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화가 이상남이 3월 17일부터 4월 16일까지 개인전 <감각의 요새>를 개최한다. 2017년 개인전 이후 국내에서 펼치는 5년 만의 개인전이다. 이번 작품전에서는 약 3m 길이의 대형 캔버스 작업을 포함하여 작가의 완숙기 기량이 녹아든 신작 회화 20여 점이 갤러리 전관에 걸쳐 소개된다.
전시 오픈 전 만난 작가는 청 재킷 차림에 여전히 젊은 감각으로 나타났다. 이미 두달 전 내한해 작품 전시 준비를 해왔다고 한다. 그는 그동안 각 문명권이 남긴 도상과 부호들을 수집하고, 그 이미지들을 '곱씹어' 만든 수백 개의 조형 기호들을 특유의 화법으로 2차원 평면 위에 구성해왔다.

칠하고 갈아내기를 50-100 회 반복하는 수행적인 과정을 통해 작품을 완성했다. 그의 추상 회화는 플랫하면서도 입체적이고, 단순하면서도 복잡하며, 정적인 동시에 유동적인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이상남의 작품은 '서구 모더니티의 기하학적 추상미학이나 기계의 미학을 새롭고 우아하게 재구성하면서 동양적 심미성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감싼 그림'이란 평을 받아 왔다. 전세계의 인재들이 모여드는 뉴욕에서 그만의 매력적인 회화를 만들어온 이상남 작가는 정교한 공정과정으로 회화와 디자인·사물의 경계를 교묘하게 흔든다.

반복적인 행위를 수십 차례 거듭해서 화면의 바탕을 균질하게 만들어내고 그 위에 기하학적 형상들을 놓는다. 무수한 원과 다중의 동심원들이 화면의 중심을 이루고 다시 이것들이 선으로 상호 연결된 구조를 갖는 것이다. ‘영원’과 ‘완벽’ ‘힘의 응집’ 등을 상징하는 원과 활모양의 호형 형태들이 작품 속에서 서로 관계 맺고 조화를 이룬다.
이상남의 그림에는 또한 역동성과 순환성, 그리고 비한정성이라는 동양적인 시공간의 개념이 슬쩍 엿보인다. 무엇보다도 '빠른 속도감을 느끼게 하는 추상적 이미지, 동양적 캘리그래피(서예)의 운필을 연상시키는 선의 궤적, 시선의 관조적 쾌락과 명상적 가치에 관계하는 정교하고 우아하며 감각적이고 서정적인 그림'이다. 추상미술을 새롭게 해석하고 전개한 작업이다.
정신영 평론가는 “이상남의 화면에는 억압과 해방이 공존한다. 이곳은 견고하지만 히스테리컬한 매혹적 감각의 요새다”라고 평한다.

이에 대해 작가는 "미래의 아이콘을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화면 위에 흑백의 리드미컬한 반복이 아찔한 환영을 구사하고 있고 그로 인해 다이내믹한 공간이 연출된다.
이번 <감각의 요새>전에서 이상남은 수학의 영역을 부유하는 듯한 과거의 이성적인 회화 화면에서 나아가 컬러가 풍성해지고 원근감이 깊어진 근래의 작업들을 선보인다. 40여 년간 작가의 내부에 축적된 감각이 캔버스와 나무 패널이라는 봉인된 물성과 지속적으로 만나 보다 폭발적인 결정체를 구현해 낸 것이다.

이상남 작가와의 일문일답
Q:<감각의 요새>전에서 무엇을 담고 싶었나.
A:결과는 관객의 몫이다. 작가는 작업 과정을 관객에게 펼쳐보여주는 거다. 예술은 계속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한다. ‘시각의 전이’라고 할까. ‘이건가’ 하면 다른 것을 보여준다. 끊임없이 의식의 형태를 만들어가면서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있다. 사람들은 고정된 자기의 언어로 보려고 하지만 나는 그것을 깨고자 한다.

Q:‘침묵’과 작품의 관계는?
A:엄청난 정보와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강요되거나 훈육된 ‘침묵’은 ‘침묵’이 아니다. 오히려 그 내면은 오히려 더 시끄럽다. 나는 오히려 시끄러움 속에서 진정 ‘침묵’ 혹은 ‘휴식’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노크롬, ‘침묵의 방’이라지만 더 ‘노이지(noisy)’하다. 존케이지 작품 ‘4분의 33초’처럼 역설적으로 시끄러움 속에 ‘침묵’을 찾을 수 있다. 복잡한 것이 휴식일 수 있다. 현대 사회는 많이 강요되고 있다. 삶 자체가 다양하고 변화무쌍한데 어떻게 침묵을 강요하듯이 같은 작품을 재미없게 계속할 수 있는가.
Q:주목받는 작가로 활동하다가 1981년에 도미했다. 당시 초기작과 현재 작품을 비교해본다면.
A:도미했을 당시 미니멀・개념미술 작품을 들고 갔다. 그러나 미니멀도 70년대에 다다라서 통하지 않았다. 미국에 갔더니 이미 중국 작가를 비롯, 다른 작가들이 나와 비슷한 작품을 많이 해서 가져간 작품들을 써먹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무엇을 할것인가’ 고민 많이 했다. ‘기계적인 요소, 미니멀하면서도 기하학적인 것을 다르게 한번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 그게 성공적이었다. ‘한국서 온 이상남의 기하학은 다르다. 메시지로 끝날뿐 아니라 메시지가 있다.’ 그걸로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나의 작품은 계속 변화 속에 있다. 삶 자체가 다양하고 다른데 어떻게 같은 것을 재미없게 계속할 수 있는가.
Q:현대미술의 중심인 ‘뉴욕’에 있기에 더 변화의 절박감을 느끼나.
A:뉴욕은 새로운 사고의 경쟁지다. 뉴욕에는 수많은 세계적인 작가들이 활동한다. 뉴욕에서 생존하려면 변화가 필수다. 3초 안에 관객의 눈을 사로잡아야 한다. 많은 작품들이 쏟아진다. 나도 많이 변했다.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 살아있는 것은 고정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나를 해체하고 분해해야 한다. 엇비슷한 그림은 생존할 수 없다. 나는 운좋게 ‘회화란 무엇인가’를 생각했고, 새로 붓을 잡을 수 있었다.
Q:최근 작품 제작에서 새로운 면이 있다면?
A:조각을 할 때 조각가는 큰 돌에서 뭔가 끄집어내기 위해 계속 쪼아댄다. 나는 회화지만 겹겹이 쌓아올린 화면을 갈아낸다. 한가지 형상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갈아야 한다. 옆에서 보면 평면이고, 상감기법이다.

Q:섬세한 작업이라 엄청난 내공이 필요할 것 같다.
A:루이스 브뉴엘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1929)를 아시는지. 살바도르 달리와 함께 만든 이 초현실주의 영화에는 눈을 칼로 베는 장면이 나온다. 잔인하지만 우리의 온 감각이 살아나도록 이끈다. 이렇듯 작가는 단숨에 관객의 시선을 빼앗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관객의 눈이 작품에 머무는 시간은 3초다. 3초 넘게 시선을 빼앗을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뉴욕에서는 3초간 붙잡지 못하면 그냥 나가버린다. 성공하면 전율을 느끼게 된다. 내 작품에 날카로움이 살아있는 엣지(edge)있는 작품을 만들고자 오랜 기간 노력했다. 아울러 늘 신선함, 새로움이 중요하다.
화가 이상남은?
1953년 서울 태생의 이상남은 1978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81년 도미하여 뉴욕에서 작업 활동을 꾸준히 이어나가고 있다. 그는 뉴욕 엘가위머 갤러리, 암스테르담 아페르 갤러리를 비롯한 국내외 유수 미술기관에서 20여 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대학교미술관, 워싱턴 스미스소니언협회 등의 단체전과 제3회 포즈난 메디에이션 비엔날레, 제15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등의 큰 국제 행사에 참여하여 세계 무대에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의 작품에 관한 평론은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아트포럼’ ‘아트인아메리카’ ‘아트아시아퍼시픽’ 등의 저명한 국제 저널에 게재되었다. 현재 경기도미술관, 주일 한국대사관, 폴란드의 포츠난 신공항 로비 등의 공공건축물에서 영구 설치된 그의 대규모 회화를 만나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