화 그리고 배려를 담는다. 그래서 「올림픽 1988」은 ‘올림픽-화합’이 되기도 한다.
“「올림픽 1988」의 두 개의 거대한 묵주알 기둥은, 올림픽이란 국가적 경사를 맞이하여, 남북한이 평화와 화합을 하면서 종국적으로 통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기원했다”는 작가는 묵주 한알한알에 평화와 화합을 소망하며 한층 한층 탑을 쌓는 마음을 담은 듯하다.
문신은 1980년 영구 귀국할 때는 프랑스에서 3대 조각가로 꼽혔을 정도로 조각가로 위상이 높았다. 파리 체재 기간 동안 그는 ‘살롱 드 메’, ‘살롱 그랑 에 죈느 도주르디’, ‘살롱 데 레알리테 누벨’ 등 당시 주요한 살롱에 초대받아 활동했다. 귀국 후 마산에 정착해 지연, 학연 등에 얽매이지 않고 창작에만 몰두하다가 직접 디자인, 건축한 문신미술관을 1994년 개관하고 이듬해 타계했다.
한국과 일본, 프랑스를 넘나들며 인생 대부분을 이방인으로 살았던 작가의 삶은 진정한 창작을 가능하게 만든 동력이었다. 나아가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구상과 추상, 유기체적 추상과 기하학적 추상, 깎아 들어감(彫)과 붙여나감(塑), 형식과 내용, 물질과 정신 등 여러 이분법적 경계를 횡단하고 이들 대립항 사이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찾아냈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신 조각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대칭’은 단순한 형태적, 구조적 좌우대칭을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연과 우주의 생명에서 영감을 받은 그의 독창적인 추상 조각은 ‘시메트리(Symmetry·대칭)’가 바탕이 된 균제미, 정면성, 수직성, 고도의 장인정신 등을 특징으로 한다.
문신 작가의 아내로, 예술적 동지였던 최성숙(76)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 관장겸 한국화가는 창원특례시(시장 홍남표), 숙명여대 문신미술관과 함께 ‘문신100주년 기념전시’ 준비위를 2019년 결성하고 기념전시를 준비했다.
최 관장은 “국립현대미술관, 창원특례시,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과 숙명여대문신미술관 관계자, 소장자들, 관람객 여러분들게 모두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면서 “서울과 마산, 프랑스에서 열리는 전시들을 통해 문신의 작품세계, 삶과 예술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연구되어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문신(文信) : 우주를 향하여>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전시는 조각, 회화, 공예, 건축, 도자 등 다방면에 걸친 작가의 삶과 예술세계를 소개하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이번 전시회는 장르도 다양하고, 규모도 크다. 회화부터 조각, 드로잉, 도자기 등 총 230여 점에 달하는 작품이 전시돼 있다.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문신의 작품세계를 볼 수 있는 기회다.
전시의 부제 ‘우주를 향하여’는 문신이 다양한 형태의 여러 조각 작품에 붙였던 제목을 인용했다. “인간은 현실에 살면서 보이지 않는 미래(우주)에 대한 꿈을 그리고 있다”던 작가에게 ‘우주’는 그가 평생 탐구했던 ‘생명의 근원’이자 ‘미지의 세계’, 그리고 모든 방향으로 열려있는 ‘고향’과도 같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주를 향하여’는 생명의 근원과 창조적 에너지에 대한 그의 갈망과 내부로 침잠하지 않고 언제나 밖을 향했던 그의 도전적인 태도를 함축한다. 작가의 예술세계를 연대기적으로 접근하는 대신 크게 회화, 조각, 건축(공공미술)으로 나누었다. 조각 부분에서 형태의 다양한 변주를 감상하고 창작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1부 ‘파노라마 속으로’에서는 문신 예술의 시작인 회화를 보여준다. 구상회화에서 생명과 형태의 본질을 탐구하는 추상회화로의 변화가 조각과는 별개로 아름다운 조형미와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2부에서는 다수의 나무 조각 작품들과 드로잉을 통해 문신의 조각이 지닌 상징, 의미를 찾기보다 독창적이고 환상적인 추상 형태 그 자체를 감상할 것을 제안한다.
3부 ‘생각하는 손: 장인정신’은 「개미(라 후루미)」(1985), 「우주를 향하여3」(1989) 등 다수의 브론즈 작품들과 드로잉을 선보인다. 「개미」를 보면 문신에게 만물은 원과 선이었음을 알수 있다. 원과 선은 곧 우주의 원리였고, 원과 선을 통해 조각에 생명을 담았다.
4부 ‘도시와 조각’은 도시와 환경이라는 확장된 관점에서 조각을 바라본 문신의 작품세계를 조명한다. 야외조각과 체불 시절 작가가 시도했던 ‘인간이 살 수 있는 조각’, ‘공원 조형물 모형’ 등 공공조형물을 소개한다.
원래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밖에 설치돼 있던 이 작품은 이번 전시를 위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앞으로 옮겨졌다. 전시는 2023년 1월 29일까지.
창원시립 마산문신미술관, 상설전 <조각가의 혼 : Soul of Sculpture>
한편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은 문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상설전 <조각가의 혼: Soul of Sculpture>을 최근 상설전시로 진행 중이다. 혼’(魂)과 ‘hone’(연마하다는 뜻) 등 두 개의 섹션으로 나뉜 전시에서는 조각, 드로잉 등 총 171점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문신 조각의 탄생과정을 살펴보고 그 예술적 가치를 소개하고 있다.
지중해 발카레스시, 문신 탄생 100주년전 : 해변 조각전시장 & 메종 드 아르
지중해 해안에 위치한 남불 발카레스시(시장 알랭 페랑)은 문신에 대해 존경과 추앙의 전시를 열었다. 문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해변 조각 전시장에 문신의 조각을 불빛으로 표현한 「돌고래, Dauphin」(2022), 「우주를 향하여, Vers le Cosmos」(2022)와 같은 불빛 조각을 선보이고, ‘메종 드 아르’(Maison de Arts)에서는 문신의 청동 조각 20점, 설치 디자인 20점, 연필, 펜, 잉크, 파스텔 드로잉 20점과 그의 부인 한국화가 최성숙의 작품 50여 점을 9월 말까지 전시하였다.
<사진 = 국립현대미술관, 이화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