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김수정 기자] 도날드 트럼프가 백악관 입성과 함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초강경 보호무역주의, 중국에 대한 위협을 가하는 등 자신의 공약을 전광석화처럼 이행하면서 세상을 충격에 빠트리고 있다. TPP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추진해온 아시아·태평양 지역 무역협정이다. 일본, 베트남, 호주 등이 참여했으며 아직 발효되지는 않았고 우리나라는 가입하지 않은 상태다.
美 TPP 탈퇴, 日 '울상'·中 '반색'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23일(현지시간) TPP 탈퇴를 결행하면서 일본과 중국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TPP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던 일본은 큰 실망감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과 더불어 경제패권을 다투던 중국은 TPP 무산 위기를 반기면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추진에 박차를 가하는 모양새다.
미국의 TPP 탈퇴를 가장 아쉬워 하는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의 자동차 및 부품업체들은 TPP의 주요 수혜 대상으로 꼽혀왔다.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인 미국으로의 진입 장벽이 거의 사라지기 때문이다.
NHK, 아사히 등에 따르면 트럼프의 TPP탈퇴는 이미 예고된 것이지만 아베 정권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지난달 24일 국회에서 "TPP발효를 위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지속적으로 이해를 구하는 한편, 중국 주도의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및 유럽연합(EU)과의 경제연대협정(EPA) 체결도 목표로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간 아베 정권은 아·태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TPP발효에 사활을 걸어왔기 때문에, 중국 주도의 RCEP에도 참여해 협상을 진행하기는 해도 적극성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TPP가 사실상 무산된 상황에서는 RCEP 체결로 방향을 돌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베 총리는 이날 "중국의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해양진출로 안전보장 상의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중국과는 어려운 과제도 있지만 전략적 호혜관계가 있다"라며 "관광을 포함해 관계 개선을 추진해갈 것"이라고 밝혀 중국과의 관계 개선 의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반면 중국은 쾌재를 부르고 있다. RCEP와 AIIB 등을 마무리한 중국은 이제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지대(FTAAP)의 확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RCEP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10개국과 한국, 중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인도 등 총 16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RCEP는 관세 장벽은 낮추었지만 노동자 인권이나 환경기준, 지적 재산권 등 국제규정 준수는 요구하지 않고 있다.
TPP가 무산되면 RCEP 협정만으로 중국이 약 880억달러, 우리 돈으로 100조원이 넘는 경제적 혜택을 얻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워싱턴 소재 보수 싱크탱크인 카토 연구소(Cato Institute)의 대니얼 이켄슨 무역정책연구소장은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에게는 기회다. 중국의 시스템을 모델로 이용할 수 있다. 다른 나라들을 자신의 축으로 가깝게 끌어들일 수 있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한·미 FTA 재협상?… 위기감 고조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이민정책 강화와 글로벌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자국내 공장 설립 압박 등 보호주의 색채를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가운데 다음 수순으로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개정문제가 거론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안팎에서 커지고 있다.
트럼프가 TPP 탈퇴 공식 선언과 함께 기존 FTA 협정에 대한 재검토를 시사한 만큼 한미 FTA의 폐기 또는 재협상은 시간문제가 아니냐는 시각이다. 트럼프는 이미 후보 시절 NAFTA, TPP, 한미 FTA를 묶어 ‘일자리를 빼앗는 협상’이라고 비판한 적도 있어 어떤 형태로든 한미 FTA에 불똥이 튈 개연성이 크다.
현대경제연구원은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강화로 한미 FTA 폐기 및 재협상, 중국에 대한 관세 인상 등의 조치가 이뤄질 경우 우리나라 수출에 막대한 타격이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미 FTA 폐기로 대미 수출에 대한 관세가 FTA 발효 이전 수준으로 상승할 경우 2017~2020년 한국의 대미 수출 총손실액 추정치는 약 130억1000만달러(약 15조3000억원)에 달한다.
정민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자국우선주의, 반자유무역주의를 주장하는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면 통상정책의 변화가 불가피하다"며 "우리 정부는 트럼프의 경제 정책을 면밀히 주시하면서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일각에서는 미국이 한미 FTA를 탈퇴하면 오히려 관세 등에서 손해를 보게 돼, 재협상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또한 재협상을 진행할 경우 한미 FTA가 미국 국내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임을 설명하는 한편, 한국 기업의 미국 내 일자리 창출 사례와 연간 수십억달러의 대미(對美) 무기 수입 등을 함으로써 유리한 결과를 끌어낼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관측이다.
이와 관련해 홍준표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자유무역의 혜택을 입었던 미국이 트럼프의 공약대로 강한 보호무역주의를 현실화할 경우 자국 경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라며 "장차 트럼프 경제 정책이 미국 의회의 동의를 얻는 과정에서 보호무역주의 강도가 완화될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