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할 사람이 없다면 나라도 연구하겠다”
2005년 11월 30일 한국 상고사 연구의 태두 최태영 선생이 작고했다. 우리 나이로 106세. 선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또렷한 의식으로 단군을 복원하는 작업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더 이상 글을 읽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자신이 2000년 펴낸 회고록 『인간 단군을 찾아서』를 손으로 쓰다듬거나 옆에서 책의 내용을 읽어주면 “좋구나, 좋구나”를 연발했다.
선생에게 단군 연구는 민족의 자존을 다시 세우는 일이었다. 어린 시절 고향인 황해도 장련에서 단군조선과 인연이 깊은 솟대백이와 아사나루, 아사신당을 보면서 자랐고 구월산에서 단군사당 삼성사터를 직접 체험했던 선생은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면서 그들이 학계를 동원해 신라가 한국사의 시작이라고 수천 년의 한국 역사를 잘라버리는 현장을 생생히 목격했다. 뿐만 아니라 해방 후에도 일본의 식민사관에 물든 이병도를 비롯한 우리 학자들이 일본측이 조작한 역사를 그대로 강의하고 있는 현실에서 선생은 어떤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정인보, 신채호, 안재홍, 손진태, 최동, 장도빈 같은 단군이 우리 역사의 근원이라고 보았던 역사학자가 몽땅 북으로 잡혀가 죽었다. 그들이 있었더라면 내가 역사연구에 나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생은 ‘아무도 할 사람이 없다면 나라도 연구하겠다’고 선언하고 고대사 연구에 몰입했다. 그때 선생의 나이 77세였다.
메이지대 우등으로 졸업한 대법학자
선생은 대법학자였다. 선생은 언더우드가 세웠던 경신학교에서 신식교육을 받은 후 동경에 유학, 메이지대학 법학부에서 영미법과 법철학을 전공했다. 당시 동경에는 1천여명의 유학생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 일본 대학의 입학시험을 통과한 이들은 10여명에 불과했다. 선생은 조선인 최초로 영법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선생은 1925년에 보성전문학교의 한국인 최초 법학 정교수가 되었고 이후 서울대 법대를 비롯해 부산대, 중앙대, 충북대, 숙명여대 등에서 50년간 법학을 가르쳤다. 법학분야에서 선생의 업적은 1953년에 펴낸 『현행 어음 수표법』과 1977년에 발간한 『서양 법철학의 역사적 배경』이라는 저서이다. 특히『서양 법철학의 역사적 배경』은 1만4천 장 분량의 서양철학사전 같은 것으로 카드 한 장 없이 머릿속에서 수십 년을 정리해 써낸 책이다. 이 책으로 선생은 학술원 저작상을 받기도 했다. 선생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뉴욕유가증권법을 가르쳤고 어음이라는 우리말 용어를 정착시키기도 했으며 중앙대 개교 후 지금까지 선생의 법학 논문이 최우수 논문으로 꼽히고 있다.
“그럼 할 수 없지. 나 혼자서라도 해야지.”
1999년 선생은『한국 문화의 뿌리를 찾아』라는 존 카터 코벨의 한국미술사 책을 번역한 언론인 김유경 씨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단군 정리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김유경 씨는 처음에는 너무 힘들어 못하겠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선생은 “그럼 할 수 없지. 나 혼자서라도 해야지”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나온 자료를 만지작거렸다. 그 때 선생 나이 100세였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고 이를 본 김유경 씨는 선생의 원고 작업을 도와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후 일주일에 두세 차례 선생을 찾아가 함께 정리작업을 시작했다. 선생이 책의 내용을 구술하면 김유경 씨는 이를 받아 적고, 정리된 원고는 여러 번 선생에게 검사를 받았다. 김유경 씨는 “선생의 저술에 내 말은 단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선생이 늘 ‘내가 안한 소리를 덧붙이면 안 된다’고 하셨다. 원고를 정리해 가져가면 선생은 꼼꼼히 읽고 고친 다음 친필로 검사를 했다는 사인을 하시곤 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노력으로 탄생한 저서가『인간 단군을 찾아서』(학고재) 와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눈빛, 2002)이다. 이 두 권은 선생의 한국 고대사 연구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은 고대사 연구를 시작한 이래 위의 두 권을 포함해 모두 5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1989년 이병도와 공저한『한국 상고사 입문』이 첫 번째 책이다. 이 책은 단군 존재를 부정했던 이병도를 선생이 질타, 설득해 단군의 존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돌아서게 하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책이다. ‘선생 덕택에 이병도 선생이 다시 살아났다.’ 그 후 선생은 다시 독자적으로 『한국 상고사』를 발간했고 이것을 영문판으로 출간하기도 했다.『인간 단군을 찾아서』는 선생의 회고록이자『한국 상고사 입문』의 개정판이기도 했다. 김유경 씨는 “『한국 상고사 입문』이 너무 어려워서 다시 풀어쓰고 새 글을 보탠 것이『인간 단군을 찾아서』이다”라고 말했다. 선생은 이 책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늘 가까이에 두고 어루만지곤 했다. 이 책에는 일본 왕조의 발생이 한국에서 건너갔다는 것을 실증하는 일본측 자료를 현지 답방을 통해 확인하는 대목이 압권이다. 단군조선이 신화가 아닌 실재라는 사실을 문헌을 통해 정확히 밝히려는 노력이 그야말로 철저하다.
송곳처럼 날카롭고 조금의 두려움도 없는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도 단군조선을 밝히기 위한 후속 저서였다. 선생은 “실존인물 단군이 반만년 전에 고조선을 개국하여 현재 중국의 요동을 중심으로 크게 활약한 선진 광역국가였음을 역사자료에 의해 밝히고 당시 후진국이었던 일본은 오랜 역사와 함께 선진국이었던 한국의 영향을 받은 바 크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데 있다. 한국 역사에 고대사는 물론이요, 근대사와 현대사도 내가 보고 겪은 바로는 왜곡된 것과 착오된 것이 많아서 반드시 복원해야만 우리 후손이 자부심을 가지고 새 기운을 낼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선생의 노력은 이제 뜻있는 이들이 새롭게 평가하고 있다. 학술원 회원인 법학자 황적인 씨는 “선생의 한국 상고사 연구는 너무도 소중한 업적이다. 법학은 많은 후학들로 계승이 되지만 선생의 상고사연구야말로 무슨 일이 있어도 앞으로 지속돼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유경 씨는 “선생은 학자로서 언제나 자기가 본 것만을 이야기했다. 단군 연구를 위해서도 무엇보다 옛 문헌의 기록을 정확하게 고증하는데 매진했다. 선생만큼 책을 많이 본 이가 없을 것이다. 선생은 진정한 학자였고 사회사나 역사, 법학을 대하는 태도는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어떤 일에도 조금의 두려움도 없었으며 권력이나 금력, 종교, 어떠한 이해관계에도 휘지 않았다. 일체의 친일 행위도 없었다”고 말했다.
글 김예옥 출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