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조종림 기자] 음악에서 '카덴차'는 연주자들이 주로 협주곡 끝 무렵 즉흥적으로 화려하게 연주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악가에게 이 용어를 대입시키면 목소리의 수려한 기교쯤 되겠다.
데뷔 17년 만에 팝페라가수로 변신한 박기영이 22일 서울 이태원의 복합음악공간 스트라디움에서 부른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 중 질다의 아리아 '그리운 그 이름'(Caro nome)에서는 이 카덴차가 펄떡거렸다. 대중가수의 화법과 클래식한 기교가 학구적인 박사의 실험실 시험관 속 약물의 성분 비율처럼 절묘했는데, 자신만의 감성이 녹아들어갔다.
박기영이 2102년 tvN 오페라 서바이벌 프로그램 '오페라스타 2012' 출연 당시 우승을 안겨준 곡이다. 3년 전에 비해 발성이 탄탄해졌고 이탈리아 발음도 유려해졌다. 박기영이 28일 발표하는 첫 팝페라 앨범 '어 프리메이라 페스타(A Primeira Festa)'에도 실린다.
그녀는 "'오페라스타'에서 우승한 뒤 숱한 제의를 받았다"면서 "클래식 음악들이 재미있더라"며 웃었다.
클래식 음악에 대한 진지한 관심으로 성악 대가들에게 발성을 비롯한 기본기를 배워왔다. '오페라스타 2012'때 심사위원으로 만난 한스아이슬러 음악대학교 대학원 출신 명지대 한경미 객원교수, 밀라노 시립 음악원 출신 서울대 김덕기 교수, 베를린 함부르크음대 최고연주자 과정·뷔르츠부르크음대 마이스터 학위를 받은 서울대 진성원 교수를 사사했다. 줄리아드스쿨 음악대학원 출신 이화여대 이규도 명예교수에게도 레슨을 받았다.
"레슨 역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팝페라 앨범을 발표해야겠다는 목표를 정한 뒤 달려간 것이 아니다. 하다 보니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됐다. 여러 교수에게 레슨을 받으면서 느낀 점은 소리의 길을 하나라는 거다. 그분들이 중요시하는 건 각자의 감성, 개성이었다. 대중음악과 클래식음악이 크게 다르지 않구나 생각했다."
앨범에는 총 5곡 8개 트랙이 실렸다. 타이틀곡은 팝페라의 교과서로 통하는 '넬라 판타지아'다. 엔리오 모리코네가 만든 영화 '미션'의 테마곡 '가브리엘의 오보에'에 이탈리아어 가사를 붙여 만들었다. '팝페라의 디바' 사라 브라이트만의 레코딩으로 가장 유명하다.
'어느 멋진 날'은 일본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OST로 알려진 요시마타 료의 '더 홀 나인 야즈'에 한국어와 영어로 노랫말을 붙였다. 가사를 붙이는 허락을 요시마타 료에게 받아내는 데 3개월이나 걸렸다. 이 곡이 노래로 옮겨지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부른 '그리운 그 이름'과 함께 프랑스 작곡가 비제의 대표 오페라인 '카르멘'의 타이틀롤 카르멘이 부르는 '하바네라', 세계 3대 테너 루치아노 파바라티가 불러 유명해진 곡으로 테너 진성원과 듀엣한 '카루소' 등이 실렸다.
무엇보다 트랙마다 박기영의 목소리가 다른 점을 특기할 만하다. '넬라 판타지아'에서 박기영의 목소리는 청아하다. 예전부터 애정을 품고 있던 곡으로 기도하듯 불렀다. '하바네라'는 그녀의 호흡이 가장 돋보이는 곡으로 시작할 때 옥타브를 낮춰 좀 더 섹시함을 풍긴다.
박기영은 "대중 음악을 부를 때도 노래마다 질감이 달랐다. 성량과 발성을 다 다르게 했다"며 "개성을 중요시하는 대중음악 가수로서 큰 단점으로 작용했던 부분"이라고 알렸다. "어떤 곡을 불러도 '박기영'처럼 느껴지게 갈 것이냐, 아니면 곡마다 특성을 맞춰 이 노래를 전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냐. 둘을 놓고 15년 동안 고민했는데 결국 후자였다." 이런 특성이 팝페라를 부르는데도 반영된 셈이다.
'시작' '블루스카이' 등 록 기반 시원한 노래들로 인기를 끈 박기영은 이번 팝페라, 작년 자신의 어쿠스틱 음악 밴드 '어쿠스틱 블랑' 음악 등 최근 감성적인 노래를 주로 들려주고 있다. 2010년 결혼, 2012년 출산에 이은 '워킹맘' 등 현실적인 일들을 겪은 뒤다.
"'어 프리메이라 페스타'는 (기술적인 작업방식만 놓고 보면) 어느 앨범보다 소홀했던 작업이다. 아기가 아프고 남편도 아파서 소리를 내는 작업을 많이 하지 못했다. 대신 생각을 많이 했다. 애를 재우면서 어떻게 부를지 고민을 하기도 하고…. 그런 작업들이 기초가 돼 소리를 낼 때 길을 자연스레 찾아서 가게 되더라. 엄마가 되면서 삶이 전복됐는데 (웃음) 노래를 한다는 것보다 가사를 전달하는, 즉 표현에 더 신경을 쓰게 되더라.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내 의지대로 돌아가는 게 없다는 거다. 그러다 보니 감정을 전달하고, 상대방 마음을 알아내면서 그런 걸 알게 된 듯하다."
이번 앨범은 클래식 명가 레이블 소니 클래시컬을 통해 발매된다. '팝페라 가수' 박기영으로서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팝페라테너 임형주와 17년 동안 함께한 수석 프로듀서로 박기영 데뷔 때부터 함께 작업을 해온 이상훈이 프로듀싱했다. 그는 "박기영이 정서적으로 많이 성숙했다"며 "예전에는 작업을 할 때 노래를 참 잘한다는 생각만 강했는데 이번에는 감상한다는 느낌을 갖고 작업했다. 그만큼 감성적으로 들렸다"고 전했다.
소속사 포츈엔터테인먼트는 "크로스오버 가수들은 대부분 성악 전공자들"이라며 "대중가수 출신이 정식 크로스오버 앨범을 내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짚었다. 클래식 음악 평론가 최윤구는 "박기영의 음반은 드물게 신선한 팝페라 음반"이라며 "대중음악 가수다운 감수성으로 소화낸 곡들이 담겼다"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