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오병욱 칼럼니스트] 오늘은 송추계곡이다. 지난 주말 개인적인 사정으로 친구들과의 산행에 불참, 산을 좋아하는 친구가 강력추천해 왔던 양주 불곡산을 가려고 아침에 가볍게 준비를 하고 혼자 집을 나섰다. 의정부 쪽으로 차를 몰고 가던 도중, 송추 안내판을 보고 집사람과 몇 년을 같이 다니던 송추계곡이 생각나 방향을 바꿔 송추계곡 입구로 향했다.
집사람과 다니던 때는 약 2킬로의 거리가 물가 음식점으로 가득하여 계곡 보기가 남의 집 마당 구경하는 듯하였으나, 언젠가 북한산의 북한동 음식점처럼 다 철거되었다는 소리만 듣고 있던 차에, 추억도 떠올릴 겸 변한 모습도 확인하려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은 외곽순환 고속도로 밑의 주차장으로 집사람과 다닐 때는 새로 만든 주차장이라 무료였는데 이젠 유료 무인 주차장이다. 오르는 계곡은 산책길로 잘 단장이 되었고 여성봉을 오르는 오봉탐방지원센터 앞은 새로운 건물에 음식점들과 광장 등이 잘 정비되어 있다. 나도 사진 몇 컷 찍고 간단한 김밥과 음료를 준비하고 산행을 시작한다.
산길은 잘 정비되었으며, 가족, 친구들로 오르는 팀이 제법 있다. 숲속은 낙엽이 그득하고 경사가 있는 능선을 오르기 시작하니 땀도 나기 시작한다. 웃옷을 벗고 물 한 모금 마시며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시 힘을 내어 오르기 시작하니 능선은 계단과 흙, 바위를 오가며 오르막을 한동안 오른다. 능선에서 문득 뒤를 돌아보니 양주와 파주 일대가 산등성이 아래에 자리 잡은 풍경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1시간을 오르면 여성봉 정상이다.
여성봉의 넓적 바위로 오르기 위해서는 여성의 신체를 닮은 입구를 지나야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입구가 바뀌어 있다. 바위 옆의 새로 난 데크 길로 오르니 예전에 집사람이 힘들어하며 오르던 여성봉도 오름이 편하다. 이제 여성봉도 이름을 바꿔야 하나. 여성봉 마당바위 한편에는 전망대처럼 솟은 바위꼭대기가 또 있다. 여기서는 오봉과 인수봉, 백운대, 노고산이 사방으로 솟은 게 눈에 들어오나 오늘은 미세먼지 탓인지 원경이 뿌옇게 보인다. 경관에 취해서 한참을 휴식하고 다시 길을 잡는다.
소나무가 더 짙어지는 오르막을 30분 더 오르면 오봉 정상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다섯 개의 암 봉 중에서 가장 높은 첫 번째 봉우리 정상이다. 그리 넓진 않지만, 나란히 늘어선 나머지 네 개의 연봉을 감상하는 게 이곳의 매력 포인트다. 남쪽 발아래에는 우이령길도 가깝게 보인다. 다시 능선을 따르다 오봉보다 더 높은 이름 모를 봉우리를 따라 도니 갈림길에서 이정표가 나온다. 송추폭포와 자운봉. 갈림길에서 잠시 하산할까 고민하다 자운봉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자운봉은 도봉산의 최고봉으로, 자운봉을 필두로 만장봉과 선인봉이 나란히 서 있으며, 선인봉은 암벽등반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자운봉 쪽은 길이 험하다. 가다가 능선 바위틈에 앉아 가져온 김밥과 음료를 먹으며 바라보는 서울 도봉 방면은 미세먼지로 시계가 약간 흐리지만,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한참을 앉아서 바라보는 서울. 저마다의 사연을 지고, 또 저마다의 희로애락을 안고 살아가는 저 아래 사람의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떤 책에선가 사람들이 큰 스님에게 물었다 한다.
“스님, 살아가는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 “삶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 스님은 “세상에 나고 죽는 건 내가 정한 것도 아니고, 다른 동물이나 식물처럼 그냥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삶인데, 자꾸 의미를 찾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 되물었다 하지 않았다던가.
큰 스님도 모르는 인생의 의미, 삶의 의미가 인생에 꼭 필요한 건 아니지 않을까. 만약 삶의 의미를 꼭 찾고 싶다면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에 스스로 부여한 의미를 부여잡고 사는 것이 아닐까. 하릴없는 생각으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다시 기운을 내어 드디어 자운봉 앞에 섰다. 자운봉, 만장봉, 선인봉은 오를 수 없어 그 앞의 신선대로 향하니 오르는 암벽에 사람이 가득 줄을 서 있다. 이곳은 우이동과 도봉동 쪽에서 오르는 인파가 많아, 오를 수 있는 신선대가 정체를 이룬다. 그래도 날씨는 화창하여 30 여분을 기다려 신선대 정상에 서본다.
기다리는 많은 사람을 위해 얼른 표지석 사진을 찍고 돌아 나와 ‘와이 계곡’ 앞에 서니 주말과 휴일은 일방통행이라 우회하란다. 와이 계곡은 ‘Y 모양’으로 거의 수직에 가까운 바위를 철제 줄을 잡고 내려갔다가 올라와야 해서 이름 붙여진 곳으로 예전에는 험하고 좁아서 등산배낭을 바위에 마구 부딪쳐야 했는데 이제는 데크를 깔았다는데 어느 정도 안전해졌다는데 확인하지 못해서 아쉽다.
우회하여 이른 곳은 포대 정상. 이곳에 포대 능선이라는 것이 대공포 진지가 있어서 포대 능선이라 하며 이곳에서 송추계곡과 회룡사, 사패산으로 갈라지는 교차로까지 약 1.5㎞가 이어진다. 능선을 따라 오르내림이 심하지만, 어쩌다 불탄 나무가 보이는 능선이 있기도 하고 곳곳에 암 봉이 있어 암 봉에 앉으면 불암산과 수락산이 한눈에 들어오기도 하며 서울 북쪽의 경치를 바라보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이윽고 다다른 교차점, 여기서는 다시 송추계곡으로 하산길이다. 바람은 시원하여 봄을 품은 봄바람이지만 계곡의 계곡물은 아직 얼음에 잠겨있다. 한 시간여의 하산 끝에 옛 탐방 지원센터 자리를 보니 모든 것이 없어지고, 상점가는 정비되고 산책길로 약 2㎞가 정비 되어 있다. 차로 돌아가는 길, 산에서도 봄바람을 느끼더니 다음 주 월요일이면 3월 1일, 태극기가 떠오르니 그가 생각난다.
그는 1900년에 태어나 식민지 시절 학교에서 열심히 일본어를 배웠다. 유창한 일본어로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했으나 ‘내선일체’의 교육과는 달리 곳곳에서 벌어지는 조선인 차별을 경험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신 일본인 ‘기노시타 효조’로 살면서, 철저히 자신을 숨겼다. 그러다 상점에서 조선인 여자가 도둑으로 몰리는 상황을 보고 자신이 한마디도 거들지 않은 모습에 실망, 결코 일본인일 수 없는 자신을 자각, 상해로 간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한인 애국단원으로 다시 일본에 돌아와 1932년 도교 황궁 앞에서 일왕 행렬에 폭탄을 던졌으나 폭탄이 터지지 않아 의거는 실패, 스스로 범인이라 밝히고 체포. 사형으로 생을 마감한 이봉창 열사다.
그는 가난한 노동자로, 그 평범한 삶에서도 식민지 사람의 고뇌가 있었고, 정직한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그러다 민족문제를 느끼고 일왕의 저격을 결심한다. 이봉창은 이처럼 식민지인으로서의 운명에 대해 고심하다가 투쟁에 나섰다. 그의 범상한 생애 자체에서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고, 지극히 평범한 가운데서 민족적 영웅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돋보이는 존재다.
그로 인해 상해 임시정부의 존재가 세계만방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고 사람들이 독립에 좀 더 많은 활동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와는 반대로 조정래 선생의 장편 소설 ‘한강’에 나오는 해방된 이승만 정부의 고등학교 국어 시간, 독립투사의 자손인 허진이 육당 최남선의 시조 ‘깨진 벼루의 명’을 배우며, 선생에게 왜 친일 시인의 시를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해방 시대에 친일을 비판하지 못하는 시대상을 힐난하는 대목이 떠오르며, 식민지 변절의 변을 생각나게 하는 시조 한 수 떠오른다.
깨진 벼루의 명(銘)/ 다 부서지는 때에 혼자 성키 바랄쏘냐?/ 금이야 갔을망정 벼루는 벼루로다/ 무른 듯 단단한 속은 알 이 알까 하노라/ 시조집 ‘백팔번뇌’
김형석 교수의 ‘100년을 살아보니’에 정신적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은 만족할 줄 안다는 말이 생각나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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