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중앙교회'검색결과 - 전체기사 중 371건의 기사가 검색되었습니다.
상세검색굴뚝을 청소하던 두 사람이 일을 마치고 서로를 바라보았는데, 한 사람의 얼굴은 비교적 깨끗한 반면, 다른 사람의 얼굴은 검은 재가 잔뜩 묻어 있었습니다. 얼굴에 재가 많이 묻은 사람은 상대방의 얼굴이 깨끗한 걸 보고, 자신도 그러겠거니 하고 씻지를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상대방의 얼굴처럼 자신도 지저분하겠구나 하며 재빨리 씻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상대를 바라보는 것보다 바로 자신을 직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교훈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께 고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층 인사인 그들은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자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자신들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권세와 힘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그들의 외식을 책망하시니 백성의 지도자로서 입지가 곤란했습니다. 그럴수록 예수님에 대한 반감이 쌓여 어찌하든 꼬투리를 잡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차에 간음한 여인을 잡은 것입니다. 여인의 죄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 이 문제를 처리하는 예수님의 답변에서 허물을 잡으려는 의도였지요.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여인은 당장에
가시고기의 수컷은 암컷이 알을 낳을 둥지를 수초로 정성껏 만듭니다. 그곳에 암컷이 알을 낳으면, 그때부터 아빠 가시고기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소중한 알들을 지키는 데 온 힘을 다하지요. 때로는 자기보다 훨씬 덩치가 큰 물고기나 거북이와 사투를 벌이기도 합니다. 또한 알들이 잘 부화되도록 산소를 공급해 주기 위해 약 15일간 쉼 없이 지느러미로 부채질을 해주지요. 마침내 알들이 부화하면 아빠 가시고기는 죽음을 맞습니다. 15일 동안 새끼들을 지키느라 온몸의 기운이 다했기 때문입니다. 아빠 가시고기는 죽을 때도 새끼들을 위해 둥지 앞에서 죽는다고 합니다. 갓 태어난 새끼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자신의 몸을 내어주기 위해서이지요.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들은 아빠 가시고기의 살을 먹고 자랍니다. 결국 아빠 가시고기는 뼈만 앙상하게 남게 되지요. 미물인 물고기도 새끼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하물며 우리를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하시겠습니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특정 시대, 특정 사람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기 원하십니다. 어느 누구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시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악에 빠져
맥추절은 일 년 중 곡물의 첫 수확을 기념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입니다(출 23:16). 오늘날은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영육 간에 지키시고 열매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날이지요. 농부가 눈물이 날 정도로 고생을 겪으면서도 굳이 들판에 나가 씨를 뿌리는 것은, 때가 되면 기쁨으로 거두리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심는 것은 반드시 때가 되어 거둘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기도로 씨를 뿌리고, 예물로 씨를 뿌리며, 그 밖에 여러 가지 믿음의 행함으로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맥추절을 맞아 우리가 믿음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거두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농부가 밭에 씨를 심고 물을 주며 가꾼다 해도 사람의 힘으로 싹이 트게 하거나 결실을 맺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고전 3:6~7). 여기서 하나님께 맡겨 드린다는 것은 일이 되어가는 대로 방관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혹자는 씨도 뿌리지 않고 열매를 거두려는 수고와 노력도 하지 않은 채 무조건 하나님의 뜻대로 되리라고 말하지만, 이는 결코 믿음으로
늘 주위 사람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부딪치고 조그만 일에도 괴로워하며 가슴이 타는 듯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사랑과 믿음, 진실, 선, 의로움에 대한 목마름으로 갈급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떠한 목마름을 가진 사람이라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혼의 평안과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7:37 이하를 보면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성령이 마음에 임하여 진리인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 주십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로 참된 평안과 감사가 넘치는 성공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통하여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복된 삶을 영위하려면 어떻게 행해야 할까요? 첫째로, 하나님을 찬미해야 합니다. 찬송은 곡조 있는 기도로서 하나님께서는 찬송 중에 거하시며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 주십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많이 맞고 깊은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극심한 고난
진실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이 요동하거나 변개하지 않고 자신의 말과 마음을 지키며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집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을 바른길로 이끌어 주기도 하고, 때로는 억울한 사람의 입장을 진실하게 대변함으로 위기에서 구해 주기도 합니다. 자신의 일은 당연히 책임질 줄 알며, 자신과 관련된 분야 외에도 폭넓게 마음을 쓰므로 윗사람도 그를 믿고 더 많은 일을 맡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이처럼 자신에 대해서 책임을 질 뿐 아니라 모든 사람 앞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행함이 필요할까요? 첫째로, 언행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1:1에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말씀합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려면 진리대로 행하여 본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추어 나가야 합니다. 즉 어느 누가 보아도 흠과 티를 잡을 수 없고 존경할 만한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디도서 1:7~9을 보면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
만일 중요한 일을 누군가에게 맡기고자 한다면, 바로 자신의 일처럼 정성 들여 관리해 줄 수 있는 사람, 또 주인이 있든지 없든지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그 일을 수행할 만한 사람을 찾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그분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택하여 일을 맡기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떤 사람을 택하여 하나님의 일을 맡기고자 하실까요? 베드로전서 4:10에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선한 청지기와 같은 사람을 원하십니다. 청지기란, 일반적으로 큰 집의 가사를 책임지고 돌보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의 청지기란,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환경과 물질, 그리고 시간을 맡은 우리 모두를 가리킵니다. ‘선하다’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이 없는 것이니 선한 청지기란 악이 없고 범죄치 않으며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청지기는 과연 어떠한 사람인지, 악한 청지기와 대비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주인이 화를 당할 경우에 악한 청지기는 이내 도망가거나 외면해 버리지만, 선한 청지기는 자
거울을 보면 자신의 모습이 깨끗한지 더러운지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 66권 말씀을 거울삼으면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어떤 조직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머리가 되면 겉으로는 축하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불편하다면 사랑이 아닌 시기, 질투가 있음을 나타냅니다. 또 남을 섬길 마음이 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은 투기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미움, 교만 등 더러움을 씻어낼 때 깨끗한 마음으로 변화됩니다. 주님과 항상 함께하는 사람은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모든 삶이 정돈되고 행동 또한 거룩합니다. 하나님께서 24시간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눈동자 움직이는 것까지 지켜보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몸과 마음가짐을 정갈하게 하며 사람들 앞에서나 혼자 있을 때나 차이가 없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려다보실 때 사랑스러운 모습이기를 원해서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책망할 것이 없을 만큼 깨끗한 마음이 되면 하나님께서 만사형통한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면 주를 향하여 소망을 가진 사람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
‘은혜’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기쁨’과 ‘선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기쁨이 충만해진다는 의미에서 ‘기쁨’이요, 값없이 받았다는 의미에서 ‘선물’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사람 사이에서도 은혜를 갚는 것이 도리인데,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감사하는 차원을 넘어서 행함으로 보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받은바 은혜를 저버리는가 하면, 아는 데서 그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 은혜를 깊이 깨닫고 감사의 마음을 갖는 사람도 있고, 나아가 은혜에 감사할 뿐 아니라 반드시 보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17장을 보면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께 치료받았는데, 그중에 사마리아 사람 한 명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을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지요. 그리고 은혜를 잊지 않고 사례하러 온 사람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보답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은, 육신의 질병을 치료받음은 물론 구원받아 영생과 천국을 소유할 수 있으니 얼마나 큰 축복
가정의 달 5월이 되면 가정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아무리 부와 권세, 명예가 있다 해도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 못하면 참된 만족과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오늘날 이혼율이 급증하는 현상이나 청소년 범죄의 근본 원인 중에 상당 부분이 가정 안에서의 사랑의 결핍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건전한 가정이 붕괴될 때 부부간이나 부모 자녀 간, 그리고 형제간에 사랑이 식어져 불화한 삶을 낳고, 각종 범죄를 유발하는 것입니다. 가정은 가족이 함께 생활하는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이지만 가정을 통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과 남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삶을 배우게 됩니다. 가정의 역할과 그 영향력이 매우 큰 것이지요. 그러면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행함이 필요할까요? 먼저, 부부간에 화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하시며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 11:3) 말씀하셨습니다. 즉 가정을 사람의 몸에 비유한다면 남편은 머리가 되고 아내는 몸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머리는 몸을 이끌고 돌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전혀 죄가 없으시기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세주가 되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부활의 소망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면 부활의 소망이 있는 사람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첫째, 마음의 악을 버리고 선으로 악을 이깁니다. 예수님은 오직 선 자체만 있으셨습니다. 자신을 잡아 죽이려는 이들을 결코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이 악으로 물들어 있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인생들이 가엾고 불쌍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조차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눅 23:34). 악 자체가 없으시니 어떠한 악의 도전에도 오직 선만 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기 때문에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율법의 저주에 매이지 않고 부활하실 수 있었습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는 사람은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악을 버리고 선으로 악을 이깁니다. 둘째, 영적인 사랑이 충만합니다. 예수님께 사랑이 없었다면 십자가의 고난은 물론 부활의 영광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마음에는 지극히 큰 사랑이 있기
우리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각자의 그릇대로 쓰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며 크게 쓰시는 사람은 바로 금그릇과 같은 사람입니다. 금그릇은 첫째로, 변함 없는 그릇이고 둘째로, 소중한 그릇이며 셋째로, 아름다운 그릇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귀한 그릇인데, 하나님 앞에 귀한 그릇이란 어떤 사람을 말할까요? 귀한 그릇은 만들기가 쉽지 않고 흔치 않은 그릇을 말합니다. 이러한 그릇은 그 나름대로의 품위와 품격을 갖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믿음의 정도를 걸어 당당하게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았던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억울하게 애굽의 노예로 팔려 왔지만, 오직 정도만을 걸었기에 후일에는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는 큰 영광과 존귀를 얻었습니다. 결국 온 가족을 애굽으로 피신시켜 기근에서 구할 수 있었고, 야곱의 열두 지파를 조상으로 한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는 기틀을 마련했지요. 다음으로, 다니엘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주전 605년,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로부터 1차 침입을 받았을 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바벨론 제국이 융화정책으로 포로 중 유능한 인재를 등용할 때 그는 세 친구와 함께
사람은 저마다 다른 성품과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을 연단하여 그릇의 특성에 맞게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금그릇은 첫째로, 변함없는 그릇이고 둘째로, 소중한 그릇이며 셋째로, 아름다운 그릇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그릇이란 어떤 사람을 말할까요?하나님께서는 악이 없고 마음과 행함이 선에 속한 것을 아름답다 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상대에게서 티를 잡지 않고 오해하거나 판단하지 않으며 오직 상대에게 덕을 끼침으로 평안과 쉼, 행복을 줍니다. 어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으며 아무 일에든지 다투지 않지요. 악한 사람이나 힘든 상황을 만나도 마음에 불편함이 없으며 오직 진리 안에서 어떤 것이라도 이해하고 받아 줍니다. 마음이 솜털같이 부드럽고 포근하기에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 주며, 아늑함과 평안함을 줍니다. 더 나아가 다른 이를 위해 대신 죽어줄 수도 있는 최고의 선과 사랑을 가졌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럽겠습니까? 대표적인 예로, 에스더를 들 수 있습니다. 에스더는 유다인으로서 바사 제국의 왕후가 되었지만 마음이 교만해지지 않았고 겸손했습니다. 악한 하만의 궤계로 동족 유다인이 전멸될 상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각자의 그릇대로 쓰임받는데,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며 크게 쓰시는 사람은 바로 금그릇과 같은 사람입니다. 금그릇은 첫째로 변함없는 그릇이며, 둘째로 소중한 그릇입니다. 하나님 앞에 소중한 그릇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신 사람들은 한결같이 지대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 안에서 주어지는 특별한 사명들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곧 금그릇이지요. 대표적인 예로, 세례 요한은 인류의 구세주이신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11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중요한 사명을 띠고 있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지요. 세례 요한은 이런 소중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기가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누가복음 1:80에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한 대로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았지요. 그리고 마태복음 3:4에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
평소에는 아끼고 사용치 않다가 귀한 손님이 오거나 아주 특별한 날에 식탁에 내어놓는 귀한 그릇이 있는가 하면, 늘 편하게 쓰는 그릇도 있고 천하게 쓰는 그릇도 있습니다.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이는 그릇이 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금그릇이 된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금그릇은 어떠한 그릇일까요? 첫째로, 변함이 없는 그릇입니다. 금은 불활성 금속으로 다른 물질과 화학반응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본래의 아름다운 광택이 유지되며 변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환경에서도 변치 않는 중심을 가진 사람을 금그릇에 비유하시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한 번 만난 후로 어떤 시험, 환난, 풍파가 올지라도 조금도 변개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27을 보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면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여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안타깝게도 진정한 기독교인의 수는 결코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과 제사장들 그리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사람 앞에 보이려고 신앙생활 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신앙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요셉은 형들의 시기를 받아 애굽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 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의 특유의 성실함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주인 보디발의 인정을 받았고, 외국인 노예로서 가정 총무로 파격 승진을 하였지요. 그러던 어느 날, 주인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다가 도리어 누명을 쓰고 깊은 감옥에 갇혔지만 요셉은 결코 불평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요셉을 은혜를 원수로 갚고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자로 여겼지만, 요셉은 모든 것을 보고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을 뿐이었지요. 요셉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해명하고 따진다면 누명을 벗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진실이 드러나면 자신은 억울한 일을 당하지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소원을 이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까지도 능히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며 사랑 자체이시니 자녀들이 구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주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교회에 왔다 갔다 하면서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면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응답받는 신앙생활을 영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자기의 마음 됨됨이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미신을 믿거나 자기 스스로를 믿고 살다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났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혹시 해결되지 않을까?’ 반신반의하면서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대부분이지요. 따라서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아 추호라도 의심하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구원의 확신이 있는지 점검해 보고 신앙상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수 없지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우리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구하면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7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들이 하나님께 구하여 복된 삶을 영위하기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는 말씀이지요. 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찌 자녀가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부모가 있고,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줄 부모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우리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것으로 넘치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할까요? 첫째로, 하나님의 능력과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시편 105:4에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은혜와 능력을 주셔야 세상을 이기고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이 능력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며(막 9:23), 마음 중심에서 믿어지는 영적 믿음
하나님께서는 모든 응답과 축복을 반드시 영계의 법칙에 따라 주십니다. 여기에 적용되는 공의의 법칙이 바로 일곱 영입니다. 일곱 영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 행실 등 모든 분야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일곱 가지 측면에서 측정하지요. 일곱 영(1), (2)에서는 첫째 믿음을, 둘째 기쁨을, 셋째 기도를 측정하시는 분야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다음으로 일곱 영이 측정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넷째로, 감사를 측정합니다. 참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중심에서 감사의 고백이 나옵니다.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영혼이 값없이 주신 주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었고, 천국에 가게 되었으니 중심에서 감사가 나올 수밖에 없지요. 더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셔서 삶을 한 걸음씩 인도해 가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특별한 감사의 조건이 없다 해도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성장할수록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으로 축복해 주시기 때문에 감사의 조건도 점점 많아집니다. 하루에도 감사의 조건이 참으로 많습니다. 사건 사고 많은 세상에서 지켜 주시니 감사합니다. 또 악한 세력으로부터 지켜 주
하나님께서는 온 땅의 인생들을 두루 감찰하실 때 하나님의 마음인 일곱 영을 보내십니다. 일곱 영이 모든 사람의 마음과 행실을 살펴서 공의에 맞게 응답과 축복을 주시지요. 일곱 영(1)에서는 첫째 믿음을, 둘째 기쁨을 측정하시는 분야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 다음으로 일곱 영이 측정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기도를 측정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 뜻에 합당하게 기도하는지”를 측정합니다. 무조건 많이 기도한다고 합격하는 것이 아니라, 짧은 시간이라도 하나님 마음에 맞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기도는 먼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하신 대로 매일 습관을 좇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영적으로 깨어 있어 어떤 시험에도 들지 않습니다. 설령 시험이 와도 신속히 통과할 수 있지요. 또한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상의 선지자들은 물론 예수님께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구하면서 겸비하게 무릎을 꿇고 아뢴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하셨듯이, 기도는 자기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일곱 영은 영 자체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말합니다(요 4:24). 우리가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 마음을 알아서 그 뜻에 맞게 구해야 하는데, 이러한 마음과 응답의 기준을 제시해 주는 것이 바로 일곱 영입니다. 여기서 ‘일곱’이란 숫자는 하나님의 영이 일곱이라는 뜻이 아니라, 영적으로 ‘완전하다’는 의미로서 완전하신 하나님의 영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일곱 영이 측정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로, 믿음을 측정합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믿음대로 되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면 마음에서 믿어지는 영적인 믿음이 아니라 지식으로만 아는 육적인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머리로 알고 입술로 고백한다고 해서 믿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믿음은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고 인간의 생각이나 지식에 맞지 않아도 마음에서 의심 없이 믿는 믿음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을 믿지요. 이러한 영적인 믿음은 내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죄악을 버리고 성결되는 만큼 위로부터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영적인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명을 지키는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라” 하신 것은