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승리자의 관점에서 기록된다. 서구와 비서구가 문명 대 야만, 우등 대 열등의 이분법으로 논의된 것도 이 때문이다. 패배의 역사는 침묵했고, 승리의 역사는 왜곡을 거듭했다. ‘인류 최초의 문명들’ ‘알렉산드로스, 침략자 혹은 제왕’ ‘트로이, 잊혀진 신화’에 이은 BBC 고대문명 다큐멘터리 시리즈 완결편인 ‘태양의 제국, 잉카의 마지막 운명’은 서구인의 통념에 일침을 가하며 문명과 야만에 대한 진보적 통찰을 보여주는, 기행서이자 역사서다.
역사에 생명을 불어넣다
16세기에 이루어진 에스파냐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은 인류사 최대 격변의 하나로 꼽힌다. 이 책은 아마존에서 티티카카 호수까지, 멕시코 북부 사막지대에서 마추픽추 고원지대까지, 에스파냐 원정대들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역사물 저술가이자 텔레비전 프로그램 진행자이기도 한 저자 마이클 우드는 코르테스, 피사로 형제 등이 감행했던 대서사적 여행을 온몸으로 생생히 경험하며 에스파냐의 아스테카와 잉카 제국 정복을 둘러싼 온갖 거칠고 험난한 사건을 속속들이 파헤친다.
이 책의 매력은 고대 동서양 문명간의 충돌과 교류의 생생한 현장 한 가운데에 독자를 세워놓는다는 것이다. 세밀한 묘사와 서술, 아름다운 사진 등은 오래된 역사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또한, 저자의 대담한 질문과 집요한 추적 끝에 얻어낸 대답들은 타자와의 만남이라는 문제에 대한 통찰에 이른다. 이 책은 정복과 영웅적 행위, 인간 탐욕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세계를 보는 눈, 역사와 문명, 정의와 인권을 보는 눈이 바뀌는 시점에 대한 기록이다.
타자를 보는 방식
에스파냐인들은 자신들의 승리는 도덕성, 문명의 힘, 기독교의 힘이라고 주장하지만 아스테카, 잉카 문명 또한 그 이하는 아니었다. 이 책은 원주민 하면 떠오르는 오해, 이를테면 우상숭배 및 피의 희생제 등의 이미지가 서구인들에 의해 조작되고 과장된 허상임을 일깨우며 패배자의 역사를 조망한다.
‘수천 척의 개인용 카누로 가득 찬 정교하고 거대한 수로망, 고기잡이배들이 드나드는 선착장,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궁과 궁전과 대저택들, 아도비 벽돌로 지은 나지막한 가옥들이 들어서 있는 넓은 교회, 매일같이 수천 명이 찾는 시장, 흰색으로 칠해진 거대한 피라미드들’로 묘사되는 도시문명의 발전상과, ‘지구상에서 자기 자식을 카랑카와족만큼 사랑하고 이들만큼 잘 키우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는 선진적 교육관 등 패배자의 문명 또한 경탄할 수준이었음을 보여준다. 타자를 보는 방식에 대한 이 책의 문제제기는, 팔레스티안에서 카시미르까지 전세계가 혼란과 소유욕, 증오로 얼룩진 우리시대에 특별한 메시지를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