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이 나가지 않자 울어
올해는 인천을 통해 야구가 들어온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지난 7월16일 인천 문학구장에서는 야구 100년을 기념하는 프로야구 올스타전이 열렸다. 옛날의 명선수와 아마투어 팀에서 뛰었던 명감독이 시합을 벌였는데 이 행사에서 ‘인천 야구의 대부’인 박현식이 시구에 나섰다. “시구를 하는데 볼이 나가지 않았어요. 그러자 우리를 보면서 너무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울었습니다.” 박현식과 막역했던 원로 야구인 김양중 씨(76)는 그것이 박현식의 살아있는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육척장신으로 힘이 장사였던 그는 l지난 5월, 난데없이 위암 판정을 받았다. 그리곤 정확하게 99일만에 세상을 떴다. “평소 어찌나 건강했던지 늘 ‘네가 죽으면 내가 깨끗이 처리해주고 갈테니 그리 알아’하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친한 친구가 가버리니 굉장히 외로워요.” 박현식도 자신의 병을 인정하지 않았다. “6월에 전화가 왔는데 ‘내가 병원에 입원해버렸다. 위암 그까짓 거, 수술해버리면 되지’하면서 큰소리 뻥뻥 치고 있었어요. 그러나 부인한테 들으니 벌써 폐까지 전이돼 3개월에서 6개월까지 밖에 못산다고 하더라고요.”
“지금도 전 포지션을 잘할 수 있는 선수가 없어요.”
“잘 때리고, 잘 던지고, 잘 달리는 야구 천재의 조건을 모두 갖춘 선수였죠. 지금까지 전 포지션을 다 잘할 수 있는 선수가 없어요. 잘 한다는 선수도 포수면 포수, 타자면 타자 하는 정도죠. 박현식은 투수로 시작했으나 포수, 외야수, 내야수, 투수 그리고 타자였어요. 만능선수였습니다. 키가 180, 몸무게가 95kg이었고 100m를 14초에 뛰어요. 말처럼 잘 뜁니다.” 그는 1950년대부터 1968년 제일은행 선수로 선수생활을 마감할 때까지 112개의 홈런을 친 우리나라 최초의 홈런왕이었다. 그리고 절대 물러서지 않는 4번 타자였다. 김양중 씨는 박현식을 지금 시대에 태어났으면 가장 먼저 메이저 리그에 진출해 진가를 발휘하고 있을 선수라고 말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이승엽 같은 유명한 홈런왕이었죠. 이승만 대통령 때에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었다면 해외에 진출한 1호가 박현식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나라에서 허락해 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뒤에 백인천 선수가 처음 해외에 진출했습니다. 체격 좋고 방망이 좋고 어깨가 좋았으니 메이저리그 1호로 갔다면 박현식은 정말 유명한 선수가 됐을 겁니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1954년 12월, 우리나라 야구가 처음으로 해외 경기에 출전했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제1회 아시아선수권대회가 열린 것이다. 이 대회에 ‘황금의 삼각 라이벌’로 불렸던 박현식, 김양중, 장태영(99년 작고 당시 70)이 나란히 출전했다. 그해 박현식은 홈런왕을 차지했다. 격년으로 열렸던 이 대회에 박현식은 연속 6회, 12년을 출전했고 제6회 대회가 끝난 뒤 특별상(철인상)을 받으며 ‘동양의 철인’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지금도 마닐라 리잘 경기장에는 박현식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김양중 씨는 “그만큼 건강했고 진짜 야구를 한 사나이었죠”라고 말했다.
황금의 삼각 라이벌
박현식이 처음 야구를 시작한 것은 인천 동산중(현 동산고) 시절이다. 이 학교 상업교사로부임한 형 박현덕이 야구부를 만들었고 그때부터 야구부에서 투수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원래 형제가 8남매인데 6.25사변이 나서 네 식구만 남쪽으로 내려왔어요. 그 양반이 일곱 살 때 인천에 정착했고 가족 4명은 이북에 남아 있어요. 집안 형제들이 모두 운동에 소질이 있었습니다.” 맏형 박현명은 1938년 우리나라 선수로는 처음으로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해 오사카 타이거즈에서 활약했던 인물이다.
박현식이 동산중에서 투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1946-49년, 영남과 호남에서도 출중한 투수가 나왔다. 경남중에 다니던 장태영은 제2,3회 청룡기 대회를 우승으로 이끈 선수. 이때 광주서중(뒤에 광주일고)에는 김양중이 투수로 활약하며 호남 최초로 제4회 청룡기대회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김양중 씨는 “그때부터 호남 야구가 싹트기 시작해 오늘날 선동렬, 김병현, 서재응, 이종범 같은 선수를 배출하게 된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동산고가 야구명문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전적으로 박현식의 활약 때문이었다. 셋은 라이벌이면서 친구로 육군에서 다시 뭉쳤다. “49년 학교를 졸업하고 모두 실업팀에서 선수로 뛰고 있었는데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하면서 좀 여유가 생기니까 3군이 모두 운동팀을 만들려고 꿈틀거리고 있었어요. 당시 박현식은 카튜사로 있었고 장태영은 통역장교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나도 육군팀에 뽑혀간 거죠.” 김양중 씨는 육군 야구팀의 전성기는 황금의 트리오가 활약하던 1955년에서 58년이라고 말했다. 셋은 1982년 프로야구가 탄생할 때 출신지역에 연고가 있는 롯데(장태영), 해태(김양중), 삼미(박현식)의 감독직 제안을 받는다. 이때 박현식만이 삼미수퍼스타즈 감독직을 수락했다. 그러나 박현식은 13경기만에 감독직에서 해임되었고 삼미는 만년 꼴찌팀으로 남았다.
“명선수가 절대 명감독은 아니다”
이 말은 박현식을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김양중 씨는 “그 양반은 삼미감독으로 가서는 불만투성이었죠. 선수들이 못한다고.” 삼미는 회사의 재정상태가 약한데다가 선수들의 기량도 떨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감독의 책임도 있었다. 박현식은 선수시절 펄펄 날던 자신의 경우만을 생각해 다그치기만 했다. 선수들은 주눅 들고 무서워서 제 기량도 발휘하지 못했다. 김양중 씨는 “좋고 나쁜 것을 많이 가려 야구를 잘하는 선수는 좋아했고 못하면 무시했어요. 자기가 그렇게 하니까 어지간한 선수는 완전 무시하는 거죠. 늘 자기가 최고라는 생각에 가득 차 있어요. 그래서 내가 매번 ‘개개인의 선수가 다 한계가 있는데 그것을 망각하고 너만 따르라고 하면 선수들 가랑이가 찢어져 넉다운된다, 왜 못 따라오느냐고만 하는데 너는 특별선수야, 어떻게 그 선수들이 따라오겠느냐?라고 하면 수긍을 하곤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글 | 김예옥 출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