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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우리시대 마지막 ‘간판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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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마지막 ‘간판쟁이’

40년간 영화간판 그려온 조종태 씨


제부턴가
가장 즐기는 문화생활로 영화감상이 자리잡기 시작했고, 그것을 증명이나 하듯 주말 극장가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더 많은 관객의 수용을 위해
영화관은 ‘역사’를 부수고 ‘쾌적’하고 ‘편리’한 멀티플렉스영화관으로 탈바꿈했다. 과거의 ‘향수’를 벗어던지고 번쩍거리는 ‘최첨단’ 무대의상으로
갈아입었다.

그러나 가끔 덜거덕덜거덕 영사기가 돌아가고, 화면에 비가 내리면서 영화의 감칠맛을 더했던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좋아하는 배우가 커다랗게
그려진 간판을 보면서 연모의 정을 품기도 하고, 전혀 닮지 않게 그려진 것을 보면 화를 내기도 했던 그때. 지금은 그 당시 걸렸던 영화들이
주말의 영화에서조차 자취를 감추고, ‘맨발의 청춘’과 같은 그림간판은 주점표지로만 애용된다.

그런데 여전히 영화간판을 자신의 붓끝으로 표현하기를 고집하는 이가 있다. 미아삼거리 대지극장에서 미술부장을 맡고있는 조종태(63) 씨가
그 주인공이다.


장르
따라 색채, 형태 변화


영화관에 실사간판이 그림간판의 자리를 차지한지는 1990년대 들어서면서 본격화됐다.
가격도 저렴하고 인력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씨는 “영화관에 따라 걸리는 위치가 다르므로 획일적으로 인쇄된 실사간판을 거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빛을 받는 각도와 관객의 시선 높이에 따라 색채나 형태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림간판은 포스터를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장르에 맞게 특징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멜로는 화사하고 화려한 색채를, 반면에 공포는 음침하고 어두운 색채를 더 강조해요. 붓터치도 공포는 거칠게 하죠. 액션은 주인공의 남성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인물자체나 근육을 좀더 크게 그리는 방법을 사용하고요.”

변형을 하더라도 전체적인 조화를 놓쳐서는 안된다. 작은 부분을 빠뜨리는 실수도 조심해야한다. 특히 조씨는 “귀를 그리지 않는 사람이 많다”면서
세심한 주의와 정성을 담아야 좋은 영화간판을 그릴 수 있음을 언급했다.

“간판에 그림 그리는 일을 하찮게 보는 경향이 있죠. 단순 기술직 아니냐고. 하지만 이것도 순수한 열정이 없으면 하기 힘든 작업이에요.
잘된 그림간판은 하나의 예술작품이죠.”

초기에는 생계를 위한 작업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림간판은 조씨에게 ‘작품’으로 다가왔다. 때문에 영화가 막을 내리면 간판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 몇 년 전부터 작품을 사진에 담아 간직하고 있다.

“한창 시절엔 너무 바빠 사진으로 보관해야겠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죠. 나이가 먹으니 사라지는 것이 아깝더라고요. 진작에 깨달았으면
지금쯤 수만 장의 사진을 가지고 있을 텐데요.”


최고의 작품 ‘대부’, 잘 그리는 배우 황 해


조씨가 처음 그림간판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23살 되던 해, 목포에서였다. 학창시절부터
그림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고 당시 극장에서 일하는 것은 높은 보수가 보장됐기 때문에 선뜻 나설 수 있었다. 처음 얼마간은 선배들에게 페인트통이나
연탄집게로 맞아가며 배웠다. 그러나 배우는 속도가 남들보다 월등히 빨라 보통 10년 걸리는 것을 4년만에 책임자가 됐다.

1959년 박 암 주연의 ‘위정천리’를 첫시작으로 본격적인 간판화가의 길로 접어든 그는 서울로 상경해서는 피카디리, 서울극장 등 종로 일대
거의 모든 간판을 그렸다. 특히 광화문 국제극장에 전면을 감싼 ‘십계’ 대형간판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지금껏 그린 작품 중에서 가장 손꼽는 작품은 ‘대부’다. 알파치노의 실루엣 하나로 인물성격과 영화이미지를 표현해야했기에 완성했을 때 무엇보다
애착이 갔다.

“몇 번이고 다시 그렸어요. 단순한 구성에 영화의 모든 걸 담아야했으니까요. 그래도 제가 그린 최고의 작품이었죠.”

수많은 배우들 중에서 가장 자신있게 그릴 수 있는 배우는 ‘목포의 눈물’ ‘월하의 공동묘지’의 황 해다.

“황 해 씨는 선이 굵고 개성이 강해서 표현하기 쉬워요. 그래서 대체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그리기 수월하죠. 요즘 신세대 여배우들은 특징이
별로 없고 다들 비슷하게 생겨서 그리는 데 여간 애를 먹는 게 아녜요.”

1950년대부터 배우들의 얼굴을 그려온 터라 조씨는 근래 배우들의 몰개성을 꼬집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만큼 조씨의 손을 거치지 않은 배우가
없기 때문이다.


그림간판
소멸 가슴아파


조씨의 그림실력은 나라에서도 인정받아 행사에 필요한 대통령 사진을 그리기도 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전대통령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솜씨를 인정받은 것은 좋은 일이었으나 거부하면 안기부에 끌려갔기 때문에 강제성이
있었다.

종교계나 교수에게 청탁받는 일도 종종 있었다. 유명세를 타자 미대생이 배우겠다고 찾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다들 얼마 못 가 도망치기 일쑤였다.

“사실 저도 1년간 해외로 도망간 적이 있어요. 간판화가라는 직업이 알고보면 너무 힘든 직업이거든요. 대단한 열정과 인내가 아니면 버티기
힘들죠.”

그러나 간판화가는 조씨에게 운명이었는지 다시 돌아와 지금껏 40년간 이일을 하고 있다. 실사간판이 그림간판을 밀어내 일거리는 전보다 훨씬
줄었지만 그래도 아직 그의 실력을 원하는 곳이 있어 작품활동을 계속 하고있다.

“저는 이제 그릴만큼 그려봐서 여한은 없어요. 하지만 고생하다 막상 실력이 갖춰지니 떠나야하는 후배들은 다르죠. 그리고싶어도 그릴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워요.”

조씨는 그림간판이 사라지고 있는 상황을 씁쓸해하며, 후배들을 위해 자신이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했다.

“지금껏 간판화가로 살아온 제 인생은 어쩌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림 그리는 재주를 주셨고 그것을 써먹으며 평생을 살아왔으니까요.
이제는 이 자리를 후배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 같아요. 그림간판이 사라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뿐이에요.”

조씨는 “실사간판에는 없는 인간미와 생명력이 있다”며 그림간판이 계속 유지되어야 하는 이유를 다시 한번 역설했다. 평생 영화간판을 그려온
‘간판쟁이’의 아쉬움이 담긴 말이었다. 담배를 물고 간판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에 세월의 영사기가 돌아갔다. 한숨섞인 담배연기에서는 애석함과
미련이 묻어나고 있었다.


안지연 기자 moon@sis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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