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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청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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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청와대로!


대통령후보 확정된 노무현·이회창, 청와대 입성 위한 혈전 개시




난 달 27일 노무현이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결정된 데 이어, 지난 5월7일 한나라당
대통령후보로 이회창이 확정되면서 본격적인 대선 레이스가 시작됐다. 양당은 청와대 입성을 위한 최선의 시나리오를 짜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민주당 탈당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영남권 민심을 품을 복안은? 민주개혁연합을 어떤 식으로 성사 혹은 저지시킬 것인가?
이를 위해 양당은 온갖 전술과 전략을 동원, 상대방을 공략하고 있다.


DJ 탈당카드 먹힐까?

김대중 대통령이 5월 6일 민주당을 탈당했다. 탈당사유는 “선거를 공명하게 치르고 국정에만 전념하기 위해서”이다. 6개월 전 김 대통령이
총재직을 버릴 당시 어느 정도 예상된 결과였지만, 그 순간이 너무 빨리 왔다. 탈당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아들들의 뇌물스캔들과 측근들의
비리연루라는 데 누구도 의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김 대통령의 탈당을 두고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입장이 엇갈린다.

한나라당에서는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탈당카드를 꺼낸 것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한나라당의 남경필 대변인은 대통령의 탈당 계획이 전해진 5일
“위장탈당”이라고 주장했다.

한나라당은 이제까지 “김 대통령이 당적을 버리고 국정에만 전념할 것”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그런 한나라당이 “위장탈당”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노무현의 지지율이 소폭 하락한 반면 이회창의 지지율은 상승, 두 후보간 격차가 상당히 좁혀졌다. 이에 대해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가 국민들을 분노케 해, 민주당과 노무현의 지지도를 떨어뜨렸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한나라당이 이러한 사실을 간과할 리가 없다.
이회창은 97년 대선에 출마하면서 ‘정치개혁 7대 과제’를 제시했었다. 이 7대 과제는 아직까지도 이회창 대선정책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이 중 하나가 ‘부정부패가 없는 나라’이다. 한나라당은 시민단체와 연대해 ‘정권비리 및 대통령 아들 의혹 규명’을 위한 장외집회를 개최하면서
김 대통령과 민주당이 부패의 축이고, 노무현이 그곳의 후보임을 강조하고 있다. 현 시점에서 그것만이 노풍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는 것이다.

민주당으로서는 이런 한나라당의 공세에 맞설 명분이 생겼다. 김 대통령이 탈당함으로써 정권으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동교동계의
좌장인 권노갑의 구속과 친 노무현으로 분류되는 한화갑이 당대표를 맡으면서 ‘노무현 당’으로 출발할 만반의 채비는 갖추고 있었다. 어떤 충격적인
계기만 주어진다면 금상첨화였다. 그게 바로 김 대통령의 탈당이었다. 청와대에서는 민주당과의 사전교감설을 부인하고 있지만, 정황상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은 김 대통령 탈당 이튿날부터 바로 ‘DJ 색깔버리기’에 나섰다. 정범구 대변인은 지난 7일 한 라디오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 한나라당의
남경필 대변인이 정권의 비리에 대해 공세를 가하자 “청와대나 정부에 알아보라”며 민주당과는 무관함을 강조했다.






박종웅 대신 한이헌으로 가능할까?


김 대통령의 탈당으로 민주당은 영남권 공략에도 탄력을 받게 된 것이 사실이다. 반 DJ 정서가 팽배한 영남권에서 이제는 민주당이 ‘DJ당’이
아니라, 영남권 출신인 ‘노무현 당’임을 어필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무현은 ‘정치적 고향’인 부산에서의 승리를 위해, 지난 달 30일 YS를 만나 후보 천거를 건의했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노무현이
의중에 둔 인물은 YS의 심복인 박종웅이었다.

노무현과 박종웅의 접촉은 경선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박종웅에 따르면 노무현이 민주당의 대선주자로 확실시 될 무렵, 노무현측에서
찾아와 “부산시장 출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의사를 타진했다는 것이다. 당시 박종웅은 이를 거절했다. DJ의 민주당에 YS 사람이
들어간다는 것은 부산에서 명분이 서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YS의 침묵에는 이러한 배경도 깔려 있다. 더 직접적인 이유는 정권의 비리로 부산의 민심이 노무현과 민주당으로부터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부산에서 박종웅이 패할 경우, YS의 막후정치 인생도 끝을 맺어야 하는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다.

결국 노무현은 박종웅 대신 한이헌 전 청와대경제수석을 후보로 내세웠다. 박종웅 정도는 아니지만 그 역시 YS 정권시절 청와대경제수석을 지내는
등 묵시적으로 YS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여기는 탓이다. 과연 한이헌 카드가 먹힐지, 부산에서 반드시 승리하겠다던 노무현의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민주개혁연합 지방선거 끝나봐야

YS의 침묵으로 노무현이 꿈꿔왔던 큰 틀의 정계개편, 즉 민주개혁연합은 지방선거 이후에나 가능하게 됐다. 노무현은 민주당 경선중에 TV토론회를
통해 공공연히 “후보가 되면 정계개편의 과정과 절차를 한나라당 의원들과 국민에게 정식으로 제안하겠다”고 밝혔었다. YS를 만난 것도 단순히
부산시장 후보 천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민주개혁연합을 성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한나라당은 이런 노무현의 정계개편 움직임에 대해 “3김 시대로의 회귀”라며 비난해왔다. 이런 비난의 이면에는 당이 와해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한 TV 토론회에서 한나라당 박희태가 민주당 정대철에게 “의원 빼가기로 한나라당을 분열시키려는 것”이라며 신경질적으로 던진
말은 이 같은 분위기를 대변한다.

정계개편은 성사가능성이 적지만 일단 성사가 된다면 그 대가는 달콤하다. 과거 YS가 3당 합당으로 정권을 창출했고, DJ 역시 자민련과의
연대를 통해 한나라당을 누르는 데 성공했다. 역사를 되풀이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한나라당이 노무현을 맹공격하는 것은 당연하다.

YS의 침묵이 일단 한나라당의 급한 불은 껐다. 동참의사를 비쳐왔던 김덕룡, 박종웅 등이 관망자세로 돌아선 것이다. 이들은 지방선거가 끝나야
입장표명을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나라당으로서는 안심할 바가 못 된다. 한나라당에 불어닥쳤던 민주개혁연합의 불씨는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김원웅을 비롯한 개혁성향의 몇몇 의원들이 호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회창 속태우는 IJP 연대

이회창은 대통령후보가 됐으나 갈길이 바쁘다. 민주개혁연합론으로 불거진 당의 술렁임을 가라앉히고, IJP 연대에도 대응을 해야 한다.

한나라당은 노무현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이인제를 껴안아 지방선거에서 충청권을 공략하고, 대선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할 복안을
마련 중이었다. 그러나 이인제는 한나라당이 아닌 민주당을 선택했다. 5월 3일 이인제는 김종필과 골프회동을 가진 자리에서 김종필에게 “당연히
돕겠다”고 밝혔다. 이에 김종필은 “당이 다르더라도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고 화답했다.

두 사람의 회동이 있은 지 3일만인 지난 6일 민주당 한화갑 대표는 “자민련과의 연합공천 등을 포함해 당에서 내면적으로 협의가 진행되고
있고 때가 되면 입장을 밝힐 것”이라고 말해, 민주당과 자민련의 연대가 적극 추진되고 있음을 공식 표명했다.

민주당으로서는 당초 무난히 대통령후보가 될 것으로 예상되던 이인제가 노무현에 패하면서 돌아서기 시작한 충청권 민심을 잡을 기회로, 자민련으로서는
한나라당에 빼앗긴 충청권의 ‘안방마님’ 자리를 되찾을 유일한 방법이라는 점에서 민주당과 자민련의 연대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다.

한나라당은 자칫하다가 공들여 진출한 충청권 표밭을 잃게 될 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아직까지 이에 대해 어떤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고심중이다.


불붙는 네거티브 전략

선거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상대방을 공략할 수 있는 것은 약점에 대한 폭로 내지는 집요한 물고늘어지기이다. 이회창에게는 이미 한 차례의 쓰라린
기억이 있다. 지난 대선에서 초반 압도적인 우세를 유지하다가, 아들 병역 문제를 민주당에서 걸고넘어지는 바람에 ‘한 방’에 나가떨어진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도 이회창은 아들의 병역 문제로 도덕성 시비에 휘말릴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시급히 해결해야할 문제는 귀족적
이미지를 어떻게 중화시키냐이다. 당장에 그는 빌라게이트로 인해 이반된 서민의 마음을 돌려놔야 한다.

노무현이 서민 후보로 완전히 자리매김을 하고, 이회창 자신의 ‘귀족적 이미지’가 고착화된다면 대선에 승산이 없다.

이를 인식한 듯, 이회창은 5월 5일 어린이날 용산 소화아동병원을 찾아 장애아동과 병상에 있는 어린이들을 위문했다. 자세를 낮추기로 한
것이다. 또 그는 자신의 중학교 성적표를 공개하며, 자신도 공부를 못했던 적이 있었던 평범한 학생이었음을 주장했다.

노무현은 한나라당에서 공격하는 ‘좌파’의 이미지를 벗기 위한 행보에 나섰다. 그는 6일 당내 위원들과의 만찬회동에서 “노무현이 재벌을 해체하고
시장경제를 파괴하려 한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다. 내 사고는 지극히 시장경제적”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그는 “향후 ‘좌파적’, ‘급진적’이며
‘불안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불식시키는 데 역량을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노무현은 최근 청탁성 전화로 곤혹을 치르고 있다. 한나라당 안희석 부대변인은 “지난 달 11일 노 후보가 부산지검 동부지청장과의 만남을
주선해달라는 해운대 기장을 지구당위원장의 전화를 받고 지청장과 통화한 사실이 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국기를 흔들고 있는 권력형 부정부패의
본질이 지연(地緣)으로 연결된 부패커넥션으로 끼리끼리 뒤를 봐주고 청탁의 대가를 받은 결과가 아니냐”며 노무현을 공격했다.

노무현은 일단 “청탁성이 아니”라고 해명하고 나섰지만, 이 사건이 정치권에 몰고올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부정부패’의 올가미가
이제 DJ가 아닌 노무현에게로 불똥이 튈 수도 있는 것이다.



김동옥 기자 aeiou@sisa-news.com






대쪽 이회창, 풍운아 노무현


여야 대선후보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철저히 해부




반된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이 대선도전 스타트라인에 나란히 섰다.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풍운아’ 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민주당 노무현 후보. 한 사람은 대쪽같이 걸어왔고, 또 한 사람은 모진 풍파를
이겨냈다.


검사의 아들과 빈농의 아들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후보는 1935년 6월2일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났다. 경성법전을 졸업한 뒤 검찰청 사무직원을 거쳐 45년 검사로 특임된
아버지 홍규(97)옹과 한때 교사를 했던 어머니 김사순(91)씨의 4남1녀 중 2남이었다. 그의 집안은 한마디로 명문가의 전형을 이룬다.
큰아버지가 유명한 화학자인 이태규 박사, 외가는 전남 담양의 천석꾼인 김재희 씨(작고) 집안으로 외삼촌 세 명이 모두 이 지역에서 국회의원을
지냈다.

하지만 해방전후 검사였던 부친의 봉급이 넉넉하지 않아, 어린 시절 신문을 돌리거나 중학생 때 달걀과 메추리알을 내다 팔기도 했으며, 6.25
피난 때는 학업을 중단하고 체신부 말단 공무원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소년가장역을 하기도 했다.

반면, 노무현 후보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8월6일(음력) 경남 김해군 진영읍 봉화산 자락에서 빈농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노판석(76년 작고)씨와 어머니 이순례(98년 작고)씨는 척박한 땅을 일구며, 어렵게 살았다.

유난히 키가 작았던 탓에 ‘돌콩’으로 불렸지만 노무현은 제법 똑똑한 아이였다. 여섯 살 때 천자문을 줄줄 외웠고, 대창초등학교와 진영중학교
시절 1등을 도맡았다. 그러나 그는 당시 가난에 대한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거친 반항아였고, 자존심과 우월의식도 무척 강했다. 중학교 입학할
때의 일화는 어린 노무현을 여실히 보여준다.

진영중학교에 시험을 치른 그는 입학금이 없었다. 친구로부터 “입학 때 책값만 내고, 봄 농사를 지어 갚기로 하고 입학허가를 받은 사람이
있다” 는 얘기를 듣고 어머니와 함께 교감을 찾아갔다. 교감은 농사나 배우라며 거절했고, 서럽고 분한 마음에 어머니는 눈물만 떨어뜨렸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입학원서를 북북 찢으며, “가요! 이 학교 아니면 학교가 없나” 하며 문을 박차고 나왔다고 한다.

가난은 살아가는 동안 노무현의 발목을 잡는 장애물이었고, 늘 시련과 상처만 남겨주었다. 그가 사법고시에 합격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대쪽 판사와 날라리
변호사


경기고 졸업 후 서울법대에 진학한 이회창 후보는 4학년 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60년 서울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86년 대법원 판사를 거쳐
변호사 개업을 하기까지 26년 간 판사 생활을 했다. 이 후보의 30여 년 법조인생은 ‘소신판결’과 ‘소수의견’으로 화제를 달고 다녔다.
서슬퍼런 5공시절 대법원 판사를 하면서 정권의 비위를 거스르는 ‘소수의견’을 자주 내다가 재임용에서 탈락했고, 6공 때인 1988년 7월
대법관으로 다시 기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5.16 직후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사형판결’과 권위주의 정권시절의 ‘고속승진’을 지적하는 비판적 시각도 제기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회창 후보가 서울고등법원 판사로 재직할 시절, 상고에 진학한 노무현 후보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의 방황은 졸업후에도 계속된다.
그가 고시 공부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73년 결혼 이후, 75년 드디어 사법시험(17회)에 합격했다.

노 후보는 초임 판사 시절 변호사들에게 밥이나 술을 얻어먹고 다니며 부끄러운 짓도 많이 저질렀고, 78년 변호사로 개업해서도 법원과 검찰
직원들에게 사건 알선 커미션을 건네고, 판·검사들에게 술을 샀다. 당사자간에 합의가 가능한 사건도 수임료를 돌려주지 않기 위해 서둘러 처리해버린
적도 있었다.


인권변호사에서 바보
노무현까지


그런 그에게 81년 ‘부림사건’ (5공 정권의 부산지역 민주화세력에 대한 용공조작사건)은 인생을 바꿔놓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57일
동안 경찰에 구금돼 고문당한 학생들의 공포에 질린 눈과 시커멓게 죽은 발톱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졌다.

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공동변론으로 故 조영래 변호사와 교류하며 인권변호사로 거듭났고, 85년 송기인 신부와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만들면서 아예 거리로 나섰다. 87년 9월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씨 사건 사인규명 작업에 나섰다가 구속돼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까지 받았다.

그러나 인생의 반전은 다시 한번 찾아왔다. 88년 4.26 총선(13대)을 앞두고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에 의해 5공실세 허삼수 후보의
대항마로 영입돼 부산 동구에서 금배지를 닮으로써 제도권 정치에 입문했다.

초선 노무현은 88년 5공 청문회에서 다른 여야 의원들이 깍듯이 예우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 힘있는 증인들을 정연한 논리와 송곳 질문으로
몰아세워 TV로 시청하던 국민을 열광시키면서 일약 ‘청문회 스타’로 부상했다.

그러나 정치인 노무현의 봄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90년 3당 합당 이후부터는 춥고 배고픈 시절의 연속이었다. 대다수 의원들은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로 들어간다” 며, YS 뒤를 따랐으나, 그는 “역사적 반역” 이라며 정치적 소신을 고수했다. 이는 12년이 지난 지금 노
후보의 커다란 정치적 자산으로 되돌아왔지만, 당시에는 기나긴 가시밭길의 시작이었다.

92년 총선(14대), 95년 부산시장, 96년 총선(15대)에서 모두 패배했다. YS 곁을 떠난 그를 부산은 더 이상 받아주지 않는 듯했다.
98년 서울 종로 보선에서 어렵사리 금배지를 달았지만 2000년 4·13총선(16대) 때 ‘지역구도 극복’을 내걸고 다시 부산으로 향했다.
그는 “이번에 밀어주면 대선에 출마하겠다” 고 호소했으나 결과는 참패. 반(反)DJ의 부산 정서 앞에 또다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바보’ 라고 불렀다.

‘이회창’이란 이름 석자가 정치권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89년 중앙선관위원장을 맡으면서부터. 당시 동해와 영등포을 재선거 때 여야의 불법선거가
극성을 부리자 후보 전원을 고발하고, 여야 총재인 ‘1노(盧) 3김(金)’에게 경고서한을 보내며, ‘투쟁’하다. 그래도 안 되자 89년
10월 사표를 던졌다. 그의 행보는 기성정치에 염증을 느끼던 국민들에게는 청량음료와도 같았다.


대쪽판사가 야당총재로


문민정부 출범 후 93년 감사원장에 임명된 후 성역이던 율곡비리와 청와대 비서실 등에 대한 감사를 통해 소신과 원칙주의자라는 이미지를 구축했고,
93년 12월 국무총리에 임명된 후에도 ‘얼굴마담’ 총리를 거부하다 127일만에 사표를 던졌다. 그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다시 재야로
돌아갔지만 그의 국민 지지도는 급격히 상승했다.

국무총리를 끝으로 야인으로 돌아갔던 이 후보는 김영삼 대통령이 4.11 총선 승리를 위해 영입하면서 96년 2월 정계라는 새로운 세계에
첫 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정계입문 1년11개월만에 제1당 대선후보 자리에 올라선다. 하지만 그는 두 아들 병역문제로 혹독한 검증을 받으며
대쪽이미지에 커다란 타격을 입었고, 이인제 후보의 탈당과 비주류의 흔들리기에 시달리다 97년 대선에서 낙마하고 말았다. 이 후보는 97년
12월20일 대선 패배 후 “좌절하지 않고 시대적 소임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재기를 꿈꾼 것이다.


 


 


 


시련에서 일어서다

97년 대선 후, 당 명예총재로 정치일선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던 이회창후보는 98년8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제1야당 총재로 전면에 복귀했고,
2000년 5월 전대에서 김덕룡 후보 등의 도전을 물리치고 연임돼 당 총재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특히 4.13 총선을 앞두고 김윤환, 이기택, 신상우 전 의원 등 당내 계파 수장 및 중진들을 과감히 물갈이해 ‘대학살’라는 평가 속에
당장악력을 한층 높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북풍’, ‘세풍’ 등으로 정치생명을 위협받기도 했지만, 이는 오히려 당의 결속력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후 총선승리와 재보선 승리를 계기로 유력한 대선후보로 자리잡는 한편, 여권의 각종 게이트 파문에 힘입어 ‘이회창 대세론’
을 공고하는 듯 했다.

하지만 연초부터 민주당의 국민경선제 도입으로 시작된 정치권의 변화바람에 제때 부응하지 못하고, 박근혜 의원의 탈당과 ‘빌라 게이트’ 등으로
지지도가 떨어지면서 이회창대세론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상향식 공천제과 집단지도체제 도입으로 내분을 수습한 그는 68%라는 압도적 지지
속에 한나라당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다.

97년 대선에 패배한 이회창 후보에겐 한나라당이 있었지만, 2000년 총선에서 패배한 노무현을 바라보는 민주당의 눈길은 싸늘했다. 그의
영남득표력이 의심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티즌’이라는 신기루와 같은 열성 지지자들이 노무현을 일으켜 세웠다. 당시 누구도 이들이
노풍을 만들어 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민주당 국민경선이 시작되는 그 순간까지 노무현의 반전은 불가능한 목표처럼 보였다. 그는 기자들에게 “민주당 대선후보 되기가 어려워
그렇지 후보만 되면 이길 수 있다” 고 외쳤지만, 공허한 울림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두 달 동안 상영된 국민경선이라는 주말연속극은 ‘시골소년
성공기’라는 제목으로 치러지게 되었고, ‘바보’ 주인공은 마침내 대선후보가 되었다.

이제 새로운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직 주인공이 결정되지 않았다. 장장 8개월 동안 방영될 새드라마 ‘가자 청와대로’의 주인공은
드라마가 끝나는 12월 19일날 결정될 것이다.




고병현 기자 sama1000@sisa-news.com

저작권자 Ⓒ시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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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예규 제정에도 여야 내란전담재판부 정면충돌...“연내 설치법 처리”vs“명분 없다...중단하라”
[시사뉴스 이광효 기자] 대법원이 내란전담재판부 설치 예규 제정 방침을 밝혔지만 여야는 내란전담재판부 설치를 위한 법률안의 국회 통과를 놓고 정면충돌했다. 더불어민주당은 관련 법률안을 올해 안에 국회에서 통과시킬 것임을 밝힌 반면 국민의힘은 이제 명분이 없음을 강조하며 관련 법률안의 국회 통과 추진 중단을 촉구했다. 더불어민주당 백승아 원내대변인은 20일 국회에서 브리핑을 해 “계엄군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낸 위대한 국민은 내란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신속하고 엄정한 내란재판과 내란청산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며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의 명령을 받들겠다. 신속한 내란 종식과 제2의 지귀연 같은 재판부 원천 차단을 위해 내란전담재판부 설치법을 반드시 연내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백승아 원내대변인은 “조희대 사법부는 12·3 내란 이후 1년이 넘도록 국민적 요구이자 시대적 책무인 내란청산을 외면해 왔다. 지귀연 재판부의 노골적인 늑장 재판을 방치한 결과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는 바닥까지 추락했다”며 “예규 하나로 내란재판 지연과 사법불신을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백 원내대변인은 “사법부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국회가 내란전담재판부 설치법을 통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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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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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돼 가는 현대인의 내면... 연극 ‘동물원 이야기’ 공연
[시사뉴스 정춘옥 기자] 에드워드 올비의 대표작 ‘동물원 이야기(The Zoo Story)’가 12월 20일(토) 오후 2시 밀양아리나 꿈꾸는 극장에서 관객과 만난다. 이번 공연은 밀양시가 주최하고 대경대학교 공연예술ICC가 주관하며, 극단 가변과 극단 예빛나래가 공동 제작했다. 작품은 뉴욕 센트럴파크의 한 벤치에서 우연히 마주친 두 인물 제리와 페트라(원작의 피터를 여성으로 트랜스한 설정)의 대화를 통해 현대 사회의 고립과 소통의 부재를 날카롭게 드러내는 심리극이다. 사회의 주변인에 가까운 제리와 평범한 중산층 페트라의 만남은 인간 존재의 본질과 관계의 의미를 드러내며, 예상치 못한 결말로 관객에게 깊은 질문을 던진다. 이번 무대는 ‘1960년대 초연 이후 지금 시대에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 에드워드 올비의 대표작을 새롭게 해석한 공연’을 표방하며, 도시의 소음 속에서 점점 고립돼 가는 현대인의 내면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작품은 단 두 명의 인물과 최소한의 공간만으로도 강렬한 긴장과 몰입을 만들어 내며, 관객에게 나와 타인 간의 거리와 소통의 의미를 되묻는다.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이자 연출을 맡은 배우진은 “‘동물원 이야기’는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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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태 칼럼】 마음이 전하는 따뜻한 이야기: 아직 살 만한 세상이다
일상생활과 매스컴 등을 통해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은 때로는 냉혹하고, 험악하고, 때로는 복잡하게 얽혀 있어 사람들의 마음을 삭막하게 만든다. 하지만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혹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마주하는 작고 따뜻한 선행들은 여전히 이 세상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마치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들처럼, 우리 주변에는 서로를 향한 배려와 이해로 가득 찬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펼쳐지고 있다. 최근 필자가 경험하거나 접한 세 가지 사례는 ‘아직 세상은 살 만하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해 소개할까 한다. 첫 번째 이야기: ‘쪽지 편지’가 부른 감동적인 배려 누구나 한 번쯤은 실수를 저지른다. 아무도 없는 어느 야심한 밤. 주차장에서 타인의 차량에 접촉 사고를 냈는데 아무도 못 봤으니까 그냥 갈까 잠시 망설이다가 양심에 따라 연락처와 함께 피해 보상을 약속하는 간단한 쪽지 편지를 써서 차량 와이퍼에 끼워놓았다. 며칠 후 피해 차량의 차주로부터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손해배상 절차에 대한 이야기부터 오가기 마련이지만, 차주분은 “요즘 같은 세상에 이렇게 쪽지까지 남겨주셔서 오히려 고맙다”며, 본인이 차량수리를 하겠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