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중앙교회'검색결과 - 전체기사 중 371건의 기사가 검색되었습니다.
상세검색흔히 사람들은 남보다 더 나은 분야가 있으면 그것을 내세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더구나 자기 자랑으로 넘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든지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이 가진 것을 드러내 알아주기 원하며 우쭐대지요. ‘자랑’이란 간단히 말해 ‘자기를 드러내는 것, 자기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자랑을 잘하는 사람은 대부분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데에는 몹시 인색합니다. 남이 드러나는 만큼 자신이 가려진다고 생각하니 어찌하든 상대를 깎아내리려고 하지요. 이처럼 자기를 자랑하는 마음은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영적인 사랑과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자기 자랑을 하면 높아지고 인정받을 것 같지만, 진심 어린 존경이나 사랑을 받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시기, 질투를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사랑의 항목 중에 ‘자랑하지 않는 것’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드러내 자랑하는 이유는 마음 안에 ‘이생의 자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생의 자랑’이란 자기만족과 쾌락을 위해 자신을 드러내고 우쭐대는 속성으로, 죄악 된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2:15~16에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자기 자랑이 많은 사람은 대부분 남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느끼므로 쉽게 교만에 빠집니다. 자기가 잘나서 일이 술술 풀리고 잘되는 줄로 착각하여 우쭐대거나 나태해지기 쉽지요. 그런데 성경 66권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특히 싫어하시는 악 중에 하나가 ‘교만’입니다. ‘교만’이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 내가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교만은 자신보다 못해 보이는 상대 앞에 나타나지만, 심한 경우에는 자신을 가르쳐 주고 이끌어 준 사람이나 질서 상 윗사람까지도 무시할 수 있습니다. “뭘 모르고 저렇게 말씀하시네.”라고 불평하거나 “그 정도는 나도 아는데…” 하며 상대의 말을 잘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양심이 다르고 지식도 다릅니다. 이는 보고 들으며 배우고 체험한 것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지식 중에는 오류도 많고, 스스로 엉뚱하게 입력한 것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굳어지면 자신만의 ‘의’와 ‘틀’이 형성됩니다. ‘의’란 자기가 옳다고 하는 것이며, 이것이 굳어지면서 ‘틀’이 됩니다. 성격이 틀이 되기도 하고 자기가 아는 지식이 하나의 틀이 되기도 하지요. ‘틀’은 사람의
시기, 질투가 있으면 다른 사람이 잘되거나 사랑을 받을 때 마음이 불편합니다. 나보다 지식이 많고 부유하며 능력이 많은 사람을 보면 자존심이 상하고, 비슷한 조건을 가진 상대가 승승장구하면 부러움을 느끼지요. 심지어 상대가 밉고 그가 가진 것을 빼앗고 싶어집니다. 한편으로는 ‘저 사람은 인정받고 사랑받는데 나는 뭔가? 왜 나는 늘 이 모양인가?’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기, 질투가 심해져서 악한 말과 행동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투기’입니다. 그러면 투기의 유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먼저, 이성간의 사랑에서 비롯된 투기가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 야곱에게는 레아와 라헬이라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야곱의 외삼촌 라반의 딸들로서 자매지간입니다. 언니 레아는 외삼촌의 속임수로 뜻하지 않게 맞이한 아내였고, 동생 라헬은 야곱이 연애하여 무려 14년이나 외삼촌에게 봉사하고 얻은 아내였습니다. 그러니 야곱은 자연히 라헬을 더 사랑했지요. 그런데 라헬은 언니 레아가 아들을 네 명이나 낳는 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자 끊임없이 언니를 투기합니다. 남편을 괴롭히기까지 하지요. 이후에도 라헬과 레아는 자신들의 몸종을 남
흔히 성품이 유순해서 누가 뭐라 해도 화내는 일이 없고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은 사람을 온유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순하고 착해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착함이 아니라면 진정 온유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온유함’은 마음에 악이 없고 지혜로우며 영적인 사랑이 맺혀 있어 어떤 악한 사람도 대적하지 않고 포용하는 것입니다. 물론 온유하다 해서 무조건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사람을 반듯하게 다스리고 이끌 수 있는 위엄도 함께 갖추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 온유한 사람은 선할 뿐 아니라 행동이 반듯하고 지혜롭습니다. 영적인 온유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의 악을 버리고 성결되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 마음 안에 미움, 시기, 질투, 자기 의와 틀이 있으면 상대를 품지 못합니다.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기보다 판단 정죄하고 수군수군합니다. 누군가에게 지적을 받으면 발끈하고 마음이 상합니다. 누가 귓속말을 하면 내 험담은 하지 않나 힐끗힐끗 쳐다보고 판단하지요. 그러므로 마음에 악이 없는 것은 온유함의 기본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결해야 ‘온유하다’ 인정해 주십니다. 마음에 악이 없어야 상대를 선과 사랑으로
우리가 무엇이든지 심은 대로 열매를 거두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며 영계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방법으로 심고 거두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방법으로 심으면 누르고 넘치도록, 30배, 60배, 100배로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풍성히 거두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감사함으로 심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증거입니다. 만일 직분자라는 의무감 속에 충성하면서 물질을 심은 뒤 ‘심었는데 왜 축복을 안 주시지?’ 하며 불평한다면 온전한 열매를 거둘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11:6에 기록된 대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증거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향입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심을 때 억지로나 의무감 속에 드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고 감사해 항상 최선을 다해 드려 왔고, 더 드리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뿐이었지요. 생활이 어려운 초신자 때에도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드리길 즐겨했고, 지금껏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제 시간과 물질, 가족, 제 생명까지도 중심에서 기뻐하며 드려 왔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오래 참음은 사랑을 이루는 데에 가장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데 있어 만나게 되는 여러 시련과 나 자신에 대해 끝까지 참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하고자 노력할 때 오는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이 오래 참음의 사랑이지요. 요즘에는 상대가 자신의 신변이나 재산에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면 쉽게 고소합니다. 도리어 참고 가만히 있으면 “바보처럼 산다”고 조롱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 5:39~40) 말씀하십니다.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똑같이 악으로 갚지 말고 참아 주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선을 베풀라고 하시지요. “억울하고 분해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도 아낌없이 주신 주님을 사랑한다면 어찌 참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미움, 혈기 등의 감정을 억지로 꾹꾹 눌러 참았다가 한계에 다다르면 폭발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핍박받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것이 참되고 영원한 복이라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10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하셨지요.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이란, 성도들이 의로우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진리와 선, 빛을 좇아 살 때 받는 핍박을 말합니다.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면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디모데후서 3:12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 보면 어려움을 당하거나 애매히 핍박을 받기도 하지요. 이 세상은 어둠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에게 속했기에 빛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12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핍박 중에도 믿음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반면 지혜롭지 못하므로 핍박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음으로 죄가 들어오자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모두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죄의 담으로 가로막히게 됐지요. 예수님께서 죄로 인해 원수 된 모든 인류와 하나님 사이에 화평을 이루고자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달려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평케 하시며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모든 분야에서 화평의 열매를 맺기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5:9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화평을 이룰 수 있을까요?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과는 화평을 이루기 쉽지만 힘들게 하는 사람과 화평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2:14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말씀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뿐 아니라, 나를 미워하고 괴롭게 하는 사람과도 화평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을 이루려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의 담으로 가로막히게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마음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고 오로지 진리 안에서 정결하고 깨끗해 악이나 무례함은 생각지도 아니하며 불의를 조금도 기뻐하지 않는 흠도 점도 없는 진리의 선한 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과 사랑으로 마음을 청결하게 만든 사람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 중 여섯 번째는 마음이 청결한 자가 누리는 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청결을 이루고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악독한 마음을 숨긴 채 율법은 물론 장로의 유전까지도 철저히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겉으로는 거룩한 척했지만 마음은 온갖 죄악으로 가득한 그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셨지요. 거룩하고 온전하신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악한 행위는 물론 마음속 죄까지도 다 벗어 버리고 청결한 마음을 갖기 원하십니다(벧전 1:16, 살전 4:3). 청결한 마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투고 혈기 내던 사람은 혈기를 버리고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돼야 합니다. 교만하던 사람은 낮아지고 섬기며, 미워하던 사람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화돼야 하지요.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진리로 채워 가는 만큼 청결한 마
[시사뉴스 신선 기자] 지난 1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처음 발생한 이후 서울에서 그동안 170여개에 달하는 집단감염이 발생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로 인해 전체 확진자 중 약 52%가 집단감염 관련인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상반기만해도 콜센터, 클럽, 교회, 물류센터 등에서 집단감염이 주로 발생했다면, 하반기에는 교회와 집회 등 대규모 집단감염 발생 후 학원, 직장, 어린이집, 버스 등 일상생활 곳곳에서 크고 작은 산발적인 집단감염이 지속되고 있다. 이재갑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8일 "집단감염이 일상 곳곳에서 발생한다는 건 그만큼 지역사회에 축적된 감염이 많다는 방증"이라며 "특히 수도권에 잠복된 확인되지 않은 감염자들이 많은 만큼 앞으로 일상적인 상황 속에서 감염병 대응력을 어떻게 올릴 수 있을지 여부가 숙제인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9개월간 집단감염 170여개…확진자 약 52% 집단감염 사례 서울시 등에 따르면 지난 1월20일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발생한 이후 전날까지 서울에서 누적된 집단감염 개수는 170여 개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 5일 기준으로 주요 감염경로별 발생률은 종교시설 관련 20.8%(1
긍휼의 사전적 의미는 ‘가엾게 여긴다, 불쌍하게 생각한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긍휼은 ‘누가 범죄하거나 자신을 힘들게 할 때, 중심에서 용서하고 사랑으로 권면해 주는 마음’이지요. 이는 성령의 9가지 열매 중 양선의 마음과 비슷하지만 이보다 더 깊은 차원입니다. 양선은 ‘악이 전혀 없으며 오직 선만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양선의 마음이 행함으로 나타나되 상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더한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 긍휼이지요. 팔복 중에 다섯 번째 복은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 임하는 복입니다. 긍휼의 마음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첫째, 한없는 용서의 긍휼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2:20을 보면 예수님께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는 양선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생명을 주는 더한 사랑으로 용서의 긍휼을 베푸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상한 갈대란,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즉시 징벌하지 않고, 어찌하든 참고 기다리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있으면 미워하고 다투며 상대의 허물을 들
모세가 출애굽시킨 이스라엘 백성은 장정만 해도 60만 명으로,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면 족히 200만 명이 넘을 것입니다. 이들은 모세가 큰 권능을 보여 주어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원망 불평하고 하나님 뜻을 거역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을 이끌고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했다는 것은 모세의 온유함이 얼마나 승했는지를 알려 줍니다. 민수기 12:3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했습니다. 이처럼 사랑과 온유함이 승한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된 자라 칭찬하시며 친구와 같이 대면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모세는 천국에서 얼마나 영화로운 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행복을 누리고 있겠습니까? 과연 온유한 자란 어떤 사람이며 하나님께서 어떠한 축복을 내려 주실까요? 흔히 성품이 순해서 쉽게 화를 내지 않거나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고, 또 소극적이고 유약하거나 친절하게 남의 얘기를 들어 주면 ‘온유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온유한 것으로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마음에 어떤 불편함도, 싫어함도 없이 선한 마음으로 상대를 부드럽고 따뜻하게 품어 줄 수 있어야지요. 이런 온유한 마
사람들은 물질의 어려움, 질병의 고통 등을 만나면 한탄하며 슬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기감정 속에서 슬퍼하는 육적인 애통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해도 기뻐하기를 원하십니다. 혹자는 “기쁜 일이 있으면 기뻐할 수 있지만 시련 중에 어떻게 기뻐할 수 있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은 구원받고 천국을 약속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아뢰면 문제를 해결받을 것을 믿기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팔복의 말씀 중 두 번째 복은 ‘애통하는 자는 자의 복’입니다. 여기서 애통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영적인 애통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영적인 애통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요? 먼저, 회개의 애통이 있습니다. 처음 주님을 영접해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사실을 깨닫고 눈물 콧물을 흘리며 통회자복 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애통이지요.
대개 사람들은 부유하고 명예와 권세가 있으며, 가족이 건강하고 화목하면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는 참되고 영원한 복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에 사라질 수 있으며,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면 더 이상 소유할 수 없고 사후의 세계로 가져갈 수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온갖 복을 다 누렸다 해도 내세를 준비하지 않고 살았다면 아름다운 천국이 아닌 지옥에 갈 수밖에 없으니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5장에는 예수님의 산상설교 중에 유명한 팔복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팔복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히 누릴 수 있는 참된 복으로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되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팔복을 소유하면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팔복 중에 첫 번째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이 없어 가난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마음이 가난해 자존심이나 교만, 이기심, 욕심 등 악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악이 없는 선한 마음, 아무 욕심이 없어 자기를 비울 줄 아는 중심 상태’를 말하지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심령을 채울 영의 것을 사모하기에 쉽게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가나안 땅을 가는 중에 광야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나던 광야는 척박하고 위험한 땅으로,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마실 물이나 양식을 찾기 어렵고 불뱀이나 전갈 같은 것들이 도처에 있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을 축복하고 지키며 은혜 베풀기 원하신다는 말씀을 주십니다(민 6:24~26). 오늘날 우리도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처에 기근과 전쟁, 질병과 천재지변, 사고 등으로 혼란이 더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은 오늘날 이러한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말씀일까요? 먼저,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라고 말씀하십니다.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 주셨듯이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지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건강을 지켜 주셔야 건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질
섬긴다는 것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희생과 헌신으로 받들어 모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섬김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아름다운 덕목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며 축복의 비결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참된 섬김이란 과연 어떠한 것이며 이로 인해 우리에게 임하는 축복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을 중심에서 믿고 순종의 행함을 보여야 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왕 때에 백성들이 우상을 심히 섬김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극심한 가뭄이 들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시돈에 속한 사르밧 땅으로 피하여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과부를 만났습니다. 엘리야는 그 여인에게 마실 물과 떡 한 조각을 청합니다. 여인은 엘리야를 보고 하나님의 사람 곧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임을 고백한 뒤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합니다(왕상 17:12). 그러자 엘리야는 순종하여 행할 때에 축복이 임할 것을 알려 줍니다. 엘리야가 여인의 가정도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알면
어느 노부부가 사소한 문제로 부부싸움을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감정이 상해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식사 때가 되어 할아버지에게 상은 차려 주었지만 한쪽에 앉아 말없이 바느질만 하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답답할 노릇이었지요. 그러다가 순간 묘안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할아버지는 갑자기 옷장을 열고 무엇인가 열심히 찾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는 처음에는 못 본 척하다가 궁금하여 “도대체 뭘 찾는데 그래요?” 하였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으며 “당신의 목소리를 찾았지 뭐야. 이제야 당신의 목소리를 찾았구려. 여보, 내가 잘못했어요.” 하며 사과했습니다. 감정이 상해 입을 다물었던 할머니는 마음이 풀어져 “제가 잘못했어요.” 하며 다시 웃음꽃이 피어났지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화평을 이루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2:18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평이란, 비록 내가 옳다 하더라도 상대에게 맞춰 줄 수 있고, 내 믿음이 크다 하더라도 믿음이 작은 사람의 마음에 여유를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곧 진리 안에서 이것도 저것도 가한 융통성 있는 마음이며, 모든 사람의 유익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처럼 사람은 인품이 닦여질수록 겸손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마 18: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상대를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에게서 편안함을 느끼며 그와 가까이하기 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겸손한 사람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첫째, 말이 겸손합니다. 겸손은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낮추는 태도가 있음’을 말합니다. 주 안에서 겸손한 사람은 말도 겸손합니다. 일부러 상대를 높이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이 있기에 자연 상대를 존중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는 지식의 잣대로 판단하여 상대의 말을 무시하거나 부인하지 않고 끝까지 경청할 줄 압니다. 혹여 자신의 기준에서는 옳지 않다 해도 상대가 스스로 깨우칠 수 있도록 정확한 분별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할 뿐, 그 자리에서 상대의 말이 그르다고 단정하지는 않습니다. 나보다 어린 사람이 지적한다 해도 감사함으로 받을 줄 알고, 당장은 자신의 잘못이 없다 해도 권면하는 말을 마음에 잘 수용하고 변화되고자 하지요. 반면에 잘못이 있어서 지
사람의 탐심이란 끝이 없습니다. 어느 정도의 소유가 있어도 “족하다.” 하지 않고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많은 것을 얻었다 해도 그 마음의 갈급함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구하며 천국 소망으로 마음을 채울 때라야 참된 만족과 기쁨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대개 호화로운 집이나 진귀한 물건을 보면 “참 좋다, 아름답다!”라는 감탄이 나옵니다. 그런데 ‘참 좋다.’는 생각을 넘어 ‘나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그 생각을 통해 탐심이 마음 안에 자리 잡습니다. 탐심으로 인해 형제나 부모 자녀 사이, 혹은 부부 사이에 원수 맺는 경우도 생기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지 못하고 자기보다 더 가진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 중에도 탐심에 미혹돼 범죄하는 경우가 많지요. 성경에 나오는 아간이라는 사람은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 중 금은과 외투를 훔쳐서 숨겼습니다. 이로 인해 자신은 물론 모든 가족과 가축까지 멸망당했지요. 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땅을 팔아 하나님께 드리기로 했지만 탐심으로 인해 일부를 숨기고 나머지를 드리며 전부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예전에 전쟁터에 나가 생사를 알 길 없는 아들을 손꼽아 기다리던 노모는 손바닥에 아들의 얼굴을 새겨 넣고 그리움을 달랬다고 합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주신 하나님께서는 노모의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친히 자녀들의 이름을 손바닥에 새기시고 한 시도 눈을 떼지 않으시며 천국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사 49:16).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새기고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으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지극히 영화로우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매우 사랑하셨습니다. 죄와 불법에 빠져 사망으로 가는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심으로 결국 독생자까지 내어주셨지요. 자녀를 낳아 길러 보면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한 아들을 사지로 밀어 넣을 분이 있겠는지요? “큰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주고 무슨 소원이든 들어 줄 테니까 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