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송경호 기자] 예능물과 드라마는 일맥상통한다. 시청자들이 흥미로워할 만한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리얼 버라이어티는 따지고 보면 '리얼'이 아니고, 관찰 예능이 실제로 '관찰'일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예능은 어찌됐든 재밌는 이야기를 짜내기 위해 최대한 많이, 오랫동안 찍어 그것을 자르고 이어붙여 하나의 극을 창조해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극' 예능의 시청률을 올리는 방식 또한 드라마와 다르지 않다. 일단 좋은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다. 출연자들이 명확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면 프로그램을 이끌어 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특정 상황에 특정 성격의 인물을 던져 놓고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면 된다. 편집은 그 다음이다.
성공적인 예능을 보면 명확한 캐릭터가 눈에 띈다. '무한도전'이 그렇고, '런닝맨'이 그러하며, '1박2일'도 마찬가지다. 유재석은 최근 '잔소리 심한 리더' 역할을 한다. '런닝맨'은 김종국이 등장할 때마다 '능력자'라는 자막을 단다. '1박2일'의 정준영은 '4차원 막내'로 지상파 예능에 완전히 정착했다. TV 3사의 간판 예능에서 캐릭터가 애매한 출연자를 찾기란 쉽지 않다.
8일 케이블채널 tvN 예능 '꽃보다 할배, 스페인'편 첫회가 전파를 탔다. 시청률은 7.7%(닐슨코리아)를 기록했다. '프랑스·스위스' '대만'편의 첫 방송보다 높다.
'꽃보다 할배'의 시작은 항상 같다. 여행을 떠나기 전 제작진과 할배들의 사전 인터뷰, 여행 준비, 그리고 첫 번째 숙소에 도착하기까지를 담는다. '스페인'편도 다르지 않았다. 인터뷰를 했고 여행을 준비했으며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표면적으로는 같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스페인'편의 첫회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프랑스·스위스 ' '대만'편의 첫 방송이 말 그대로 첫 숙소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이었다면, '스페인'편 첫 회는 '캐릭터를 구축하는 여정'이었다.
시청률만 따졌을 때 할배들이 떠난 두 번의 여행은 모두 성공적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대배우 네 명이 모여 배낭여행을 간다는 설정, 나영석이라는 걸출한 PD의 존재, 젊은 배우 이서진의 매력이 조합된 결과다. '꽃보다 할배'가 카메라에 담은 여행지의 아름다움 또한 한 몫했다.
문제는, 회가 거듭될수록 지루하다는 평이 끊임 없이 흘러나왔다는 점이다. 그들의 여행에는 '극'이 줄어 들고 있었다. 네 노인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드라마에는 한계가 있다. 50여년을 함께한 노배우들의 우정은 이미 보여줬다. 그들이 전하는 삶의 지혜도 더하면 잔소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들에 대해 몰랐던 것들도 많이 알게 됐다. 여행지가 변했다는 것 말고는 다른 게 없는 프로그램이 될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 PD는 '스페인'편에 새로운 승부수를 던졌다.
그것은 결국 '캐릭터 만들기'다. 그가 첫회에서 가장 많이 한 말은 "중급여행"이다. 대학생들이 배낭여행을 하는 것과 비슷한 강도의 여행을 하겠다는 것이다. 용돈을 줄였다. 1인 하루 10만원씩을 쥐어준 이전 여행과 달리 할배들은 7만원을 받는다. 가이드 노릇을 하던 이서진도 하루 늦게 투입됐다. 그리고 여행지를 유럽에서 가장 큰 나라 중 하나이면서 이서진이 가보지 않은 스페인으로 정했다.
나영석은 할배들을 속이고 이서진을 일부러 늦게 보냈다. 할배들은 이서진의 도움 없이 첫 숙소를 찾아가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나영석은 두 가지를 의도했다. 할배들에게 '중급여행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어려움을 주겠다', 해결이 쉽지 않은 상황을 통해 이전에는 볼 수 없던 할배들의 모습을 보겠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나 PD는 이순재에게서 새로운 캐릭터를 끄집어냈다. 두 번의 여행에서 인자한 할아버지 였던 이순재는 카리스마를 갖춘 리더로 거듭났다.
이순재는 스페인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잠을 자지 않고 공부했다. 스페인어를 익히고 무엇을 타고 어떻게 첫 숙소까지 갈 것인지 지도를 들여다보며 연구했다. 이순재의 책임감, 학구파적 면모가 명확하게 드러난 장면이다. 그리고 그는 일행을 이끌고 무사히 첫 목적지에 도착했다. 신구, 박근형, 백일섭은 이순재에게 무한신뢰를 드러냈다.
이순재는 "나이 먹었다고 주저앉아 대접이나 받으려고 하는 것은 늙어 보이는 것이다. 한다 하면 되는 것"이라며 "이제 우리 나이는 닥치면 닥치는대로 살아야 한다. 팔십이라는 걸 빨리 잊어버리고 아직도 육십이다 하고 산다"라는 말을 남겼다.
8일 방송 이후 인터넷에는 이순재에 관한 기사가 쏟아졌다. 이서진을 하루 늦게 스페인으로 들여보낸 나영석의 전략이 완벽하게 성공을 거둔 셈이다. 이순재는 할배들의 '리더'라는 캐릭터를 얻었고, 이제 이 캐릭터는 스페인 여행 내내 이순재를 따라다닐 것이다. '꽃보다 할배' 제작진은 여행이라는 드라마를 더 극적으로 만들 수 있는 요소 하나를 추가한 것이다.
줄어든 용돈과 큰 나라이면서 이서진이 가보지 않은 나라 스페인이라는 설정 또한 할배들의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도구가 될 것이다. 이미 첫회에 삽입된 몇몇 장면 만으로도 이런 부분을 예상해 볼 수 있다.
나영석과 몸싸움을 불사하면서 뭔가를 얻어내려하는 이서진의 모습은 부족한 용돈의 효과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두 번의 여행에서 이서진은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고 차분했고 진지했다. 그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나영석과 말싸움을 벌이는 모습은 시청자에게 새로움을 선사한다.
첫회에 잠깐 나온 신구의 화난 모습 또한 이전 여행에서는 볼 수 없었다. 신구가 왜 화를 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짐작컨대, 이 또한 나영석이 만들어 놓은 세 가지 설정인 용돈, 늦게 온 이서진, 스페인 탓에 빚어진 일일 것이다. 이런 장치들을 통해 나영석은 이서진을 포함한 '꽃보다 할배'의 캐릭터를 새롭게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꽃보다 할배, 스페인'편 제1회는 나영석의 비전을 명확하게 보여줬다. '새로운 캐릭터'를 통한 '드라마 만들기'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성공적이다. 나영석이 왜 훌륭한 예능 연출가인지 증명한 첫 방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