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홍경의 기자] 정부가 반도체 경기 호황으로 세수가 늘어나자, 내년도 총지출을 800조원 이상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역대 최대 규모의 확장 재정이 될 전망이다. 정부는 대규모 지출 구조조정과 세수 증가를 통해 재정 건전성도 함께 끌어올릴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미 고환율과 고유가로 인해 물가 부담이 커진 상황이라, 추가적인 재정 지출까지 더해질 경우 물가 상승세가 더 뚜렷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기에 더해, 한국은행이 물가 억제를 위해 긴축적인 통화정책을 예고하고 있어 정부의 확장 재정 정책과 충돌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고금리가 장기화하면, 가계와 자영업자의 이자 부담이 늘고 기업의 자금 조달 비용도 더욱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물가 상승 압력이 큰 만큼, 정부가 재정 지출 확대 속도를 잘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실제로 세금이 예정보다 더 많이 걷히더라도 곧바로 지출하는 대신, 국가 채무를 줄이는 데 먼저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내년 총지출 800조원 돌파…5년 만에 190조원 늘어 16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은 지난 13일 청와대에서 열린 '2026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2027년도 예산안 편성 방향과 중기 재정 운영 계획을 발표했다. 기획처는 내년도 총지출 예산을 800조원 이상으로 잡았다. 올해 본예산 727조9000억원과 비교하면 10% 넘게 늘어난 수치이다. 총지출은 2022년 607조7000억원, 2023년 638조7000억원, 2024년 656조6000억원, 2025년 673조3000억원, 2026년 727조9000억원으로 꾸준히 증가해왔다. 내년도 총지출이 800조원을 넘으면, 5년 만에 190조원 이상 불어나는 셈이다. 정부는 이 예산을 반도체, AI 데이터센터, 피지컬 AI 등 3대 메가프로젝트에 우선 투입하고, 청년 세대, 신성장동력, 지방, 인재 등 4개 주요 분야에도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지출이 크게 늘어나도 국내총생산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오히려 낮아져, 재정 건전성이 한층 개선될 것이라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반도체 호황에 따라 국세 수입이 크게 늘고, 강도 높은 지출 구조조정 효과도 반영된 결과라는 설명이다. 기획처는 2027년 국세 수입이 500조원 이상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애초 예측했던 412조원보다 88조원 넘게 많은 규모이다. 또 재정사업을 처음부터 다시 들여다봐 재량지출은 15%, 의무지출은 10% 감축하고, 사업 폐지도 10%까지 추진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지출 구조조정 규모를 전년 대비 두 배 수준인 50조원으로 대폭 늘릴 방침이다. 이런 대규모 지출 확대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관리재정수지와 국가채무비율 등 주요 재정지표들이 애초 목표보다 더 개선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확장 재정에 물가 압력↑…“내년에도 오름세 이어질 듯”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대규모 재정지출이 이미 높은 물가 상승 흐름에 또 한 번 불을 붙일 수 있다는 점이다. 올해 상반기 고환율·고유가로 인해 소비자물가 부담이 커진 상황에서, 반도체 호황에 따른 경기 회복과 확장재정 정책까지 더해지면 수요 측 물가 압력도 한층 거셀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기 대비 3.2%를 기록해 2023년 12월 이후 최고 수준을 나타냈다. 고환율, 고유가의 영향이 시차를 두고 반영되는 만큼, 3분기에는 상승률이 3%대 중반까지 오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상반기 고유가와 고환율의 영향이 다소 시차를 두고 3분기 물가에 반영될 것”이라며, “여기에 경기 회복으로 소비와 투자가 살아나면 수요 쪽 압력까지 더해져 3분기에는 물가 오름세가 한층 뚜렷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미 국내외 주요 경제기관들은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한국은행의 물가안정목표인 2%를 크게 웃돌 것으로 보고 있다. 한은과 한국개발연구원, 아시아개발은행은 올해 물가상승률을 2.7%로 전망했으며, 경제협력개발기구와 국제통화기금은 각각 2.6%, 2.5%로 내다봤다. 특히 기획처는 이번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올해 경상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4.9%에서 12.3%로 크게 높였고, GDP 디플레이터 상승률도 9.0%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GDP 디플레이터는 명목GDP를 실질GDP로 나눈 값으로, 국내에서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의 전반적인 가격 변화를 보여주는 지표다.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5년간 GDP 디플레이터의 평균 상승률이 2.8% 정도였던 점을 감안하면, 이번 상승 압력은 최근 평균치의 약 3.2배에 이르는 셈이다. 여기에 정부의 대규모 재정지출로 소비와 투자 수요까지 증가하면 내년에도 높은 물가 상승이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황성현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는 “GDP 디플레이터가 9%까지 오르는 일은 상당히 이례적”이라며, “이처럼 물가 압력이 큰 상황에서 정부가 재정지출까지 크게 늘린다면 내년엔 물가가 더 치솟아 서민 부담이 더욱 무거워질 수 있다”고 꼬집었다. 한은 '긴축통화' 기조와 정책 충돌 우려…서민 부담 커질 수도 정부가 내년도 총지출을 올해보다 10% 이상 늘릴 경우, 한은이 물가 안정 차원에서 긴축적인 통화정책을 펴는 상황과 정책 방향이 어긋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신현송 한은 총재가 이미 “목표치를 웃도는 물가 오름세 등을 감안할 때 기준금리를 인상할 필요가 있다”고 여러 차례 밝혔던 만큼, 한은의 긴축 방침은 사실상 기정사실화됐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대규모 재정지출로 소비와 투자를 자극하면, 한은의 물가 안정 효과는 약해지고, 결국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한층 더 올리거나 높은 금리를 장기간 유지할 가능성도 커진다. 이렇게 되면 가계나 자영업자의 이자 부담이 늘고, 기업들도 자금 조달 비용이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한국은행이 박성훈 국민의힘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대출금리가 0.25%포인트 오를 때 전체 가계대출 차주의 연간 이자 부담은 약 3조 2천억원 증가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차주 1인당으로 보면, 1년에 약 16만 3천원을 더 부담해야 하는 셈이다. 만약 금리가 0.5%포인트 상승하면 1인당 추가 이자 부담은 32만 7천원까지 불어난다. 또 경기 둔화나 반도체 업황 악화 등으로 세수가 기대만큼 늘지 않을 가능성도 변수로 꼽힌다. 정부가 부족한 재원 마련을 위해 국채 발행을 늘리면 시장금리가 뛰고, 그만큼 기업 자금 조달 비용도 덩달아 오른다. 정부가 반도체와 AI 데이터센터 투자 지원을 위해 재정을 크게 늘렸지만, 정작 금리 인상으로 민간 투자가 위축되는 이른바 ‘구축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점도 부담이다. 황 교수는 “한은이 금리를 인상하려는 상황에서 정부가 세수 증가만 믿고 지출을 확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재정정책 또한 통화정책 기조에 맞춰 긴축 방향을 함께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세수가 500조 원 이상 걷힐 걸로 예상되는데, 이렇게 늘어난 세수보다 지출을 더 크게 확대한다면 사실상 국가채무를 줄이겠다는 의지가 없다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또 “확장 재정 정책으로 수요가 자극되면 물가와 집값이 오를 수 있고, 그 부담이 결국 서민들에게 전가될 수 있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이어 양 교수는 “지금은 물가 상승 압력을 줄이기 위해 통화당국과 재정당국이 힘을 합쳐야 할 때”라며, “세수가 크게 늘어난 상황은 국가채무를 조정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만큼, 늘어난 세수를 우선적으로 국가채무 상환에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