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중앙교회'검색결과 - 전체기사 중 371건의 기사가 검색되었습니다.
상세검색맥추절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처음 얻은 수확에 감사하여 지키기 시작한 절기입니다. 이를 칠칠절 또는 오순절이라고도 하지요. 우리나라 기독교에서는 7월 첫 주일을 맥추절로 지킵니다. 오늘날은 직접 농사를 짓지 않는 경우가 많으므로 각자의 삶 속에서 수고하여 거둔 영육 간의 열매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면 됩니다. 맥추절을 맞아 상반기 동안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하반기에는 더욱 풍성한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말씀을 100% 신뢰하는 것입니다. 즉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일도 하나님 말씀이라면 절대적으로 믿는 영적 믿음이지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류 역사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결코 불가능이란 것이 없으며 한번 이루리라 하시면 변개치 않고 반드시 이루시지요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하였습니다. 질병이 있는 사람이 나음을 얻고, 절망 속에서 희망의 빛을 보았고, 무의미한 삶에서 천국을 바라보는 소망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과 태어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의 만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소경을 치료하여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가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는 축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첫째, 순종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발라 주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진흙을 눈에 바른 후 물로 씻는다고 보지 못하던 사람이 보게 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더구나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 이런 지시를 했을 때에 대부분은 믿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을 놀린다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경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 실로암 물가로 가서 눈을 씻었습니다. 그 결과 태어나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눈이 밝아져 볼 수 있게 됐습니다. 둘째,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하는 사
다윗은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의 뒤를 이어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신 사람입니다. 그는 이새의 여덟 아들 중 말째로서 소년 시절 아버지의 양을 쳤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사무엘 선지자가 집으로 찾아와 형제 중 가장 어린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웁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중심을 소유하였고 선 가운데 행했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을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7장을 보면 이스라엘 군대가 이방 족속 블레셋과 대치했을 때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블레셋 진영에 키가 3미터에 가까운 골리앗이란 장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40일 동안 밤낮으로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해도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외치며 골리앗을 향해 물맷돌을 힘껏 던졌습니다. 이마에 물맷돌을 맞은 골리앗은 그대로 쓰러졌지요. 이스라엘 군대는 사기충천하여 블레셋 군대를 진멸하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이 사울왕의 보내는 곳
탁월한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를 신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는 성경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족속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위해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시고 승리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이 기드온에게 자신들을 다스려 줄 것을 요청합니다. 기드온은 이를 거절하지요. 그런데 기드온이 죽은 뒤 첩의 아들인 아비멜렉이 왕이 되려는 욕심으로 음모를 꾸몄습니다. 아비멜렉은 자기 어머니의 고향인 세겜 사람들을 회유하고 자금을 마련하여 불량한 사람들을 모아 이복형제 칠십 명을 죽입니다. 다행히 막내아들 요담만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아비멜렉이 세겜 사람들을 등에 업고 왕이 되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요담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세겜 남쪽에 있는 그리심 산꼭대기로 올라가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와 가시나무를 비유하여 세겜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나무들이 그들의 왕을 뽑으려고 할 때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요동하지 않고 전부 왕이 되는 것을 사양했습니다. 그런데 아무
이 세상에서 아무 염려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어떠한 문제가 있다 해도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며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야 할지 다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근심 없이 평강 가운데 살기 원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모든 문제를 내려놓고 전폭적으로 믿고 맡길 때 참된 안식을 누리며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공중의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하나님께서 기르시니 아무 염려 없이 유유히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또한 들의 백합화도 수고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자라게 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생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며 보살펴 주시겠습니까? 솔로몬왕은 아버지 다윗이 이스라엘의 정치, 경제, 군사적 기반을 든든히 닦아 놓았기 때문에 안정과 풍요 가운데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당시 궁중에서 쓰는 모든 기물이 다 정금이었기에 은을 귀히 여기지 않았고, 고급 목재인 백향목도 뽕나무같이 흔하게 사용할 정도였습니다. 솔로몬왕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농작물은 비바람과 따가운 햇살을 견뎌 실한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믿음으로 연단을 견디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참 자녀로 나오게 됩니다. 어떤 고난도 사랑으로 인내하며 모든 것을 믿고 바랄 때 능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연단을 극복하고 실한 열매로 나오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굳게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7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정금 같은 믿음을 소유하려면 마음의 악을 버리기 위해 참아야 할 일도 많으며,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면 애매히 고난받는 일도 생깁니다. 이러한 일을 만났을 때에는 ‘나는 주 안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구나.’ 하며 더 좋은 천국으로 인도하시려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믿음의 시련이 길어지면 ‘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을까?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 걸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믿고 인내할 때에 값진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둘째, 소망을 이루는 지름
많은 사람이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자부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어두운 곳에서는 더러움이 보이지 않아도 아주 밝은 빛이 비추이면 미세한 먼지나 얼룩까지 드러납니다. 이처럼 진실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크고 작은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우리가 거짓을 버리고 진실한 삶을 살 때 응답과 축복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삶 속에서 하는 거짓말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첫째, 행하지 않은 것을 했다고 말하거나, 행한 것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경우입니다. 재판에서는 증인의 말이 직접적으로 판결에 영향을 줍니다. 거짓 증언으로 무죄한 사람이 큰 손해를 입을 수 있고, 심지어 생사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거짓말이 얼마나 나쁜지 확연히 드러나는 대표적인 경우가 재판입니다. 성경은 한 사람의 말만 듣고 남을 정죄하지 말고 여러 사람의 말을 들어보고 정황을 바르게 분별해야 할 것과, 거짓 증언을 한 사람도 형벌을 받도록 하라고 했습니다(신 19:15~20). 또한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하는 사소한 거짓말도 버려야 합니다. 작은 거짓말은 물론, 사실을 말해야 할 상황에서 말하지 않는 것도 거짓이 됩니다. 예컨대, 자신의 잘못
사람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참된 만족과 안식을 얻기 원합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가정의 화평이 깨어지고 부부의 이혼율이 높아져 가는 추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행함이 필요할까요? 먼저, 부부간에 화목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1:3을 보면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말씀하십니다. 즉 가정을 사람의 몸에 비유한다면 남편은 머리, 아내는 몸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머리는 몸을 이끌고 돌보아 주며, 몸은 머리를 경외하고 순종함으로 상호 협력할 때 비로소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 5:22~23을 보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남편을 주라 칭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라면 결단코 그 앞에 무례히 행치 않을 것이고, 혹 자기 생각에 안 맞는다 해도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해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들은 아내에게 어떻게 행해야 하겠습니까? 에베소서 5:25을 보면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예로부터 선인의 참된 정신은 무수한 세월이 흘러도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잠언 13:22을 보면, 선인은 그 산업을 자자손손에게 끼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선인이란 악은 모양이라도 버린 상태에서 진리가 임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선인은 단지 악을 버린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의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산업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는 단지 재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결한 정신이나 가문의 힘 또는 권세나 여러 가지 사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진정한 선인은 어느 한 분야만 온전한 것이 아니라, 다방면으로 잘하여 범사에 형통한 삶을 살아갑니다. 성경 상에 나오는 표본으로는 아브라함을 들 수 있는데, 그는 과연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요? 첫째,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이루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옳다 하는 의가 아니요, 진리의 말씀에 따른 의를 이루었으므로 죄가 들어올 수 없었고 선을 좇아 온전히 행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의를 생명처럼 굳게 지켰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의, 종과의 관계에서의 의, 그리고 조카 롯과의 관계에서의 의 등 모든 분야에서 굳게 지켜
약 2000년 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부활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요? 첫째, 영원한 삶이 있음을 깨우쳐 줍니다. 최근에는 ‘죽으면 끝나버릴 단 한 번뿐인 짧은 인생, 하루를 살더라도 즐기며 살아야겠다.’ 하는 가치관이 급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현세의 행복을 추구해도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가 없지요. 이는 마음 한편에 죽음 곧 유한한 삶에 대한 두려움이 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써 부활의 표본이 되어 주셨고, 우리에게도 믿음으로 부활에 참예하여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으면 육의 몸이 설령 죽어도 주님께서 공중 강림하실 때 다시 살아납니다(요 11:25~26). 이에 성경은 주 안에서 죽은 성도들을 ‘죽었다’ 하지 않고 ‘잔다’ 하지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그러하셨듯이, 성도들도 마치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무덤에서 일어나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며 신령한
사람은 부모의 얼굴은 물론 성품까지 닮아서 태어납니다. 그래서 부모의 성품이 온유하면 아이도 대체로 온유한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사람의 성품은 선천적인 요소 위에 후천적인 요소가 더해져서 형성됩니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른데 어떤 성격이 좋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성격적인 특징이 너무 두드러지면 상대를 힘들게 하고 화평이 깨어지며 주변 사람들과 원활한 소통이 안 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많은 사람이 “타고난 성격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만 자신의 노력 위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격의 유형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변화시키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먼저, 대화를 할 때에 행복한 말보다는 자기도 모르게 근심과 걱정을 전달하고 은혜와 덕이 되지 않는 말을 하는 부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유형의 사람은 누군가에게 실수를 하거나 마음을 아프게 했을 때, 그것을 만회하거나 상대를 기쁘게 해서 관계를 회복하려 하기보다는 그냥 주저앉아 버리지요. 혹여 어려운 일이 생기면 믿음으로 이겨 나가려고 노력은 하지만 ‘안 되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으로 힘들어합니다. 좋은 일이 생겼을 때조차 ‘혹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염려하며 참 평안을 얻지 못하고 고통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나 삶의 목적을 분명히 아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본분을 찾아 참된 평안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왜 이 땅에 왔으며,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자신의 본분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자신을 희생하며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시든지 참으로 평안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참된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자기 자신을 깨닫고 자기의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먼저는 육적인 면에서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내 나이가 몇이며 본분은 무엇이고 능력은 어느 정도인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등을 분별하고 그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이런 육적인 면을 잘 알고 거기에 맞추어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야 삶의 보람을 느끼고 평안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적인 면에서도 자기의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자기 위치와 직분을 깨달아 맡은 일을 잘 감당해야 하지요. 구역장은 구역장으로서, 교사는 교사로서, 성가대원은 성가대원으로서의
사람들은 눈으로 보는 것을 통해 삶에 필요한 다양한 경험과 지식들을 쌓으며 성장합니다. 보고 배우는 것은 행동과 습관뿐만 아니라 인격 형성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마음과 생각에 담기는 내용이 달라지고 이로써 삶의 방향이 결정되기도 합니다.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맹모삼천지교’라는 유명한 고사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린 맹자가 공동묘지 근처에서 살 때는 곡하는 것을 따라하고, 시장 근처에 살 때는 장사하는 모습을 흉내 내며 놀았습니다. 이에 맹자의 어머니가 서당 근처로 이사하자 그제야 글을 가까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비진리, 악한 것을 보면 그것이 마음에 담기거나 그것으로 인해 마음과 생각에 있는 죄성들이 요동합니다. 예를 들어, 폭력적인 영화나 게임을 많이 보면 성격과 마음도 폭력적으로 물들고, 선정적인 것을 보면 그것이 뇌리에 남아 계속하여 비진리의 생각으로 빠져들지요. 싸우고 다투는 것을 보면 짜증과 혈기가 마음에 담기기 쉽습니다. 눈으로 본 것이 마음에 있는 죄성을 요동케 하는데, 이는 안목의 정욕을 말합니다. 안목의 정욕이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통해 마음이 동요되어 육의 것들을 추구하게 만드
봄이 되면 나무마다 푸른빛이 돌고 어느새 형형색색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납니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꽃향기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향기로운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선한 향기로 상대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기 원하시지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선으로 마음을 채우면 그리스도를 닮은 향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사람에게서는 어떤 향이 날까요? 먼저 그리스도의 향기는 ‘겸손과 섬김의 향’입니다. 마태복음 20:28에 예수님께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이심을 사람들이 믿을 수 있도록 놀라운 권능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히 섬기셨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오므로 때론 잡수시지도 주무시지도 못했지만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겸손과 섬김의 향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변화시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주님처럼 겸손과 섬김의 향이 나야 합니다. 가령, 윗사람
누군가와 변함없이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생명 다해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이며 결국은 썩어지고 변질되는 사랑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기쁨과 소망과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변함이 없는 영적인 사랑입니다. 오직 ‘영적인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며, 이는 사랑의 근본이신 하나님 안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을 보여 주신 분입니다. 과연 어떠한 사랑을 주셨을까요? 첫째는 긍휼히 여기는 사랑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서받을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에 대해서는 긍휼을 베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선으로 대해 주어도 고마운 줄 모르고 악을 행하면서도 뻔뻔한 사람을 보면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외면하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도 끝까지 사랑하며 회개할 기회를 주셨지요. 또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달려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었고, 영원한 사망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꿈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의 행복한 삶을 위해 저마다 목표를 가지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자신이 만족할 만큼 꿈을 성취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꿈을 성취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창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꿈을 주시고 인도해 주시면 능히 꿈을 이루어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한 분이십니다. 또한 우주만물을 주관하시며, 인류 역사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는 과정에서 모세를 통해 애굽에 열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또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을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셨으며, 반석에서 물을 내기도 하시고,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기도 하셨습니다. 엘리야로 하여금 3년 반의 가뭄을 예언케 하시는가 하면, 그가 간절히 기도하니 불의 응답과 큰 비를 내리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는 신약 시대에도 무수히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으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래되고 낡은 것보다는 새것을 좋아합니다. 낡은 것을 버리고 새것을 취했을 때, 하다못해 양말 한 켤레를 새것으로 바꿔 신어도 마음 한구석에 뭔지 모를 산뜻함과 흡족함을 느낍니다. 더구나 집을 새로 장만한다면 기쁨이 말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물건을 아무리 새것으로 바꾸어도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삶이 새로워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을 기뻐하시며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디모데후서 3:1~4에 보면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했는데 현대인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자기를 사랑하여 지나칠 정도로 치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각종 귀금속이나 고급 시계, 고급 옷 등을 구매하며 세상의 유행을 좇습니다. 또 돈 때문에 부모와 자녀 간에, 형제간에, 부부간에 등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더구나 사회의 귀감이 되어야 할 지식인들마저도 자기 유익을 따라 범죄를 서슴지 않는 것을 볼 때에 어느 곳
많은 사람이 새해 계획을 세우고 여러모로 노력하지만 한 해가 저물 즈음에 보면 이를 온전히 이룬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마음에 소망하고 꿈꾸는 것마다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각 분야에서 뛰어난 삶을 살았던 위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뭇 사람들에게 빛과 소망이 되었지만 이 세상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 뛰어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뛰어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니엘이나 요셉,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선진들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 명령을 지켜 행했기에 어떤 환경에 처해도 감사하며 기뻐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한결같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며복된삶을 영위했습니다. 신명기 28:1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뛰어난 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킬 것은 지키고, 행할 것은 행하며, 버릴 것은 버리고, 하지 말라고 한 것은
해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기독교인들은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기대와 행복으로 마음이 부풉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신다는 약속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것도 사랑이었고, 이 땅에서 행하신 모든 일도 생명 다한 온전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면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을까요? 첫째, 사랑의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온전히 희생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우리를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큰 희생을 감수하셨습니다. 어찌하든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며 천국 소망을 심어 주시기 위해서 제대로 주무시지도 드시지도 못하셨지요. 때가 이르러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실 때에도 모든 고통을 묵묵히 감당하셨습니다. 온갖 조롱을 견디시고, 가시가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고통과 온몸에 채찍을 맞는 아픔도 인내하셨습니다. 손발이 못 박히고 십자가에 매달리는 참혹한 형벌도 피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같은 고난과 희생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랑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
사랑이 담긴 말은 상대에게 감동과 행복을 주지만 미움을 담은 말은 상처를 줍니다. 예수님은 선과 사랑이 담긴 말, 진실한 말, 생명을 살리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불필요하고 무익한 말을 하지 않으셨으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온유하고 자상한 모습으로 영적인 말씀을 지혜롭게 비유를 통해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악한 자에게도 악으로 대항치 않으시며 오직 진리와 선으로 말씀하셨지요. 사람들이 올무를 잡고자 여러 가지 말로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도 결코 찌르거나 변론하지 않으셨습니다. 미운 감정이나 불편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참뜻을 깨달을 수 있도록 선하고 지혜로운 말씀으로 일러 줄 뿐이었지요. 그래도 깨우치지 못할 때에는 다투지 않고 조용히 물러나셨습니다.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한 율법사가 시험하기 위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율법사는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사가 자기를 시험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구태여 올무 잡힐 필요가 없기에 대답해 주시지 않고 되물으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그러자 율법사가 대답합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