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김한나 기자] 유하(51) 감독은 1974년 강남으로 이사왔다. 땅 투기 바람이 거세게 불던 시기, 강남은 농경문화와 도시문화가 충돌하는 기이한 공간이었다. 그 시기 그 공간에 대한 강렬한 인상이,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소년 유하의 뇌리에 콱 박혔다.
인간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분출되던 강남은 지금, 어린 유하 감독이 봤던 모습과 판이한 곳이 됐지만, 욕망이 꾸역꾸역 모여드는 장소인 점은 그대로다.
창작자는 결국 자기 삶의 핵심체험을 소재로 작품을 빚어낸다. 시를 통해 강남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유하 감독의 성향은 영화계로 넘어와서도 변하지 않았다. '말죽거리 잔혹사'(2004)에서 군사문화와 주입식 제도교육이 어떻게 새로운 폭력을 만들어내는지 훑었다. '비열한 거리'(2006)에선 돈이 폭력을 어떻게 조종하는지를 다뤘다.
이후 강남과 관계 없는 영화 두 편('쌍화점'(2008) '하울링'(2012))을 만들었지만, 유하 감독의 마음은 여전히 강남에 꽂혀 있었나보다. 강남개발계획의 정치적 비사를 파헤친 책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를 접한 유하 감독의 눈길은 다시 강남으로 향했다. 이른바 '강남 3부작' 혹은 '거리 3부작'의 종결판이라고 할 수 있는 새영화 '강남 1970'을 내놨다.
"흔하지만 중요한 질문이죠. 현실이 그렇잖아요. 땅을 열심히 일궈도 땅을 갖지 못하고, 올바르게 살면 손해를 보죠. 땅 투기 강풍과 정치권이 결탁하던 시기를 통해 현실의 천민자본주의 속성과 단면을 반추하려고 했습니다. 또 권력이 폭력을 어떻게 소비하는지를 다루고 싶었죠."
고아인 종대와 용기는 넝마주이 생활을 하며 친형제처럼 자란다. 유일한 안식처였던 무허가촌 판잣집에서 쫓겨난 두 사람은 건달이 개입된 전당대회 훼방작전에 얽히면서 서로를 잃어버린다. 3년 후 종대는 잘 살고 싶다는 바람 하나로 건달이 되고, 복부인 민마담과 함께 강남 개발 이권다툼에 뛰어들고, 명동파 중간보스가 된 용기와 재회한다. 두 사람은 정치권이 개입된 강남 땅 싸움에 휘말린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선 전학생 현수(권상우)를 통해, '비열한 거리'에선 건달 병두(조인성)를 통해 청춘과 폭력의 일그러진 모습을 담았던 유하 감독이 이번에는 방식을 바꿔 두 명의 남자배우를 통해 욕망(강남)의 초상을 그린다. 종대는 이민호(27)가, 용기는 김래원(33)이 맡았다.
이민호가 연기한 '종대'는 가진 건 싸움 실력밖에 없는 밑바닥 청춘이다. 오로지 성공을 위해, 내 땅을 원 없이 갖고 싶다는 욕망을 좇아 내달리는 인물이다. 드라마 '꽃보다 남자' '상속자들' 등 주로 재벌 3세 상류층을 연기해 한류스타 반열에 오른 그에게는 파격적인 역할이다.
"외압이 있었어요. '비열한 거리'를 할 때, 조인성 씨를 캐스팅한 이유와 같습니다. 제 와이프가 이민호 씨 광팬입니다. 제가 한 2년 시달렸어요. 이게 숙명인가 보다 하며 캐스팅했죠."
농담을 던지며 이민호 캐스팅 비사를 전한 유하 감독은 "최상류층을 연기하던 이민호를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뜨리면 재밌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눈빛이 깊은 배우"라고 추어올리기도 했다.
주로 TV 드라마에 출연하던 이민호에게 '강남 1970'은 영화로 활동무대를 넓히는 기점인 셈이다.
"전 강남 느낌이 나는 배우인데, 제가 70년대 강남을 배경으로 한 인물을 연기하면 신선할 것 같았어요. 또 영화를 하게 된다면 메시지가 있는 좋은 작품으로 시작하고 싶어 작품을 기다리고 있었죠. 유하 감독님 작품이라면 감독님이 시키는 대로 해도 좋을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죠."
김래원이 책임진 '용기'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행동파로 성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다. 주로 부드럽고 로맨틱한 역할을 맡아왔던 김래원에게도 이번 역할은 새로운 도전이다.
"김래원 씨는 제가 예전부터 함께 하고 싶은 배우였어요. 이번에 같이 하게 돼 행운입니다. 연기가 워낙 안정적이잖아요. 김래원 씨에게는 순박함도 있지만, 눈에는 비열함과 의뭉스러움이 함께 있어요. 그런 느낌이 용기에 잘 어울리겠다 싶었죠."
유하 감독의 말에 김래원도 화답했다. 그는 "내 또래 배우라면 누구나 다 유하 감독 작품에 출연하고 싶어합니다. 나도 그 중 한 명이었죠"라고 말했다.
'말죽거리 잔혹사'에는 옥상 결투신이 있다. '비열한 거리'에는 굴다리 싸움 장면이 있다. 두 액션 장면 모두 영화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었다. '강남 1970'에도 이에 못지 않은 공동묘지 액션신이 등장한다.
이 장면을 찍는 데 하루 12시간씩 1주일이 걸렸다. 진흙탕 싸움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붉은색 흙을 공수했고 800t에 달하는 물을 쏟아부었다. 보조 출연자만 150여 명이었다.
"땅 이야기이다보니까 황토빛 땅과 땅에 대한 욕망, 죽음, 탄생 여러가지 함의를 담고싶었어요. 죽음의 카니발 같은 이미지를 생각했어요. 지금껏 영화를 하면서 가장 고생하며 찍은 장면입니다. 만족합니다."
'강남 1970'은 내년 1월21일 개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