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와 권력, 언어와 욕망, 이데올로기와 무의식의 조합에 관한 서양의 이론을 녹여 동양 고전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해온 김근 교수가 한자에 숨어든 권력 담론과 그 너머에 존재하는 잉여와 역설을, 동전의 양면을 번갈아 보이듯이 드러냈다.
욕망을 대변한 과정과 이치
중국은 대략 40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한 국가 체제를 유지해온 나라다. 중국은 오랜 시간 그 모습으로 존재해왔기에 특별히 기이한 현상은 아닌 걸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저마다 다른 정서와 시각을 지닌 개인이 모인 한 사회 틀 안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통일을 유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구성원 사이에 상호 이익에 근거한 느슨한 연합 형태라면 모를까 종족이나 민족 정서와 같은 정체성에 근거한 전체주의적인 통일이라면 더욱 유지하기 어렵다. 한 통일 체제로서 4000년의 역사를 유지해온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면, 여기에는 어떤 인위적인 힘이 작용했을 터인데 중국인들은 그 힘을 한자에서 찾는다. 국가와 사회의 분화는 대개 언어의 분기에서 비롯되는데, 중국 역시 방언의 복잡한 분기로 인해 의사소통이 어려워 분화 분열의 위험이 상존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이미지로 소통하는 한자를 문자로 쓴 덕에 이 난관을 극복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먼저 이러한 주장이 일리 있다고 받아들이되, 단순히 의사소통만 된다고 해서 한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짚어낸다. 중국에는 역사의 흐름을 뒤바꿀 만한 획기적인 혁명이 없었다. 저자는 그 이유를 상징 주변에서 배회하는 잉여가 세력화되지 않도록 모순을 적절히 흡수해왔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면서 모순과 역설에 적응할 줄 아는 존재론적 사유 방식이 중국 문화에 전반적으로 전이된 현상을, 적벽대전과 잘 알려진 새옹지마 고사, 루쉰의 ‘아Q정전’의 장면, 역설을 담은 한시 등을 인용해 설명한다. 중국은 넓은 대륙을 하나의 통일국가로 유지하고자, 이상적인 국가 및 사회 체제와 그 속에 사는 인간의 바람직한 인격상을 관념적인 틀로 만들어놓고, 이를 한 이념으로써 세계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는 통치 방식을 채택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무(無) 위에 세워진 관념적인 사상 체계를 사람들이 당연한 이치로 받아들이게 하려면 문화적 도구나 통로가 필요했는데, 그 역할을 한자가 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한자가 중국인들의 욕망을 제조하고, 그 욕망을 대변해온 과정과 이치를 주장하고자 한자의 언어학적 특성과 주체들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환상을 억압해 권력의 담론을 헤게모니로 인식하도록 기획한 과정, 역사의 흐름에 따른 한자 서체의 발전 과정을 서술한다. 또 역대 권력의 이데올로기 생산 과정에서 산출된 결과물인 ‘설문해자’가 어떤 책인지를 설명하고, 표의 기능, 관념을 형성하는 기능을 통해 한자가 헤게모니를 구성하는 원리, 육서를 통해 한자가 구성하는 사물의 질서를 밝힌다. 한자가 중국을 통치해온 과정을 분석하는 이러한 서술의 흐름 안에 언어학과 서양 철학의 관점이 녹아든 퓨전적 해석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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