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김수정 기자] 박근혜 정부 비선실세로 최순실씨가 국정농단을 자행했다는 의혹이 일파만파로 퍼지고 있는 가운데 박 대통령과 최순실씨의 연결고리인 고(故) 최태민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멘토 역할을 해온 것으로 알려진 최태민씨는 생전에 다수의 직업과 전과 기록을 가진 것으로 전해지지만 정확한 실체는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다.
이름을 7번이나 바꾼 것으로 전해졌고 직업도 경찰, 군인, 언론사 사장, 불교단체 부회장, 농민회 차장, 정당 중앙위원에 심지어 신흥종교 창시자까지 다양했다. 그는 통상 '목사'라고 불리지만 정식으로 안수를 받았는지 등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박 대통령이 영애였던 시절은 물론 청와대 퇴거 이후에도 박 대통령을 좌지우지했다는 지적이 파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태민은 누구?
최태민씨는 1912년 황해도 출생으로 일제시대 경찰업무를 하다 해방 이후에 승려가 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 후 천주교 세례를 받는 등 종교인 활동을 하면서도 혼란스러운 행적들을 많이 남겼다. 서울과 대전 일대에서는 난치병을 치료한다는 등 사이비 종교 행각을 벌이기도 했으며, 불교, 기독교, 천도교를 종합한 사이비 종교인 '영세교'를 만들어 교주로 활동했다. 당시 그는 '원자경', '칙사' 또는 '태자마마'라는 호칭을 자처했고 스스로를 '단군', '미륵'이라 칭하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최씨는 요즘도 흔히 '목사'로 지칭된다. 최씨가 실제 목사로 재직한 기간은 1912~1994년이다. 하지만 기독교계에서는 그를 목사로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관계자는 "최씨가 어디에선 목사라고 하고, 또 어디에선 승려 행세를 했던 모양"이라며 "정확한 신분이나 소속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하는데 현존하지도 않고 알 수 없는 곳에서 받았는지 확인이 안 된다"고 말했다.
또 최씨는 잦은 개명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최씨는 1927년 보통학교 졸업 당시 최도원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이후 최상훈, 최봉수로 이름을 바꿔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954년 절에 들어가며 최퇴운으로 개명했다가 1969년엔 천주교에서 공해남이라는 세례명을 받고, 1970년대 영생교를 창시해 교주 노릇을 하면서는 '방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현재 알려진 이름 '최태민'은 1975년 대한구국선교단을 설립하면서부터 사용한 것이다.
최태민씨는 6명의 부인과 슬하에 3남 6녀를 뒀다. 영적 후계자로 낙점 받은 것으로 알려진 '비선 실세' 최순실씨는 그의 다섯번째 딸이다. 이처럼 아버지의 정치적·종교적 영향을 최순실씨가 물려받아 박 대통령을 통해 국정을 농단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일각에서는 최씨가 일찌감치 순실씨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박 대통령과 가까이 지내도록 했다는 설도 나온다. 최씨는 서울 강남구 자택에서 칩거하다 1994년 노환으로 숨을 거뒀다. 당시 순실씨는 최씨로부터 수백억원대 재산을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박근혜 대통령과의 인연
최태민씨와 박 대통령의 인연은 1974년 모친 육영수 여사의 피격 사망으로 시작된다. 박 대통령 모친 육 여사가 비명에 숨진 뒤 최씨는 박 대통령에게 수차례 편지를 썼다. 편지에는 '육 여사가 세 차례 자신에게 나타나 근혜를 도와주라고 현몽했다'고 적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심리적 고통에 시달리는 박 대통령 앞에서 육 여사의 표정과 음성을 자주 전했다고 한다. 항간의 소문에 따르면 최씨에게는 사람을 현혹시키는 약간의 심령술 소질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때문에 박 대통령이 최씨에게 심리적으로 상당히 의존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이런 최씨를 1970년대 중반부터 대한구국선교단, 새마음봉사단 등의 활동을 함께하며 인연을 쌓아온 것으로 전해진다. 박 대통령은 이 단체의 명예총재가 돼 여러 행사에 참여하게 된다. 최씨는 당시 대통령 딸의 지위를 불법적으로 이용해 온갖 전횡을 저질렀다.
그는 기업총수 60여명을 불러다가 거액을 구국봉사단에 내게 하고 온갖 행정기관의 지원 속에 부정부패를 일삼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1977년 중앙정보부 수사보고서에 따르면 최씨가 저지른 횡령, 사기, 이권 개입 등 권력형 범죄만 44건이었다. 이밖에 여성 관련 추문들도 12건이 있었다.
그러는 사이 청와대에 진정이 이어지고 결국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박 전 대통령은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에게 조사를 지시한 뒤 최씨를 직접 불러 청와대에서 '친국(직접 심문)'까지 시행했지만 박 대통령은 최씨의 무죄를 읍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재규 "10·26 사건 원인 중 하나"
1979년 10월26일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권력 실세 중 한 명이었던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그를 총격 살해했다. 김재규는 살해 혐의와 관련 항소이유서에서 최태민과 박 대통령의 관계가 10·26 혁명의 원인이라고 언급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최씨를 처벌하지 않은 데 대한 큰 불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007년 신동아에 게재된 박 대통령 관련 기사를 살펴보면 박정희 대통령을 피격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항소심에서 최태민 관련 내용이 처음 등장했다고 전했다. 기사는 '재판과정에서 김재규 변호인은 항소이유서와 항소이유 보충서를 군법회의 측에 제출했는데 이 서류에 최태민 관련 내용이 처음 등장했다'며 '10·26 사태(박정희 피격 사건)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논거의 하나로 최태민을 거론했다'고 밝혔다.
당시 항소이유 보충서에는 '구국여성봉사단이란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양이었는 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의 대상이 돼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하다'며 '그럼에도 큰 영애(박근혜 대통령)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다'고 적힌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박정희 대통령은 직접 친국까지 시행했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했으면서도 큰 영애를 그 단체에서 손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하고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렸다'고 전했다.
박근령·박지만도 "최태민 벗어나야"
최씨가 박 대통령을 이용하고 있다는 주장은 가족들에게서도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의 친동생 박근령씨와 박지만 EG회장이 1990년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게 자필 탄원서를 제출했다. 오마이뉴스가 보도한 탄원서에 따르면 "최태민은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자신의 축재행위가 폭로될까봐 계속 저희 언니(박근혜)를 방패로 삼아왔다", "각종 육영사업, 장학재단, 문화재단 등 추모사업체에 깊숙이 관여해 회계장부를 교묘한 수단으로 조작하여 많은 재산을 착취했다", "공익사업들이 오로지 최태민 휘하에서 최태민 마음대로 움직이고 운영되는 최태민 개인소유물이 되고 말았다" 등의 내용이 나온다.
편지에서 박근령씨는 "저희 언니(박근혜)는 최씨에게 철저히 속은 죄밖에 없다. 속고 있는 언니가 너무도 불쌍하다"며 "이번 기회에 저희 언니가 구출되지 못하면 언니와 저희들은 영원히 최태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의 장난에 희생되고 말 것"이라고 썼다. 박지만씨도 지난 1990년 12월 우먼센스와의 인터뷰에서 "큰누나(박근혜)와 최씨와의 관계를 그냥 두게 되면 큰누나를 욕먹게 하고, 부모님께도 누를 끼치게 되는 것 같아 떼어놓으려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변곡점에는 항상 최태민씨에 대한 의혹이 따라다녔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에도 최씨 일가와의 관계에 대한 의혹이 다수 제기됐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최씨와의 관계가 문제가 될 때마다 매번 의혹을 부인하고 최씨를 옹호해 왔다.
당시 박 대통령은 최태민 비리 의혹과 관련 "당시 아버지가 대검에 조사를 지시했는데, 만약 그때 횡령·이권개입 등이 드러났다면 평소 친척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관리하던 아버지의 성정상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답변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