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사뉴스 강민재 기자 ] “그림 그리는 게 즐겁고 좋았지요. 그러니까 지금 이 나이(올해 팔순)에도 작품 활동을 합니다. 어렸을 적 선생님과 어머니의 칭찬이 팔순까지 성공적인 화백으로의 삶을 이끌었어요. 이제 내가 팔순이 되니 손자 손녀들에게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과 더불어 이러한 성공과 경험을 후학들에게 나눠주고 싶습니다. 미술교육은 어린 학생들의 정서교육에도 큰 역할을 합니다. 내면을 표현하며 상처를 보듬고, 존중하고 존중받는 법을 배워요. 앞으로도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 이러한 역할을 계속해 나갈 겁니다.”
팔순의 화백 장부남 한국청소년미술협회 이사장은 본인 말대로 마음은 이팔청춘인 듯 인터뷰 내내 젊은 사람 못지않게 열정적인 답변을 이어갔다. 특히 어머님을 생각하는 그리움과 애틋함을 표현하기도 하고, 공교육 상의 미술교육의 무관심 앞에서는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미술 치유’의 임상적 효과에 대해서는 지금도 노익장을 과시하는 자신이 산 증인임을 서슴없이 밝혔다. 팔순을 맞이한 장부남 이사장을 만나 직접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팔순맞이 개인전 및 자서전 출간 기념회를 연다. 소회가 어떤지?

벌써 팔순이 되었다. 믿어지지 않는다. 남들은 나를 팔순 먹은 노인이라 하겠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남들과 똑같이 마음은 이팔청춘이고, 지금도 장미꽃을 보면 가슴이 뛴다.
신사동 사거리와 삼청공원을 생각하면 한없이 젊음을 느끼곤 한다. 우리 아버지가 86세에 돌아가셨다. 문득 쓸쓸하지만 나도 6년 후면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때, 내 핏줄인 손자 손녀들한테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다. 칠순 때 화집을 발간했으니 팔순에는 자서전을 발간했다.
이번 팔순전이 ‘하늘이 남보’다. 풀이하자면?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나의 모든 경제권은 아내인 미스 심이 갖고 있다. 아내에게 용돈을 받아쓰는 내가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용돈을 드리면 어머니는 “이거 에미가 아니?”라고 물으시곤 했다.
“이거 에미 몰라요”라고 대답하면 얼른 돈을 속주머니에 감추시며 하시는 말씀이 “에라, 남자 녀석이 바보 같으니”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며느리에 받는 돈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이 주는 용돈을 받고 싶으셨던 것 같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 말씀이 귓전에 맴돌아 ‘하늘이 남보(하늘 아래 남자 녀석이 바보 같으니)’라는 화제로 오랫동안 어머니를 생각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

고향을 그리는 작품이 많은 것 같다. 특별한 사연이 있는지?
내 고향은 이북 황해도 연백이다. 1·4 후퇴 때 피난 와서 청주에서 살게 된 게 11살 때다. 이후 청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의 기억이 드문드문 떠오른다.
초록 물결이 넘실대는 드넓은 연백평야 하며, 개구리를 잡아 구워 먹던 일, 콩서리를 해와 일렬로 늘어놓고 불을 붙여 먹던 ‘콩청대’의 고소한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왜 해외에 나가면 다들 애국자가 된다고 하지 않나. 이런 고향을 두고 잠깐 피난 온다는 것이 지금까지 왔으니 가깝지만 갈 수가 없는 그리움과 향수가 여전히 내 어딘가에는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내 작품은 어릴 적 기억이 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작품 활동 초창기에는 황토색을 많이 사용했다. 어릴 적 뛰놀던 황금빛 연백평야에 기인한다.
작가마다 그만을 상징하는 키워드가 있는 것 같다. 장부남 화백의 작품세계를 정의하자면?

모든 작가들은 자신만의 작품세계가 있다. 나는 색과 덧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살다보면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는 희로애락이 있다. 그걸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했다.
눈에 보이는 사물을 그리는 것은 손재주만 있으면 누구나 그릴 수 있다. 자신만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을 고민하다가 색을 칠하기 시작했다. 기본색을 칠하고, 그 위에 또 색을 덮고, 색을 덮었다. 노랑은 유년 시절을, 빨강은 결혼한 청년 시절을, 파랑은 장년 시절을, 검정은 노년 시절을 상징한다.
지금은 최종적으로 녹색으로 덮고 있다. 즉 일반 사람들 눈에는 최종적인 색(최근 작품으로는 녹색)이 보이지만, 그 속에는 다양한 색, 다양한 삶의 흔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일부분에는 흔적을 남겨 놓는다. 아무리 덮고 덮어도 안 지워지는, 의도적으로 지우다가 안 지운 남기고 싶은 삶의 흔적이다. 그것이 나에게는 피난 시절의 배고픔과 멸시이다.
이번까지 개인전을 24회 여는 등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비결이 있는지?
그림을 그리는 게 너무 좋다. 즐겁고 재미있다. 60년 이상을 미술이라는 둥지 속에서 살아왔는데, 지금도 즐겁다. 아마도 그림 그리는 걸 억지로 하거나 돈 버는 직업으로만 생각했다면 지금까지 오지 못했을 거다. 미술에는 치유 효과가 있다. 건강이 안 좋을 때 오히려 몰두해서 그림을 그리고 나면 회복이 된다.
미술의 치유 효과는 단순히 나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예전에 국무총리실에 근무하던 직원이 우울증으로 고생했는데, 화실에 나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반년 만에 건강을 되찾았다.
이디스 크레이머(Edith Kramer(1971)도 미술치료는 본질적으로 자아(ego)를 지지하는 수단으로 미술의 힘은, 정신적으로 와해시키지 않으면서도 심리적인 기관을 탄력적으로 회복하도록 촉진하거나 혹은 무능력해진 방어수단을 다시 재조정하는 데 있다고 한다. 또 한 가지는 소장자들에 인기가 있다. 소장자들이 내 작품을 좋아하니 더 힘이 생긴다.
개인전 24회 동안 빚지거나 한 적이 없다. 그림 그리는 걸 내 스스로도 좋아하고, 내 작품을 소장자들이 찾아주는데 어찌 작품 활동을 멈출 수 있겠나.

한국 청소년 미술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등 미술 후학양성에 힘쓰고 있다. 간단히 소개를 하자면?
크레용 살 돈도 없던 시절, 담임선생님의 추천으로 사생대회에 출전한 적이 있었다. 운 좋게도 상을 수상하게 됐고, 어머니를 비롯한 주변의 칭찬이 이어졌다. 그게 그렇게 내 스스로를 으쓱하게 했다.
내가 그 당시에 실제로 얼마나 손재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머니를 비롯하여 주변의 칭찬이 이어지니 정말로 잘한다는 생각이 들고 더 열심히 하게 됐다. 어렸을 적의 칭찬과 격려가 팔순까지 성공적으로 이어진 걸 보며, 내가 받은 만큼 후학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한국청소년미술협회는 고 김종필 국무총리 주도하에 설립되어, 제3대 이사장을 맡고 있다. 미술대회 참가자가 5000명이면 절반인 2500명에게 상을 준다. 순위를 가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능하면 많은 학생들에게 자신감을 북돋아 주는 게 취지이고, 어렵지만 비용과 상관없이 그렇게 해오고 있다.
국 · 영 · 수 중심의 입시교육으로 인해 예체능 특히 미술에 대한 관심이 예전보다 떨어진 것 같다. 한국청소년미술협회의 앞으로의 계획은?
앞서도 말했듯, 미술은 그림 그리는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리는 행위를 통해 내면의 심성을 표출하고, 보듬는 데 있다. 또한 서로 존경하고 존중하는 것도 그림을 통해 배울 수 있다. 학교 폭력도 줄어들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나 IMF 이후로 미술교육이 붕괴된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지금은 학교 미술이 거의 사라졌다.
한국청소년미술협회는 이러한 공교육의 부재를 메꾸어 나갈 계획이다. 정기적인 대회를 계속 열어 가능한 많은 학생들이 참가할 수 있게 하고, 수상의 문턱은 낮춰 기쁨을 같이 공유할 것이다.
전국 장애 학교 159개교를 대상으로 미술대회도 이미 하고 있다. 수상자에게는 상장과 메달을 수여한다. 학교 현장뿐만 아니라 학생들, 그리고 학부모들도 모두 좋아하고 있다. 다만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후원 협찬이 줄어든 것이 아쉽다. 좀 더 많은 분들의 관심이 필요하다. 자라나는 학생들의 심성 교육을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
앞으로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칠순 때는 화집을 발간했고, 팔순 때는 자서전을 출판했다. 지금까지 내가 그린 그림 중 제일 큰 작품이 100호다. 서향 화가 윤형근 선배처럼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500호 작품을 만들고 싶다. 조각 조각을 붙이는 500호가 아니라 두루마리처럼 하나로 이어진 500호 작품이다. 아마도 완성된다면 우리나라 최초이지 않을까 싶다.
<대담> 박성태 대표 sungt57@naver.com
<정리> 강민재 기자 iry32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